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행생활자KAI Jul 30. 2019

독일은 우리를 반겨주지 않았다.

날 선 고슴도치의 허우적거림만 있었을 뿐..

                                                                                                                                                                                                                                            

짙은 안갯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차를 운전할 때 안개가 끼면 전조등을 켜고 속도를 늦춘다. 그래도 앞이 안 보이긴 마찬가지여서 언제 야생동물이나 다른 차가 끼어들지 몰라 불안하다. 되돌아가고 싶어도 좁은 외길이라 그럴 수도 없다.


독일에서의 나는 안갯속을 허우적대고 있었다. 내 마음은 여전히 한국에 있었다. 그렇다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고, 아우토반을 기분 좋게 쌩쌩 달려갈 수는 더더욱 없었다. 독일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100% 남편의 의견에 동의하지 못했다. 나도 안다. 결정을 내려놓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엄청나게 지질한 행동이란 것을.


무엇보다 날씨가 결정적이었다.

내 기분과 날씨는 완벽한 일체를 이루었다. 6월임에도 불구하고 첫해의 독일 날씨는 안개 그 자체였다. 이틀에 한 번꼴로 비가 왔고 비가 오지 않는 날은 흐렸다. 낑낑대며 싸 들고 간 반팔은 입지도 못할 정도로 추웠으며, 발이 시려 운동화를 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햇살이 더욱더 간절했다.


두 번째는 분위기였다.

통일이 된지 한참이 지났지만 여전히 독일은 서독과 동독의 격차가 있다. 우리가 정착하게 된 라이프치히라는 도시는 동독의 중소도시로 서울과는 비교가 안 되게 작았으며, 외곽으로 조금만 나가면 각종 어두운 글자들이로 가득한 그래피티와 쓰러져 가는 건물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결정적으로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무뚝뚝했다. 트램을 탈 때면 외국인을 낯선 혹은 거부감을 가지고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마치 거인국의 초대받지 않은 소인같았다.  내 앞의 모든 것이 잿빛이었다.


이 모든 것과 아랑곳없이 직진형 남편은 비자를 받는데 필요한 행정 절차를 빠르게 해결하기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녔다. 보통 비자를 받기 위한 순서로 집을 구하고, 계좌를 만들고, 거주자 등록을 하고, 보험에 가입하고, 학생 등록을 하고, 외국인청과 약속을 잡는다. 글로 나열하면 겨우 두 줄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이 일련의 일들을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서툰 외국인이 처리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도 한국처럼 빠른 서비스가 아닌 지극히 느림을 지향하는 ‘독일’이라는 나라에서는 더욱이 말이다.



매일이 싸움의 연속이었던 나날들.. 우리의 속도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는 ‘빨리’에 안달 난 사람처럼 보였다. 도착한 다음날부터 시차 적응할 새도 없이 매일매일 어딘가를 갔다. 관청을 가고 보험회사를 가고 은행을 갔다. 나는 거의 끌려다니다시피 다녔고 이내 지쳤다.


물론 일처리는 빨리하는 게 좋다는 것을 나도 안다. 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했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커피 한 잔 마실 시간도 없이 나가자고 부추겼고, 끼니는 햄버거 혹은 라면으로 때웠다. 집에 오면 너무 피곤해서 쓰러져 잠들기 일쑤였다.


그때의 우리는 모든 몸이 고슴도치였다.


그는 나에게 고맙다 혹은 수고했다는 류의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나를 다독이기는커녕 방관자라며 힐난했고, 나는 그럼 너 혼자 다니라며 나한테 너무 한 것 아니냐며, 우격다짐을 부렸다. 혼자 가도 될 일에 굳이 내가 함께 가야 한다고 우기는 것이 못마땅했다. 지금에서야 아마 그 역시 두려웠을 것이라고 이해하지만 그때는 야속하기만 했다. 나는 혼자 나가지도 못 할 거면서 왜 덜컥 유학을 결정했냐며 빈정거리기 일쑤였다. 퇴사를 완벽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나는 삐뚤어질대로 삐뚤어져 있었다.


애초에 학교 개강일인 10월까지 네 달의 시간이 있었고 천천히 준비를 하기 위해서 6월에 왔다. 하지만 그는 이런 계획 따윈 깡그리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다. 유학이라는 목표 의식이 확실했던 남편은 자신이 만든 스케줄을 스스로 감내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해야 했던 나는 숨고를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 만나는 공기, 햇살, 사람, 환경에 적응을 할 시간이 있었어야 했다.



맥도날드에 아로새긴 트라우마

결정적으로 맥도날드에서 사건이 터졌다. 이미 그때 나는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집을 구하는 게 힘들었고, 생각보다 라이프치히는 영어가 잘 통하지 않아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다. 그날도 겨우 어떤 집을 보러 가기로 약속한 뒤 저녁을 먹고자 맥도날드에 들렀다. 남편이 실수로 햄버거를 잘못 주문하면서 10유로도 안 나올 맥도날드에서 20유로가 넘게 나왔다.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 너는 주문도 제대로 못할 독일어 실력으로 왜 독일에 와서 나를 고생 시키냐며 폭풍 눈물을 쏟아냈다.



감정이 폭발하는 건 한순간이다


지금까지 참아온 모든 상황들이 쌓이고 쌓여서 햄버거에 터져버렸다. 20유로가 아까운 게 아니었다. 햄버거 하나 제대로 주문하지 못하는 상황, 집을 보러 가기 전 또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곳에서 남편 너마저 내 편이 아닌 것 같다는 배신감, 아득하기만 한국과의 거리감, 자신의 꿈을 빌미로 나를 볼모로 데려온 그, 나아가 이런 남자를 선택한 나에게까지 화가 났다.

갑작스러운 눈물에 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남편도 알고 있었다. 터질게 터진 것이란 것을. 무조건 미안하다고 했다. 자기가 너무 성마르게 행동했다고. 빨리 심적 안정을 찾고 싶어서 내 마음의 속도를 배려하지 못했다며 사과했다.

결국 눈물 콧물 범벅이 된 햄버거를 먹고 맥도날드의 트라우마를 껴안은 채 또 집을 보러 갔지만 그 집 역시 계약하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와 그림을 펼쳐 봤다.

사람마다 심적 안정을 취하는 방법은 다를 텐데, 나의 경우 그림을 보는 편이다.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Caspar David Friedrich, 1817


독일화가 카스파르 프리드리히는 산을 오르는 여행자들의 뒷모습을 주로 그렸다.

‘등산’이란 건 인생의 여정을 나타내는 은유이기도 하다. 산을 오르는 길은 녹록지 않다. 안개로 가득하다. 정상에 올라갔는데도 마찬가지로 안개가 자욱하다. 그런데 안개 저 너머에서 희끗희끗 무언가가 보일 것만 같다.

눈물바다를 쏟아낸 이날의 내 눈엔 안개를 덮어버린 자신만만한 자세가 돋보였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는 꼿꼿함, 그에겐 삶의 기지가 올곧게 세워져 있었다.


방랑자와 달리 독일에서 내 어깨는 쪼그라들어 있었다.


생경한 언어들이 폭탄 터지듯 귓전을 맴돌았고, 나보다 큰 사람들이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여기에 습습한 날씨와 느려터진 행정 서비스까지. 나는 후텁지근한 안개의 공포 속에 갇혀 있었다. 그런데 저 남자는..


 이 안개는 희뿌연 연기가 아닌
불안을 말끔하게 표백하는
표백제라고 말했다.



그때 우리의 상황은 불투명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분명하지 않다는 것은 곧 답답함을 일컫는다.

앞날을 예견할 수 없는 인생은 막막하지만, 반대로 예정되어 있는 인생이라면 우리는 과연 그 안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

위대한 자연을 똑바로 바라보는 저 방랑자 지표삼아 핸들을 꼭 지고 나아가보기로 했다.


언젠가 안개는 사라질 테고
     하늘은 태양을 만나 맑게 개일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내 언어의 나이는 다섯 살 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