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셋 몸 <달과 6펜스>
방송 일을 잠시 그만둔 적이 있었다. 보통 방송작가는 막내-서브-메인 개념으로 이뤄지는데 막내, 서브 때는 개인 시간이 전혀 없을 만큼 일도 많고 수고로움 대비 급여가 냉정하다. 이 시기를 잘 이겨내야 메인으로 올라갈 수 있지만 고강도의 일로 인한 스트레스로 중간에 그만두는 사람들이 꽤 많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복사나 하면서 출연자들한테 아부를 떨면서, 방송 출연하기 싫다는 사람 집까지 찾아가서 애걸복걸하며 을도 아닌 정에 가까운 인생을 살아야 하나 자괴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저녁이 있는 삶’을 너무나 살고 싶었다. 일주일에 1번 이상 밤을 새우는 것도 모자라, 일요일에 쉬는 것이 사치였고, 아파도 링거 투혼을 불사르며 생방송 대본을 써야 하는 노예의 삶이 끔찍했다.
이 넌덜머리 나는 방송계를 이탈해서 잠시 일반 회사를 다녔다. 보통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퇴사를 선택하는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선택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꽤 적응을 잘하는 부류라고 생각했기에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완벽하게 오판이었다. 정해진 업무를 처리하는 것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사무실에 앉아있는 시간이 답답하고 지루했다. 밤을 새울지언정 방송을 할 때는 희열이 있었다. 반대로 정시 출퇴근으로 몸은 편했지만 정신이 괴로웠다. 성취욕이 전혀 없었다. 그토록 원하던 저녁을 가졌지만 그 시간이 온전히 행복하지 않았다. 결국 세 달을 억지로 채우고 회사를 그만두었고 다시 방송작가가 되어 15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
잠시 외도를 했을지언정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방송국을 좋아한다. 말도 안 되는 업무적 희생을 강요하지만 이곳이야말로 어떤 꿈의 공작소이기 때문이었다. 많은 직업군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방송계 종사자들은 본인이 원해서 이 일을 택한 사람들이 많다. 기본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단이다. 그래서 밤샘으로 코피를 쏟고 다크서클이 턱밑도 모자라 가슴까지 내려와도 다음날 시청률이 잘 나오면 씩- 한 번 웃고 또 촬영을 나가는 이들이 방송쟁이들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돈과 시간에 있어서만큼은 자유롭지 못했다. 각종 사회의 부조리와 고용 불안을 고발하는 곳이 방송국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비정규직보다 더 못한 일용직 노동자들이 가장 많은 곳이 이 집단이다. 나 역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었지만 고용 불안과 돈에 있어서만큼은 자유롭지 못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 하기 싫은 프로그램도 마다하지 않았고, 두세 개 이상의 프로그램을 닥치는 대로 했다. 언제 프로그램이 없어질지 모르기에 최소 두 개는 쥐고 있어야 실직의 위험에 대비할 수 있었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빛 좋은 개살구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이상과 현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상이 현실에 자주 부딪힐 때마다 나는 달을 쳐다보았다. 내 손가락을 동그랗게 만들어 그 구멍 사이로 달을 보았다. 언제쯤 저 달에 다다를 수 있을까.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찰스 역시 무척이나 달에 가고 싶은 사람이었다. 증권거래소에서 일을 하다가 늦은 나이에 화가로 전향한 폴 고갱의 실제 삶을 소설화 한 소설은 마치 꿈과 돈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하는 나를 그린 듯했다.
평범한 중년의 중권 중개인 ‘찰스 스트릭랜드’. 성실하게 살아온 그는 어느 날 갑자기 가족들을 버리고 홀연히 파리로 떠나겠다고 선포한다. 그의 선택은 모두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평소 이 사람의 성품대로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심지어 이유가 돈을 벌기 위해서도 아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도 아닌, 이루지 못한 화가의 꿈을 찾기 위해서라니. 대체 찰스란 남자가 예술을 알기는 했던 걸까.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 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 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
모두가 수긍하지 못할 행동이었다. “틀에 박힌 생활의 궤도에 편안하게 정착하는 마흔일곱 살의 나이에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출발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하지만 펴지 못한 꿈을 마음에 접고 사는 어떤 이는 책을 읽으며 백번이고 천 번이고 찰스를 이해할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시 예술가들의 성지로 불리던 파리에 정착한 그였지만 세상은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늦깎이 화가에게 관심을 주는 이는 없었다. 현실이란 냉정하고 차가운 바람은 많은 이들이 퇴사를 망설이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감히 사표를 던져버리고 뛰쳐나와 내 길을 걸어가는 당당한 모습을 곧잘 상상했던 나는 찰스가 성공하기를 바랐다. 뭐랄까. 그가 잘 되어야 나의 선택에도 합리화가 부여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부터 찰스는 이해할 수 없는 기행들을 한다. 민폐남도 이런 민폐남이 없다. 아무도 봐주지 않던 그를 물심양면 도와준 화가 친구 더크의 부인 블란치와 불륜을 저지른다. 더욱이 남편까지 버리고 그를 사랑했으며 기꺼이 모델이 되어 주었던 그녀를 외면해서 자살에 이르게 만든다. 그러나 정작 찰스 본인은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예술’ 뿐이었다. 창작혼이란 것이 이 모든 비도덕적인 행동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찰스는 홀연히 예술의 기원을 찾아 타히티 섬으로 떠났다. 이곳이야말로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울 수 있는 오아시스였다. 그는 현지인 아티를 아내로 맞아 아이를 낳고 정착한다. 그림 재료를 사기 위해 가끔 일을 하며, 사람들에게 돈 대신 그림을 선물하며 근근이 살아가지만 작품 활동은 그 어느 때보다 왕성했다. 이 남자의 인생이 좀 펴질까 기대를 갖던 찰나에 찰스는 한센병을 얻는다.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유작으로 자신이 살던 집에 벽화를 남긴다. 찰스란 이름은 살아생전 주목받지 못했지만 사후 영화 같은 삶과 더불어 유명해지면서 천재 화가로 역사에 기록된다.
이 소설의 전체적인 이야기는 폴 고갱의 삶과 거의 일치한다. 뿐만 아니라 작가와의 삶과도 닮았다. 서머셋 몸 역시 영국에서 의학을 전공했지만 글을 쓰고 싶어 했다. 자신의 의사 적 경험을 담은 <램버스의 라이자>가 큰 반향을 일으키자 과감히 병원을 그만두고 작가로 전향한다. 책 속의 찰스, 폴 고갱과 달리 서머셋 몸은 살아생전에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인정받은 유명 작가로 천수를 누리다 아흔 살에 생을 마감했다. 결국 서머셋 몸이야말로 달과 6펜스 모두를 잡은 행운아였다.
작가와 달리 우리네 현실에서 달과 6펜스를 함께 거머쥐지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찰스가 이기적으로 보이면서도 한편으로 부럽기도 하다. 이루지 못한 꿈 앞엔 늘 망설임이 가로막고 있다. 퇴사 혹은 내 꿈을 찾기 위해 우리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나를 제외하고도 신경 써야 할 것들이 산적해 있다. 주변에서 욕을 좀 들어도 기어코 나아가는 것이 맞을까. 나를 둘러싼 가족, 환경과 타협하는 것이 맞을까. 꼭 놓치고 살았던 꿈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가령 양육과 일의 양립에 대해 고민하는 엄마가 된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와 주변에 미안한 마음을 접고 자아 성취의 길을 걸어갈 것이냐, 평생 오지 않을 이 순간을 오롯이 아이한테만 쏟아붓느냐의 갈림길에서 많은 엄마들이 고민한다. 이상과 현실의 상충은 가족, 육아, 일 등 우리 삶 곳곳에서 수많은 선택지를 갖고 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자신의 신념에 따른 결정이기에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옳다 나쁘다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가 서머셋 몸 역시 뾰족한 답을 내리지는 않는다. 찰스의 말로는 쓸쓸했다. 그가 행복했는지도 명확히 모르겠다. 다만 그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길을 나아갔다.
‘그렇기 때문에’ 포기하기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갔다.
달과 6펜스는 똑같이 동그란 모양을 하고 있지만 성질은 완전히 다르다. 인류는 늘 미지의 달을 동경하는 한편 윤택한 삶을 선물하는 6펜스를 쫒았다. 오늘도 누군가는 달을 찾아 먼 비행을 떠나고, 누군가는 6펜스를 위해 땅 위를 열심히 걸어간다. 이상적인 삶과 현실적인 삶, 밤하늘에 떠 있는 삶과, 지갑 속에 갇힌 삶, 무엇이 완벽한 삶이라고 정의 내릴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사람은 자신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대로 된다”라고 했던 간디의 말을 믿어본다.
커졌다가 작아지기도 하지만 늘 까만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은 오늘도 6펜스를 온전히 놓지 못하는 나를 가만히 비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