너를 사랑하는 일은 유죄였다_<책 읽어주는 남자>

by 여행생활자KAI


문학 비평 시간이었다. 교수님은 문학 비평 토론의 주제로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책 읽어주는 남자>를 선택했다. 제시된 키워드는 나치의 과오에 대한 전쟁 시대와 전쟁 후 세대의 갈등과 융합, 무지로 인해 저지른 잘못해 대한 처벌을 어떻게 볼 것이느냐였지만, 학생들의 토론은 오히려 문맹이었던 한나의 비밀을 지켜주는 것이 사랑이냐 아니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교수님의 의도를 완전히 뒤엎은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 책이 갖는 주제적 함의가 그 만큼 폭넓다는 뜻도 될 것이다. 나 역시 <책 읽어주는 남자>를 몇 번이나 읽어 보고 영화화된 <더 리더>도 봤지만, 개인적으로는 나치와 이념, 신·구세대의 조화보다는 남녀의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읽을 때 책이 주는 감동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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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무대는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1950년대 말의 서독 하이델베르크다. 실제 작가가유년 시절을 보낸 지역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15세의 청소년 미하엘, 상대는 36세의 전차 안내원 한나. 우연한 둘의 만남은 곱절이 넘는 나이 차이를 뛰어 넘어 대담한 육체적 관계로 발전한다. 이 단계에서 빠지지 않고 동반되는 행위가 책 읽어주기다. 책 읽기와 샤워, 그리고 사랑이 한동안 유지되고 두 사람은 그 안에서 행복했다. 특히 남자가 여자에게 책을 읽어주는 모습은 법대 교수에 추리 소설을 주로 써온 작가의 이력이 무색 할 만큼 낭만적인 풍경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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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길어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황혼 속에서 그녀와 함께 침대에 머물고 싶어서 더 오랫동안 책을 읽었다. 그녀가 내 몸 위에서 잠이 들고, 마당의 톱질 소리도 잠들고, 지빠귀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그리고 부엌에 있는 물건들의 색깔 중에서 약간 밝거나 약간 어두운 잿빛 색조만이 남게 될 때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다.


처음부터 이 만남은 엔진이 고장 난 비행기가 중력과 부력으로 공중을 나는 활공비행에 불과했다. 불안한 비행은 어느 날 갑자기 한나가 사라지면서 추락한다.


어린 미소년과 성인 여성이라는 애초의 설정 탓에 파격적인 풋내기 남자의 첫사랑, 혹은 성숙한 여인을 통한 한 남자의 성장기로 다음 과정을 유추할 수도 있지만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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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난다. 법학을 전공한 미하엘은 세미나에서 아우슈비츠 관련 재판을 참관하게 되는데, 피고인석에 한나가 앉아 있었던 것.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여자 교도관이었던 한나는 글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자신에게 뒤집어 씌워진 모든 죄를 수긍하고 종신형을 선도 받는다. 미하엘은 한나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좀 더 어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다른 측면에서 충고를 전한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 대체적으로 그 비밀은 자신의 약점이거나 무척 소중한 무엇이다. 그 비밀을 끝끝내 모른 채하며 지켜주는 것이 사랑일까. 어떻게 해서든 비밀을 알아내고야 마는 것이 사랑일까.

미하엘은 한나의 품위를 지켜주는 쪽을 택했지만 같은 연장선에서 그녀를 도와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2부에 등장하는 이 부분은 1995년 출간 당시부터 독일 사회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과연 문맹이라서 모르고 가담한 나치 행적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종전 직후 과거 청산이 이뤄질 때 많은 독일인들이 나치가 행한 극악무도한 행위에 대해 ‘몰랐다’로 일관했다. 한나 아렌트가 주장했던 ‘악의 평범성’과 관련되는 대목이다. 한나역시 반성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문맹이었다는 것을 숨기는 데에만 급급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숨기기 위해서 그녀는 늘 싸우고 또 싸워왔다.”


한나는 자신의 존엄성을 떨어 떨어트릴 바에야 깜깜한 감옥에서 평생을 사는 쪽을 택했다. 그토록 자존감이 중요한 사람이었다면 왜 그 노력을 글을 깨우치는데 쓰지 않았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 정도다. 하지만 답답한 생각이 들지언정 한나는 자신만의 방을 지어놓고 그 안에만 있는 사람이었고, 미하엘은 그녀를 존중해줘야 했다.


한나가 전쟁세대라면 미하엘은 전후세대의 인물로 상징된다. 책은 이 두 세대의 연대 의식에 대해 말하는 한편 미하엘의 독백에서 비추어 볼 수 있듯 왜 전쟁 후 세대가 또 다시 책임을 떠안아야 하느냐에 대해서 여지를 남긴다. 실제로 많은 독일의 젊은 세대들이 비슷한 주장을 한다. 왜 내가 부모세대가 지은 죄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하는가? 역사적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끌어내는 이 책은 같은 이유로 독일의 공교육 과정에서 나치 범죄를 다룬 학생필독서로 읽히고 있다.


미하엘은 무기 징역으로 수감한 그녀를 위해 다시 책을 읽어주는 것으로 연인을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해 속죄하려 한다. 그는 책을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를 꾸준히 감옥으로 보냈다. 그러기를 4년째, 미하엘은 한나로부터 짧은 편지를 받는다. 드디어 그녀가 글을 깨우쳤다. 하지만 한나는 그 이후 어떤 편지도 그에게 쓰지 않았고 그럼에도 미하엘의 책 읽어 주기는 계속 된다. 그가 책을 읽어 주는 것은 그녀와 이야기하는 나름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한나는 18년간의 수감생활 끝에 사면을 받는다. 출소 하루 전날 밤 마지막 통화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젊었다. 그러나 다음날 그녀는 동이 틀 무렵 스스로 목을 맨다. 한나는 자신의 늙은 모습을 옛 연인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자살로서 속죄 한 것일까. 유서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른다.


한나의 묘소를 찾은 미하엘은 자신도 마찬가지로 죄인이라고 여겼다. 한나를 일평생 사랑했지만 한편으로 일평생 한나를 부인했다. “조그만 벽감 하나를 내주었을 뿐 나의 인생의 어떤 자리도 내주지 않았기에 나는 범죄자를 사랑한 까닭에 유죄였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왜 내가 그녀에게 내 인생의 한 자리를 내주었어야 한단 말인가?” 자문한다. 두 가지 질문이 그의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상충한다. 미하엘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의 묘소를 방문한 뒤 다시는 찾지 않았다. 어쩌면 세월에 점칠되어 그녀의 존재는 잊힐 수도 있었다. 그는 잊지 않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썼다. 결국 남자에게 한나는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와 같은 사랑이었다. 평생 여자에게 책을 읽어주었지만 정작 그녀의 마음을 읽지는 못했다. 남자는 후회없이 사랑하지 못해서 미련이 남는다. 때로 미완성이 그리움이란 옷을 입고 영원성을 지닌다. 미하엘은 한나의 차가운 육신에서 30대의 그녀를 떠올렸다.



그에게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운 여자였다.
찬란했던 사랑의 기억 앞에 객관적인 시·공간은 소모품일 뿐이었다.



역사적 논쟁을 덮고, 사랑의 차원으로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한나를 사랑한 미하엘은 유죄였다. 사랑했지만 그녀를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가중죄 역시 해당된다. 뜨겁게 사랑했으나 이루지 못한 생의 사랑은 무기징역이었다. 그는 그녀라는 감옥에서 영영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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