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여행에 성수기가 있는 이유

눈부신 고립과 두려움 사이

by 여행생활자KAI

여행엔 성수기/비수기가 있다. 내 여행의 궤도는 늘 비수기였다. 사람 많은 성수기보다는 일부러 비수기를 골라 여행을 가곤 했다. 시끄럽기보다는 한산한 편이 좋았고 비용적인 측면에서도 비수기가 효율적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나는 왜 성수기가 있는지, 왜 여행의 적기가 있는지를 알게 됐다.


우리가 갔던 여름은 동남아 여행 비수기였다. 우기였기 때문인데, 평소에도 비가 오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기에, ‘우기라고 해봐야 얼마나 비가 오겠어’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있었던 것 같다.


“우르르 쾅쾅~!”


하지만 이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요란한 효과음과 함께 미친 듯이 비가 쏟아졌다. ‘하늘에 구멍이 났다’라는 표현은 바로 이런 상항을 두고 나온 말이었다. 이토록 많은 비를 본 것은 내 생애 처음이었다. 행여나 호텔이 물에 잠기는 건 아닐까.. 하는 기분 나쁜 예감이 스쳐 지나갔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아침, 호텔 직원이 찾아왔다. 우리가 묵고 있었던 곳은 3층이었는데 이미 아래층 투숙객들은 다른 호텔로 옮겨갔으며, 우리 역시 다른 호텔로 이동해야 한다고 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나가보니 바깥은 재해 현장 수준이었다. 호텔 1층 전체가 물에 잠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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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만 해도 나와 미나는 웃었다. 그동안 너무나 할 일이 없어서 지극히 평온하다면 평온한 시간이 이어졌기에, 이 하나의 에피소드는 우리에겐 두고두고 회자될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 웃음도 잠시였다. 동남아의 비는 스콜성이어서 아무리 많이 와도 낮엔 그치기 마련이라고 했으나, 3일 연속 비가 쉬지않고 내렸다. 현지 사람들도 이렇게 엄청난 비는 처음이란다. 옴짝달싹 못하고 호텔에만 갇혀있어야 했고, 심지어 몸이 안 좋았던 미나의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다. 음식이 입에 안 맞는 건지 계속 설사와 고열에 시달렸다. 그녀는 아픔을 호소하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나는 하늘이 무작위로 비를 퍼붓는 이 고립된 상황 속에서 잠 못 이루며 끊임없이 인터넷 검색을 해댔다. 미나의 아픈 상황과 라오스의 우기에 대해.. 검색을 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잠은 안 오고 밖에 나갈 수도 없는 이 상황에서 책마저 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할 일이 검색 밖에 없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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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편을 바꿔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까, 아니 한국에 갈 수나 있을까, 미나가 더 악화되면 라오스 응급실을 가야 하나, 라오스 의료 환경은 좋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인간은 고립된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는데 그것은 온통 비극적인 것뿐이었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영화화한 <샤이닝>이 떠올랐다. 폭설로 고립된 호텔에서 서서히 미쳐가는 소설가 잭의 모습을 다룬 영화인데, 핏물이 홍수처럼 쏟아지던 엘리베이터 씬만 파노라마처럼 연속적으로 머릿속을 지나갔다. 쏟아지는 비만큼이나 공포감 역시 물밀듯이 쏟아졌다. 이날 밤은 내가 살면서 처음 맞닥뜨린 ‘고립 중의 고립’의 시간이었다.

혼자 무서운 상상에 몸서리치면서도 현실에서 안도할 수 있었던 것은 미나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혼자 라오스에 와서 이런 상황에 직했다면 나는 얼마나 두려움에 번민했을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한계령을 위한 연가/문정희


재난을 로맨스로 치환시킨 시인과 달리 지금 내 상황은 눈부신 고립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시를 떠올린 것은 인간으로서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극한에 처했을 때, 그 상황을 눈부신 고립으로 볼 것인지, 두려움으로 볼 것인지는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메시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여기, 미나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린 꽤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그 시간들을 공유한 대상이 지금 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겨우 안심하며 잠을 청했다.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이길 바라는 운명적 사랑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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