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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생활자KAI Sep 29. 2019

독일 은행은 느림을 담보로 한다

느림보 거북이로 살 것인가? 토끼로 살 것인가?

한국에 살 때의 일이었다.

프랑스 친구 오랭리앙(그는 서울에 있는 프랑스 국제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을 우리 집에 초대한 날이었는데 그날 그는 매우 기분이 좋아보였다.

이유인즉슨 은행에서 카드를 만들었는데 당일에 바로 카드를 발급해주고 선물로 비닐랩까지 받았다며 이런 놀라운 서비스를 처음 경험해봤다고 했다.

그때는 뭐 이런 걸로 저렇게 감동을 하나 싶었다. 한국은 서비스가 빠르고 편리하다며 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나는 독일에 와서 유럽의 느림의 미학(?)을 제대로 경험하고 나서야 그때 왜 오랭리앙이 그토록 고무되어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독일 은행의 선제 조건 "기다림"


독일의 은행 업무로 말하자면.. 아니 은행뿐만 아니라 모든 서비스들이 한 번 언급한 바 있듯 전제조건은 '기다림'이다.


은행에 가서 번호표를 뽑고 내 차례를 기다리면 되는 한국과 달리.. 신규 통장 개설의 경우 당일 예약은 정말 운이 좋아야 가능한 일이고, 정석은 사전에 은행에 가서 예약을 잡거나 전화 혹은 이메일을 통해 상담 약속을 잡아야 한다. (물론 통장이 있다면 입출금 등의 간단 업무는 당일에 가능하다.)


약속, 일정은 독일어로 Termin인데.. 이제는 테어민이라는 말만 들어도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로 독일의 모든 서비스는 약속이 선결되어야 한다.


은행 업무 시 독일어를 잘하면 좋겠지만 만약 독일어가 되지 않는다면 사전에 영어로 상담을 하고 싶다고 말하면 영어 가능한 직원을 배정해 준다.


그러면 직원의 개별 사무실로 안내를 받고 커피 같은 음료도 제공해 준다. 창구가 아닌 개별 룸에서 받는 서비스는 마치 내가 VIP가 된 듯한 착각에 들게 하는데 역시나 이유가 있었다. 이 순간부터 나는 매달 계좌유지비를 내야하는 호갱님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과 달리 독일 은행들은 계좌유지비를 받는다;  고객 한 명이라도 더 유치하기 위해 각종 우대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국의 풍속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단 돈 몇천원이라도 이자를 주는 한국과 달리, 이자란 무엇이냐며 우리가 너희 돈을 예치해주는 것이니 유지 비용을 내라는 것이다.

이해가 갈 듯 안 갈듯한 논리인데 어쨌든 여긴 독일이고 우리는 이 시스템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외국인이다.

(물론 이 경우는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가입하게된 도이치방크에 해당되는 사안이고 코메르츠방크, N26등은 계좌 유지비를 받지 않는다. 참고사항)


한국 같았으면 상품에 대한 설명이 끝난 후 사인을 하고 비밀번호를 설정하면 바로 통장과 카드가 모두 발급됐어야 했다. 하지만 이날 나는 카드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카드는 우편으로, 심지어 비밀번호도 우편으로 알려준다고요?


카드와 핀번호는 우편으로 날라온다.

그것도 보통 1~3주가 지난 후에. 물론 그전에 인터넷 뱅킹은 사용 가능하다.( 아주 만약에 독일 우체국이 파업에 들어간다면 이 나라의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갈지 사뭇 궁금해진다. 독일에서 우편은 아주아주 중요하다. 뭐든지 바로 주는 법이 없다. 모든 서류들은 우편으로 온다. 중간에 우편물 분실이 된다면 아주 골치 아픈 일이 발생할 것이다.)


다만 은행에서 고객에게 주는 게 하나 있다. 카드도 통장도 한국처럼 비닐랩과 같은 사은품도 아니다. 다름 아닌 바로 이 거대한 파일철!!





아니 대체 이게 뭔가 싶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독일에서는 통장정리를 주기적으로 해야 한다. 통장정리 서류를 이 파일철에 보관하라는 의미이다.


"나는 필요 없는데?" 하면서 이걸 그냥 방치해두면..


은행에서 통장정리 내역서를 출력해 집으로 보내는데. 얄밉게도(?) 내 통장에서 우편요금을 출금해 간다. 헛돈 안 내려면 주기적으로 통장 정리를 해 주는 게 좋다.


독일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독일 친구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는데 한쪽 벽면이 파일로 가득했다. 그땐 은행의 이 시스템을 몰랐을 때여서 아니 대체 이게 뭐냐고 했더니.. 은행을 비롯한 각종 관공서 서류라고 했다. 독일 사람들은 모든 서류들을 꼬박꼬박 문서화해서 분류해놓는다. 여기서 또 한 번 탄식이 나온다.


아... 독일...

그들의 인생이 거대한 서류에 둘러싸여 있는 것만 같았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통장정리의 장점도 있다. 매우 귀찮은 일이지만 통장정리를 통해 입출금 내역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인터넷뱅킹을 통해 내역을 볼 수 있고 이게 무슨 종이 낭비인가 싶긴 하지만... 직접 서류화된 내용을 보고 다시 한 번 가계경제를 꼼꼼히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통장 정리를 주기적으로 하고 여전히 카드보다 현금 결제를 선호하는 것은 독일인의 절약정신과 연결되는 키워드이다. 확실히 현금이 카드보다 나의 씀씀이를 각성시켜주는 효과에 있어서는 탁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매우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이미 북유럽은 모든 것이 카드화되어 있어서 환전도 필요없다. 한국 역시 핸드폰만 있으면 카카오페이, 네이버 페이.. 편리하게 결제가 가능하다.


반면에 독일은 아주 천천히 변화하고 있다. 최근 수수료 없는 인터넷 은행 n26이 인기를 얻고 있고, 삼성페이와 비슷한 가상 결제도 차츰 도입이 되고 있긴 하지만 그 속도는  느리다.

이 나라는 기술 문명의 발전과 삶의 변화 속도가 궤를 같이 하지 않는 느낌이랄까.


사실 IT, 과학 기술 발전에 있어서 독일은 가히 선진국이며  주요 산업 종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날로그 삶의 방식을 선호한다.

은행 및 결제 시스템 뿐만 아니다. 여전히 현관문 열쇠를 고집하고 종이 편지 쓰기를 선호하며(심지어 헬스클럽등록을 취소하고 싶은 경우에도 규격 양식의 편지를 써서 내야한다.), 뜨개질을 좋아하며 취미 생활 1위는 가드닝이다.

아날로그를 선호하는 휴머니즘에 대한 염원, 한 편에 자리한 변화를 싫어하는 독일인 특유의 고집도 궤를 같이 하고 있는 듯 하다. 적어도 이방인인 나의 시선에서는 그렇다.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는 기성세대

변화와 빠름을 갈망하는 젊은세대


이 부류 중 나는 어디쯤 있을까..

삶의 방식에 정답은 없기에 무엇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역시 독일의 느림을 답답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적응해 가며..

빠름을 갈망하는 거북이로
느릿느릿 살아가고 있다.
              

                                 


참고: 도이치방크의 경우 이런 불편한 서비스 때문인지 경영악화로 부도위기에 놓여 있기도 하다.

은행을 개설 한다면, 차라리 한국의 카카오뱅크와 비슷한 개념인 n26, 슈파카세, 코메르츠방크 등이 더 편리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경우 비자 때문에 슈페어콘토를 만들어야 했고, 이를 만들 수 있는 은행이 슈파카세와 도이치방크밖에 없기 때문에 선택이 불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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