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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생활자KAI Oct 04. 2019

여보, 나 공황장애인 것 같아

해외생활의 슬럼프 

 

“미안한데.. 나..
공황장애인 것 같아” 


어느 날 저녁 뜬금없는 남편의 고백에 나는 당황했다. 

첫 번째는 워낙 각종 매체에 자주 등장하다 보니 익숙할 대로 익숙한 ‘공황장애’지만 가까운 주변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낯선 단어였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자신의 심리상태를 고백하기에 앞서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한 그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는 왜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했을까?

오롯이 자신의 의지로, 자신을 위해 독일행을 결정한 그였다.  언젠가부터 남편에게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인생사는 이기적인 남자라는 프레임이 씌어져 있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힘들다고 말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고, 절대적으로 행복해야 했다.

남편 역시 내가 본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처한 심리적 상태를 말한다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며 내가 뻔뻔하게 여길 수도 있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나란 인간은 왜 이토록 못났을까. 

그 말을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났다. 


“뭐? 인생 자기 멋대로 살고 싶은 대로 살더니, 이제 와서 공황장애라고?! 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너란 남자랑 사는 거 진짜 힘들다.”


앗뿔싸... 마치 기다렸다는 듯 줄줄이 폭언을 쏟아붓고 바로 후회했다. 이 문제는 부부가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 봐도.. 인간적으로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는 판단이 빛의 속도로 뇌리에 박혔다. 벼랑 끝에서 죽고 싶다는 사람을 밀어버린 꼴이었다. 나는 빠르게 사과했다. 



“미안, 내 생각이 짧았어. 순간 나도 모르게 욱했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앞에 말은 취소. (우리 부부에게는 순간 잘못된 말을 했을 때 “취소할게”라는 정정이 인정된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남편은 며칠 전 인터넷에서 공황장애 자가진단을 해보았다. 검색창에 공황장애라는 단어를 입력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공황장애의 초기 단계일 수 있다. 자신의 마음 건강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가 가장 먼저 감지했을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이 사회에 아무 필요도 없는 하찮은 존재 같아서 나약해진다고도 했다. 이 증상이 두 달 가까이 지속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독일에서 그의 생활 패턴은 3년째 같았다. 도서관과 집을 오가고 몇 달에 한 번 지도 교수님을 만났다. 그 외에 가끔 지인들과 시간을 가지긴 했지만 딱히 귀속된 모임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어떤 대외적인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남편의 목표는 오로지 빨리 논문을 마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달랐다. 방송기자였던 그는 매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사회의 부조리를 보도했으며 자신의 일을 통해 스스로의 성취욕을 맛보았던 사람이었다. 

뒤에서는 기레기라고 욕할지언정 앞에서는 기사 좀 잘 써달라고 부탁받던 입장이었지만, 독일에서는 누군가에게 청하는 입장이 되어야 했다. 교수님을 비롯해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를 봐야 하는 이방인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경험상 한국에서 대외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사람들이 타국에서 성취욕을 느끼지 못할 때 느끼는 무력감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큰 것 같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외국이었고, 이 나라의 구성원이라고 할 수도 없었으며, 진정한 마음을 나눌 친구라고는 배우자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이 나라에 온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것, 숨이 막힐 만도 했다. 처음엔 자신의 목표를 향해 전력 질주했지만 단기간에 결과가 나오지 않는 진부한 자신과의 싸움 중 슬럼프가 오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일 수도 있다. 


해외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슬럼프가 온다.
 이따금 한 번씩 오는 감기 같은 것일 뿐이다.

목표를 위해 안주하지 않고 달려온 나에게 쉼이 필요하다는 내 몸의 신호일뿐 이라며 그를 위로했다. 

늘 밝았던 남편의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니 안쓰러웠고, 나에게 이 말을 꺼내기까지 마음 졸였을 두 달의 시간들을 짐작해보니 찹찹했다. 그의 말을 들어주고 잘하고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나 역시 무력했다.  




며칠이 지났을까. 

한 통의 전화를 받은 뒤 그의 표정은 완전히 달라져있었다. 

남편 후배의 전화였는데, 그가 독일에 오기 전 했던 고민을 똑같이 하고 있었다. 

회사는 변할 것 같지 않았고 선배들을 보면 내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것이 맞으며, 머무는 것이 답은 아니란 판단은 진즉 섰지만 가정이 있기에 선뜻 판단을 내리지도 못하겠다는 것이 고민상담의 주된 내용이었다. 


남편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경험담 및 실질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공황장애란 것이 언제 왔었던 건지도 모르게 기운이 회복되어 있었다. 


후배의 고민상담은 안정된 직장을 과감히 버리고 왔지만 “계속 다녔으면 어땠을까”에 대한 그의 미련을 일축해 주는 것이었다. 계속 회사를 다녔어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만족하지 못했을 것임을 간접적으로 확인시켜 준 셈이다. 또한 그는 후배를 통해 자신의 선택이 그르지 않았음을 다시 한번 확신했을 것이다. 나만 향후의 진로를 고민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여전히 변하지 않는 언론의 카르텔에 진절머리를 내는 언론인들이 있다는 것. 지금도 누군가는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으며 또 어떤 누군가는 나의 행보를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에 작은 위무를 받은 모양이다. 


묘한 시기에 걸려온 후배의 전화가 뜻밖의 전화위복을 가져왔다. 인생사 모르는 것이라고 하더니.. 죽을상을 하고 다니던 그의 얼굴이 다리미로 핀 것 마냥 쫙 펴졌다. 


남편은 오늘도 빳빳한 셔츠에 아래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발걸음 가볍게 도서관으로 향한다. 언젠가 또 그의 발걸음을 뒷걸음치게 할 슬럼프가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때는 후배의 전화 같은 한줄기 빛이 내려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미 한 번의 위기를 극복했고, 스스로 나아가고 있다는 변함없다는 사실이 그의 흔들림을 잡아 주리라 믿어본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길을 찾는 까닭입니다. “


 라고 했던 윤동주 시인의 시구처럼 우리가 외로운 독일에서의 이 길을 걸어가는 이유는 담 저쪽에 분명 내가 이상으로 삼는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설령 풀 한 포기 없을지라도 둘이 함께 간다면 그 길이 외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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