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실레 그림의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가?
끊어질 듯 이어지는 선들의 탁월함 때문인가, 예술가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고민했던 작가의 숭고함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단순히 그것을 대중이 아름답다고 감상하기 때문인가?
같은 맥락에서 영화 <브루탈리스트>는 2막 제목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을 통해 그 기저를 대놓고 묻는다. 라즐로(애드리언 브로디)의 역작이라 할 수 있는 예배당 건축물에 깃든 달빛에서 우리가 황홀함을 느끼는 까닭은 무엇인가. 건축물 그 자체의 위대함? 내리쬐는 달빛의 처연함? 브루탈리즘이라는 건축 사조의 위대함? 과거의 핍박들을 견뎌낸 한 유대인의 장대한 서사?
더 초월해서, 예컨대 길가의 꽃 한 송이가 아름답다면 그건 그 꽃이 지닌 본연의 아름다움 때문인가,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나의 인식 때문인가.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은 어디에 있을까.
얼마 전에 예술의 감상에 대해 논술할 일이 있었고 나는 '예술은 감상에 딱 알맞은 정도의 개인적인 의미로 각자에게 와닿는다'라고 썼다. 감각적 유에서 논리적 유를 창조해 내는 해석의 깊이, 예술의 감상은 전적으로 각자가 생산해 내는 그 인식의 퀄리티에 따라 평가가 좌우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모네의 수련을 직접 보고 '빛을 잘 포착했다'는 일차원적 자극으로 넘기는 사람이 있다면, 감상하는 자신과 동일한 위치에 서서 수십 년 전에 붓질을 하고 있었을 모네의 심연을 가늠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예술은 감상자의 감상에 딱 알맞은 정도의 의미로 각자에게 닿을 뿐이다,라고 생각했다.
영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오만하기 짝이 없는 문장이다. 피카소 그림이 나에게 난해하다고 해서 그 예술적 가치가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팔짱 끼고 감상하는 나 같은 대중의 편을 너무 높이 쳐준 것 같다. 작품 자체에 깃든 기술적 탁월함과, 그 작품에 스며든 창작자의 서사를 잘 알지 못한 채 결과로의 예술만을 소비하던 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브루탈리스트>를 비롯해 오늘 다녀온 전시회를 곱씹다 보니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예술은 서사적 존재인 인간이 만들어낸 결과이기에, 의도와 무관하게 개인 또는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든 투영되어 있다. 말하자면 예술품은 창작자가 견뎌온 시간들의 과정이자 결과다. 그리고 그것을 감상하는 소비자의 시간 또한 흘러 왔을 것이기에, 예술은 대중이 그것을 소비하는 시점에 이르면 창작자와 소비자의 서사가 얽혀 각자에게 새로운 사유와 의미를 양산한다. 어쩌면 아름다움의 본질은 그 얽힘에 있다. 훌륭한 작품은 특유의 독특한 인력으로 불특정 다수를 잡아당겨, 감상자 고유의 파장과 공명함으로써 비로소 아름다움을 획득한다.
얼마 전에 같이 한예종 졸업영화제 갔던 친구가 한 작품을 보고 나서 문득 할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티 안 냈지만 울컥했다. 탁월한 예술은 특별한 얽힘으로 심오한 감상자에 가닿아 세상을 더 따뜻하게 한다.
개연적이면서도 뚜렷한 개성을 잃지 않고, 동시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닿을 수 있는 꼿꼿한 이야기를 쓰기는 정말 어려운 것 같다. 개연성과 개성, 대중성 이 세 가지는 마치 리버풀 수비진 같아서 하나가 튼튼하면 하나가 다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나의 가장 개인적인 내면을 파고들어 발견한 진실과 감정이 다른 누군가의 심연의 모서리에 정확히 가닿을 수 있다고 믿는다.
개연적이지 않다는, 재미가 없다는 소리를 지금은 듣지만 언젠가 나의 이야기도 사람들에게 새로운 얽힘을 양산할 수 있겠지, 그렇게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에 다가갈 수 있겠지. 지나치게 순진무구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가진 게 없다면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내리라는 믿음이라도 있어야 한다. 적어도 3월을 시작하는 지금의 나에게 그런 근자감은 있다. 그런 이상을 품는 건, 인프피인 나로서는 어쩔수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