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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생활자KAI Oct 19. 2019

독일에서 절도범이 될 뻔했다

독일식 아나바다"Zum Mitnehmen"

필요한 혹은 갖고 싶은 물건이 있을 때 사람마다 행동하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다.

통 크게 별 고민 없이 바로 사버릴 수도 있고, 몇 날 며칠 인터넷 검색을 통해 최저가로 구매할 수도 있다. 혹은 더 큰 할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거나,

100% 할인인 꾹 참아보기도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사용에 문제가 없다면 중고를 알아볼 수도 있다.


반성하건대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중고를 팔아본 적은 있지만 사 본 적은 없다. 이상하게 남이 쓰던 물건은 쓰기 싫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나와 달리 독일 사람들은 중고에 대한 선호도가 매우 높았다.

그들의 일상에 중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는 물건 구비의 한 형태였다. 소비가 아닌 구비라고 지칭한 데에는, Zum Mitnehmen이라는 문화에 기인한다.


 Zum Mitnehmen



독일에서 길거리를 지나가다 보면 집 앞에 물건들이 나와있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Zum Mitnehmen은, IMF 구제금융 당시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의 의미로 시작된 “아나바다” 와 비슷한 개념이다.


안 쓰는 물건을 건물 내 집 앞 혹은 건물 앞에 내놓으면 필요한 사람이 가져간다.

한국에서는 그 당시에 잠시 성행했지만 독일처럼 일상에서 당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Zum Mitnehmen은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는 대안이자 지출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패스트 패션, 패스트푸드 뭐든지 빠른 것이 트렌드인 시대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여전히 느리게 오래, 천천히의 미학을 선호했다. 나아가 불필요한 낭비를 줄인다는 것은 가정 경제에도 도움이 되지만 결국 환경 보호로 이어지기 때문에 선순환의 올바른 예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문화는 옥스팜이라는 가게에서도 알 수 있는데 마찬가지로 한국의 아름다운 가게와 비슷하게 운영된다. 사람들의 기부로 이루어지는 이 가게는 중고 물품을 아주 저렴하게 판매할 뿐만 아니라(가끔은 빌레로이 앤 보흐 커피잔이 1유로에 나오기도 한다.) 수익금은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 쓰인다. 이 가게에 대한 사람들의 이용률 역시 매우 높은 편이다.

oxfam


중고에 별 관심이 없던 나도 살다 보니 안 쓰는 물건을 내다 놓은 적도 있고.. 누군가가 내놓은 물건을 가져온 적도 있다. 필기구에서부터 장난감, 책, CD, 주방용품, 옷까지 품목에 제한은 없다. 가끔은 득템 하는 기회도 있어서 언젠가부터는 길거리를 걸어갈 때 바닥만 쳐다보고 걸어가는 나를 발견하게 될 정도였다.

옥스팜에서 구입한 빌레로이앤보흐 빈티지.총 18유로.

아울러 버리고 사고를 습관화했던 소비지향적인 나를 반성하게 했던.. 근검절약하는 독일인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던 한 챕터이자,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를 만든 계기가 되기도 했다. 우리 부부는 본의 아니게 이에 동참했다가 절도범이 될 뻔했기 때문이다.


사연인즉슨..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깻잎을 심기로 했다.(독일 슈퍼에는 깻잎을 안 판다. 많은 한국인들이 그리워하는 채소가 깻잎이다.) 깻잎을 심으려면 화분이 있어야 하는데.. 몇 달 전부터 건물 창틀에 정체 모를 큰 화분이 놓여있었다. 당연히 가져가도 되는 것인 줄 알았고, 당당히 화분을 들고 우리 집 근처에 있는 가장 큰 공원으로 갔다.


 화분에 있던 정체 모를 식물을 뿌리 뽑고.. 흙을 좀 골라내고.. 깻잎 씨앗을 심었다. 올해는 무럭무럭 잘 자라나길 바라는 두근두근 설렘과 함께 곱게 곱게 흙을 덮고 분무기로 물도 착착 뿌려줬다.


하지만.. 다음날.. 화분이 있던 창가 자리에 쪽지 한 장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것은 불길의 징조였다.

우리의 심장은 굳었다.

.

.

.

누군가가 자신들의 딸기를 가져갔으니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아뿔싸!

정체 모를 식물은 딸기였고 아마도 집에 베란다가 없어서 복도 창틀에 딸기 모종을 갖다 놓았나 보다. 나와 남편은 안절부절못하며 고민하다 두 가지 대응 방법을 도출했다.  


1. 증거인멸

우리 건물에 CCTV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묵인한다.

그리고 증거인멸을 위해 밤에 몰래 화분을 버리고 오자.


2. 자수하고 광명 찾자.

올바른 해결 방법은 자수다. 주인에게 솔직히 말하고 사과하자.


그런데 여러 걱정들이 생겼다.

첫째는 딸기의 생사 여부였다. 내가 주인이라면 딸기 자체보다 그것을 심고 기다렸을 시간 때문에 화가 날 것 같았다.

둘째, 우리가 사과를 했을 때 주인의 반응을 예측할 수 없었다.

셋째, 마지막으로 행여나 우리 때문에 한국인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을 갖게 될까 봐 걱정이 앞섰다.

굳이 변을 하자면.. 대체 왜 가져가지 말라는 안내 문구를 써놓지 않은 것인지 주인의 행동에도 약간 짜증이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쨌든 딸기 도둑이 된 상황이고..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그 순간 우리는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서 시험지 유출을 고백할지 말지 고민하는 예서와 예서 엄마가 되었다.


이도 저도 못하는 사이 시간은 계속 흘렀고, 지나간 시간의 무게만큼 우리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증거인멸을 한다한들 콩알 반쪽만 한 간을 가진 우리는 두 다리 뻗고 못 잘 것 같아서 다시 공원으로 갔다.

힘껏 뽑아버린 딸기 모종을 찾아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아니고.. 이게 무슨 난리인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범인은 반드시 범행 현장을 다시 찾게 되어 있다는 범죄의 법칙이었다.

딸기의 생존 여부를 걱정하며 갔는데 신은 우리를 저버리지는 않아서, 다행히도 모종이 버려진 채로 있었다. 다시 딸기를 심고.. 있던 자리에 모셔둔 뒤, 주인한테 전화를 했다. 그는 지금은 집에 없으니 저녁 8시에 만나자고 했다. 당시 시간은 오후 6시였는데, 8시까지의 2시간 동안 우리는 얼마나 번뇌했는지 모른다. 동동거리며 마음 졸였던 그 시간 동안 사과를 위해 다른 화분도 하나 사고, 와인도 준비하고.. 혹시 변상하라고 할까 봐 돈까지 챙겨서 주인을 만났다. (결국 화분 하나 산 것보다 더 많은 돈이 지출된 셈이다.)


주인을 보자마자 냅다.. 대역 죄인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구구절절 구차 구차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일부러 가져간 게 아니라.. 순전히 Zum Mitnehmen인 줄 알았다고.. 혹시 딸기에 문제가 생기면 연락 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다행히 딸기 주인은 젊은 부부였는데.. 괜찮다고 착각할 수 있었겠다며.. 너네 물까지 줬더라? 하면서 우리의 사과를 받아 주었다. 2년이나 같은 층에 살았는데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던 친절한 이웃을 알게 된 건 불행 중 다행이랄까. 그들은 다음번 이웃 모임에 우리를 초대까지 해 주었으니 이것은 정직이 준 선물이 아닐까 싶다.


그날 이후 우리는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딸기의 생사 여부를 확인했다. 행여나 한 번 뿌리 뽑힌 딸기가 죽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잘 크고 있었다.

며칠 후 딸기 꽃이 핀 것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었다.

Zum Mitnehmen 덕분에 절약 정신을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은 죄짓고는 못 산다는 진리까지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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