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종식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고도를 기다리며/사무엘베케트

by 여행생활자KAI

매일 찾아오는 하루 가운데 우리가 똑같이 하는 일 중 하나는 기다림이 아닐까 한다. 약속 장소에서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고, 신호등에서 파란불을 기다리고, 찻물이 우러나기를 기다리고, 상처가 치유되길 기다리고, 언젠가 다시 찾아올 행복한 어느날을 기다린다. 그렇게 우리는 날마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일평생 사람이 기다리는 시간은 평균적으로 6~7년 정도라고 한다. 기다려도 오고, 기다리지 않아도 찾아올 순간들이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7년을 기대감과 설렘으로 보낼 수도 있겠고, 조바심 내며 불안한 마음으로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2020년 코로나시대를 보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평범한 일상의 귀환’을 기다렸다. 불안함 보다는 평정심이 공포와 울분 보다는 이성과 차분함이 동반하는 기다림이기를 다독이고 또 다독이며 나날들을 보냈다. 코로나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론 가운데서도 긍정을 잃고 싶지 않았다. 기다림이란 희망의 다른 이름이라고 믿었다. 나는 마치 고도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외출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답답한 일상을 견뎌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사무엘베케트가 2차 세계대전으로 전 세계가 핏빛으로 가득했을 때 평화를 기다리며 쓴 희곡이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의 위기로 불리는 코로나 시대, 그때나 지금이나 긴박함 속에서의 기다림은 절실하다.


기다림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고도를 기다리며>는 제목이 곧 줄거리다. 제목 그대로 ‘두 남자가 고도를 기다리는 이야기’다. 고도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배경조차 한 나무 아래가 전부다.


에스트라공: 자 가자
블라디미르: 갈 순 없어
에스트라공: 왜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려야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극 중엔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먼저 블라디미르는 인간의 정신적 측면을 상징하며 반드시 고도가 나타나 구원해 줄 것 이라고 믿는 쪽이다. 반대로 에스트라공은 인간의 쾌락적 측면을 상징하는데 기다림을 힘들어 하며 떠나자고 재촉하는 인물이다. 극 중간에 포조와 럭키가 나온다. 포조는 럭키의 주인으로 그를 마치 짐승처럼 다룬다.


주인공인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첫 등장부터 마지막까지 고도만 기다린다. 고도가 누구인지 왜 기다리는지 목적조차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기다림이란 지루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심심함을 말로 채운다. 대부분 쓸데없는 농담과 이해할 수 이야기들이다.

대화는 때로 어이가 없고 우스꽝스럽지만 그래도 침묵 보다는 나았다. 말을 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한 예로 포조의 하인 럭키는 주인의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좀처럼 말이 없는 럭키는 모자를 써야만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었는데, 모자를 씌우자마자 미친듯이 말을 뱉어낸다. 거의 배설하는 수준의 독백으로 세 페이지 분량을 채운다. 말을 한다는 것은 내 존재를 증명하는 수단이다. 극 중 모든 인물들은 말을 통해 고루한 삶을 이어나갔다.

끊임없이 대화를 했음에도 지루함을 죽일 수는 없었던 그들은 체조도 하고 별 짓을 해보지만 무심한 고도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쳐 자살까지 떠올린다.




블라디미르: 내일 목이나 매자 고도가 안오면 말이야
에스트라공: 만일 온다면?
블라디미르: 그럼 살게 되는거지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았다.


이쯤되면 답답해진다. 아니 죽을 각오까지 했으면서 왜 고도를 찾아 나서지 않는 것일까? 발걸음이라도 옮길 법 한데 일체의 요동도 없다. 언제 올지도 모를 고도를, 지금 자신이 행복한지 불행한지 어떤 상태이지 조차 모른 채 기다린다. 보는 사람마저 맹목적인 기다림에 현기증이 날 정도다.


블라디미르: 넌 네가 불행한지 아닌지도 모른단 말야?
소년: 몰라요.
블라디미르: 꼭 나 같구나.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들은 고도 때문에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각자의 고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매력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고도는 어디에 넣어도 다 대입이 된다. 행복, 돈, 사랑, 성공, 명예 모든 것이 가능하다. 사무엘 베케트에게 대체 고도가 누구냐고 질문하자 “내가 그것을 알았으면 작품에 넣었을 것” 이라고 말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고도는 열려있다.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1957년 뉴욕 샌 퀀틴 형무소에서 <고도를 기다리며>가 상연된 적이 있었다. 단지 여배우가 출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채택되었지만 뜻밖에도 수감자들로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들에게 고도는 곧 ‘자유’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갇힌 이들에게 고도는 자유였고, 누군가에게 목표였으며, 어떤 이에게는 사랑이었다. 인간의 생이란 측면에서 보자면 고도는 ‘죽음’일 수도 있다. 사람은 똑같이 죽는다. 사는 것은 다르게 보자면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죽음에 다다르는 그 시간을 누구와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삶의 스펙트럼은 달라질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처음 읽게 된 것은 영화 <미쓰 홍당무>를 보고 나서였다.. 영화에서 왕따인 선생님 미숙(공효진 역)과 학생 종희(서우)가 준비하는 연극이 <고도를 기다리며>였는데, 사회에서 소외된 두 사람은 연극을 준비하며 둘 만의 연대를 형성해 간다. 그녀들이 주고받는 어처구니없는 대사와 행동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을 닮았다. 누가 봐도 이들은 사회적 관계에 대한 독해력이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하는 말들은 보편적이지 않았고 행동은 어설펐다. 관계의 문맥을 읽지 못한다는 것은 사회라는 무대에서 치명적 결함이었다. 그렇지만 미숙과 종희가 연극을 계속 준비할 수 있었던 것,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고도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혼자가 아닌 둘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혼자였다면 기다림의 지리멸렬함이 주는 고통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고독은 키에르케고르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명명했을 만큼 인간에게 혹독한 존재다. 홀로 지독하게 힘들었을 기다림도 둘이었기에 싸우고 부딪히더라도 견딜 수 있었다.


에스트라공: 당근은 이제 없고?
블라디미르: 없다 또 당근 타령이냐?
에스트라공: 그럼 무를 다오


이렇게 쓸데없는 말이라도 주고받을 수 있는 상대가 있었기에 기약없는 기다림이 가능했다. 어쩌면 블라디미르에게는 에스트라공이, 에스트라공에게는 블라디미르가 ‘고도’가 아닐까. 때로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 소중함을 모르듯 그들은 익숙한 서로를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고도는 나타나지 않고 소년이 나타나 전갈을 한다. 오늘은 고도가 오지 않는다고. “내일은 틀림없겠지?”, “네” 라는 대답으로 극은 끝난다. 고도는 아마 내일도 모레도 오지 않을 것이다.


바로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고도이기 때문이다.


달맞이꽃은 달을 기다리고 해바라기는 해를 기다리고 목마른 나무는 비가오기를 기다린다. 나는 누구를 기다리며, 나는 그 누군가의 기다림인가 생각해 보는 저녁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IXNGY7ODxR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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