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가정을 통해 본 보편적 사랑, 우리는 사랑해야한다.

<자기앞의 생>/에밀아자르

by 여행생활자KAI


방송작가로 일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만났다. 들어보면 사연 하나 없는 사람 없고, 고난과 역경을 겪어보지 않은 이 없으니 모든 사람들의 인생이 드라마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와중에도 평생 잊을 수 없는 몇몇 인생이 있었다.


‘입양’ 특집으로 알게 된 이 가족의 사랑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뜨거웠다. 대부분의 입양 가정들은 입양 사실을 숨기는 경우가 많아서 출연 자체를 기피했었다. 섭외에 애를 먹고 있던 와중에 선뜻 마음을 내 주신 이 가족은 입양도 쉽지 않은 일인데 자녀가 있음에도 장애가 있는 아이를 입양한 경우였다.


출연자는 아이를 보자마자 내 자식이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그 똘망똘망한 눈빛이 ‘나는 처음부터 당신들의 아이’라고 말하고 있었다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바로 입양을 결정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야 이런 자애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싶어서 절로 숙연해졌다. 자기애만 그득했던 나로서는 좀처럼 가 닿을 수 없는 저 먼 지점의 큰마음이었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항상 예의주시하며 돌봐야했음에도 그 누구도 힘들어 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가족들 모두 이 아이를 ‘복덩이’라고 불렀다. 복덩이가 집에 온 이후 더 화목해졌기 때문이다. 언니도 오빠도 아이를 보기 위해서 집에 일찍 왔고, 부부는 양육에 대한 책임감으로 더욱더 열심히 살았고 서로를 챙겼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동화같은 이야기를 조우한 뒤,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힘은 혈연도 지연도 학연도 아닌 ‘보편적인 사랑’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피가 섞이지 않아도 가족이 될 수 있었고 그 사랑은 때로 피보다 더 진했다. <자기 앞의 생>의 모모와 로자 아줌마가 그랬듯 말이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칠층 건물의 맨 꼭대기 층에 산다.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해야 하는 노고만큼 매일이 숨 고를 새 없는 고단한 하루였다. 10살 모모는(실제는 14살이지만) 매춘부의 아이들을 돌봐주는 로자 아줌마와 함께 산다. 가끔 엄마가 방문하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모모를 찾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로자 아줌마역시 아무도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탈출한 끔찍한 기억을 갖고 살아간다. 지금도 그때의 악몽을 꾼다. 이후에도 삶은 평탄치가 않아서 매춘으로 돈을 벌었고, 겨우 번 돈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빼앗겼다. 밝고 아름다웠던 한 소녀는 세월에 짓이기어 아무도 봐주지 않는 뚱뚱하고 노쇠한, 가끔 기억을 잃는 노인이 되었다. 아이를 맡기던 다른 매춘부들도 다 떠나버렸고 그녀에게 남은 이는 모모뿐이었다. 로자 아줌마는 모모마저 어른이 되면 자신을 버릴까봐 아이의 실제 나이까지 속였지만 모모에게도 가족은 아줌마뿐이었다. 아이는 늙어가는 아줌마를 진심으로 걱정했다. 머리카락이 급격하게 빠지는 아줌마에게 가발을 사주지 못하는 것이 못내 마음 아프다. 모모는 ‘세상에 아줌마와 자신 둘뿐이란 생각이 들었고 가끔 그 사실에 더럭 겁도 났다.’


1970년대 파리의 외곽 벨빌에 사는 로자 아줌마와 모모외 주변 사람들도 힘겹게 생을 이어간다. 전직 권투 챔피언이었지만 현재는 여장을 하고 매춘부로 일하는 룰라 아줌마, 양탄자 행상을 했던 하밀 할아버지, 나이지리아 출신의 포주 은다 아메데씨 등 이민자, 유색인종, 노인, 매춘부 등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다. 모모가 말했듯 세상은 불공평했다.



그들은 가진 것이 없었지만 서로의 연대와 사랑만큼은 누구보다 넉넉했다. 특히 모모와 하밀 할아버지가 주고받는 일상적인 대화들은 문장의 행간에 감정이 메이고 마음이 몽근해져 쉽사리 페이지를 넘기기가 어렵다. 하밀 할아버지는 아이에게 어디서도 배울 수 없는 삶의 지혜를 가르쳐 준다. 가령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다’는 진리 같은 것을 말이다. 모모는 할아버지로부터 인생을 배웠고 할아버지는 모모로부터 따뜻한 마음을 받았다. 모모는 늘 하밀 할아버지의 이름을 붙여서 불렀는데,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에게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모모는 속 깊은 아이였다.


모모는 아줌마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병들었고 죽음이 임박했다. 모모는 마지막 순간을 함께 보낼 장소로 아줌마가 공포를 느낄 때 숨곤 했던 지하실, ‘유대인 둥지’를 택한다. 지금까지 아줌마가 자신을 키워주었듯 이제는 자신이 그녀를 돌 볼 차례였다. 똥오줌을 가리지 못해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아줌마를 꼬옥 끌어안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자신에게 냄새가 나는 것을 알고 창피해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사람들이 시체 썩는 냄새를 쫒아 지하실 문을 열기까지, 3주 동안 아줌마 곁을 떠나지 않았다. 로자 아줌마는 숨을 쉬지 않았지만 모모에게는 상관없었다.

“숨을 쉬지 않아도 사랑했으니까”




작가는 일평생 사랑을 썼다. 자신에게 혹평을 쏟아내던 프랑스 문단을 조롱하며,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로맹가리. 그는 <자기 앞의 생>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작품을 통해서 사랑을 말했다. 작가,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상자, 영화감독, 영화배우 진 세버그와의 결혼 등 삶 자체가 한 편의 영화였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유명인사였지만 연인 진 세버그에 이어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일평생 사랑을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외로움을 느꼈던 것인지, 생을 스스로 마감하는 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확실한 것은 수많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품고서도 그는 사랑을 믿었다.


모모는 할아버지에게 사랑 없이 살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그렇다“고 말했지만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고 울음을 터트렸다. 사랑 없이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사랑 없이 사는 것은 몹시 지루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 물론 많은 작가들이 사랑을 말했다. 다만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조금은 다르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가령 결혼을 하는 이유는
행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통을 서로 나눠 가지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어쩌면 ‘함께’라는 부사는 슬픔을 나눠 갖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회의 어두운 민낯을 다루룬 이 책이 전혀 슬프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비극을 나눔으로써 사랑으로 치환했기 때문이다. 모모도 로자아줌마도 하밀 할아머지도, 마음으로 낳은 아이를 마음으로 사랑하는 엄마도, 슬픔을 사랑으로 껴안았다. 문득 주저앉고 싶어지는 순간에 함께 앉아 주는 사람, 펑펑 우는 내가 창피해 할까봐 같이 울어주는 사람, 기꺼이 우산 밖으로 나와 나란히 비를 맞아 주는 사람, 그 사람들로 인해 우리는 살아간다. 그렇게 다음 생을 향해 한 발자국 나아갈 힘을 낸다. 모모가 말했듯 우리가 가진 것은 사랑뿐이니까.. 우리는 그것만은 지켜야 하니까..

https://youtu.be/D_jscdnKoM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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