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tzMe Dec 18. 2020

내 사랑

무비에게 인생을 묻다. 8

무비님, 영화 속에 정말 수없이 많은 인생이 녹아들어 있다는 것을, 요즘 이 시간 통해 깨닫고 있습니다.

예술 작품마다 인생들이 다 녹아들어 있겠지만, 책이나 영화에서는 내가 바로 대입할 수 있는 인물이 직접 등장을 해주니까, 그들 삶에 공감도 하고 간접 경험도 해 보면서, 또 하나의 인생을, 내 인생보다는 편하게 흡수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오늘은, 내 삶이 텅 빈 것 같고, 세상에서 나만 고립됐다고 느끼는 분들께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작품이에요.



의외로 그런 분 많을 텐데요? 왜냐하면 세상에 혼자 남은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이유가 생각보다 다양하거든요. 가령 실제로 가족을 한꺼번에 다 잃어서 물리적으로 혼자 남겨진 분들도 계실 테지만, 뜻하지 않게 베스트 프렌드와 싸워 연락을 끊은 상태라든지, 헤어진 연인들이라든지, 상황이나 멘탈 기준에 따라 외로움, 고립감 느끼시는 정도가 다를 테니, 딱히 먼 곳 이야기는 아닌 듯해요.  
그렇죠. 사람이 그럴 때 원하게 되는 게 있잖아요. 누군가 다가와서 나의 마음을 알아주면 좋겠다. 혹은 내 마음속 이야기를 후련하게 털어낼 수 있는 대상이 있었으면 좋겠다.    

 
 
음. 내가 가만히 있어도 내 마음을 알고 나를 채워주든, 아니면 내가 마음속 이야기를 다 비울 때까지 쏟아내도 가만히 들어주든. 채워주든 비우게 해 주든 어쨌든 상대가 필요한 것이네요.  
네.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거죠.


 

무언가 심오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습니다. 아까 고립된 분들이 보면 좋은 영화라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고립된 분들이 보면 좋을까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고립되었다는 것에 글쎄요. 구체적인 정답은 없겠죠. 그저 오늘 드리고 싶은 이야기 속에서 쓸쓸함이나 고립감에 대해 정의해 보면 이런 겁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해줄 수 있는 것들이 줄어들 때 오는 느낌.


사회에서든지, 평범한 인간관계에서든지.

내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위치가 아닐 때, 나의 영향력 혹은 내 역할이 없어질 때.

스스로가 못나게 느껴지고, 짐이 되는 듯 여겨지고, 그래서 무거운 짐이 되기 싫어서 사람들에게 다가서지 않게 되고. 그러다 보니 점점 더 고립되고 외로워지곤 하는 그런 느낌 말이에요.   

 


해줄 수 있는 게 줄어든다. 서글픈 말이네요. 사람들에게 필요 없는 존재가 되는 듯 느껴지고, 스스로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니, 많이 우울해지죠. 괜스레 작아지고 움츠러들고.  

네. 서두가 길었으나 혹시 그런 분들 계시다면 오늘 작품 한 번 보세요.   

캐나다 영화이고 제목이 간결합니다. <내 사랑>

상영관을 많이 잡지 못하여서 크게 홍보가 되진 못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7월에 개봉하여 무려 이듬해 3월까지 상영을 이어나갔으니, 이 정도면 관객 사랑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짐작되시겠죠?
 

영화 <내 사랑> 포스터



7월부터 이듬해 3월. 와우, 정말 오랫동안 상영했네요. 일단 제목만 들어서는 상당히 평범한 러브스토리로 여겨지는데 말이죠.

먼저 이 작품이 실화라는 사실을 알려드릴게요. 화가 '모드 루이스'라는 이름을 기억하시는 분 많으시겠죠? 혹시 모르시더라도 '모드 루이스'의 그림을 보시면, '어! 이 그림 알아!'라고 모두 말씀하실 거예요. 지금처럼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크리스마스 카드에서 모드 루이스의 그림을 많이 볼 수 있기도 했죠. 요즘은 거리나 매장에서, 아니면 인터넷에서라도 크리스마스 카드라는 것을 구매하나요? 그건 잘 모르겠네요. 아무튼 어릴 때부터 류마티스 관절염을 앓았던 모드 루이스는 몸이 불편합니다. 어머니로부터 크리스마스 카드용 수채화를 배웠는데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하나뿐인 오빠가 유산을 모조리 가로채 모드에게 남은 것은 붓과 물감이 전부였어요.   

 
 
서럽다는 생각이 드네요. 몸도 불편하고, 부모님도 잃은 데다, 하나밖에 없는 오빠가 옹졸하게 재산을 독점해 버렸으니까 참 막막했겠네요. 친척은 없었나요.
있었지만 제대로 집안일을 도와줄 신체 조건도 아니고 하니, 달가워하는 친척도 없었죠. 제목은 참 아름답게도 <내 사랑>이라고 되어있지만, 실제 이 영화에서는 가난, 상처, 장애, 트라우마, 노화 같은 것들에 시선을 두고 있어요. 그런 주제들을 다루면 대체로 작품이 무거워지잖아요? 그런데 이상하죠. 이 영화는 마치 햇빛 쬐는 것처럼 행복하고 화창한 느낌이 들어요.

 


다루는 것들이 무거운데, 행복하다. 이유가 분명히 있겠죠?  

훌륭한 영화라면 장르를 따지지 않는 에단 호크가 등장해서, 트라우마로 가득 찬,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무뚝뚝한 남자 에버렛 역을 맡았죠. 모드 루이스 역으로는 샐리 호킨스가 등장하여 여주인공을 맡는데요, 시작부터 끝까지 두 배우가 단 한 번도 잘 생기거나 예쁘게 나오지 않아요.  

그만큼 실제 인물을 리얼하게 담으려는 데 무게를 실었기 때문에 더욱 공감이 갔어요.   

주제도 무겁고 배우마저 멋지게 나오지 않았는데, 영화가 아름다웠던 이유요. 바로 그 이유는, 앞서 제게 말씀해주신 데에 이미 그 답이 있었어요. 나를 채워주거나, 비워낼 상대가 필요한 거겠네요,라고 하셨잖아요.

채워짐과 비워냄, 그 조화로 인해서 혹독한 겨울에 난로 같은 감동을 주는 영화거든요.



 
난로 같은 감동 저도 느껴보고 싶네요. 모드 루이스 화가의 실화라고 하시니, 영상의 색감은 이루 말할 필요가 없겠네요?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삭막하고 빛도 들지 않는 집에 환한 동화 같은 빛이 찾아오는 느낌이랄까요.

가난한 외톨이 모드는 이제 다 필요 없어요. 붓 하나 달랑 들고서 그저 그림만 그릴 수 있다면, 살겠어,라고 생각하죠. 어느 날 가정부 구인공고를 발견하곤 거의 산 하나를 넘어야 갈 수 있는 거리를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걷죠. 도착한 곳에는 세상과 단절한 남자, 투박한 에버렛이 혼자 살고 있었죠.

세상에 다가서고 싶어도 세상이 등을 돌려 고립된 모드와 누구와도 가까워지고 싶지 않아 스스로 고립을 자처한 남자 에버렛의 만남이 그렇게 시작돼요.
 

영화 <내 사랑> 에버렛 역할의 에단 호크


 
어릴 때부터 관절염이면 성인이 되어 몸이 더욱 불편해진 상태일 텐데, 세상과 담을 쌓고 무뚝뚝하다는 에버렛이 불편한 신체의 모드를 가정부로 잘 받아주었을까요?  
그렇지 않죠. 에버렛도 부유해서 가정부를 구한 건 아니었고, 사는 데 바쁘니까, 밥 하고 청소할, 즉 진짜로 일을 잘해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예요. 성격이 모가 나서 도망간 가정부도 몇 명이나 되는 상태였죠. 몸이 불편한 모드가 오자 굉장히 못마땅한 표정이에요. 그런데 그때 모드는 알아챕니다.

누구보다 혼자만의 시간이 길었기에 외로움을 잘 알았던 모드는 첫눈에 에버렛이 외로운 사람임을 알아봐요. 어떤 날은 손찌검까지 하며 자신을 쫓아내는 에버렛으로부터 떠나기도 하지만 곧 모드는 돌아가서 에버렛에게 이런 명언을 남기죠.


당신은 내가 필요해요.


영화 끝까지 삶에 반전이 일어나거나 극적으로 두 사람의 사랑이 싹튼다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아주 담백하게 서서히 비워냄과 채워짐이 시작되죠.

여전히 가난한 두 사람이지만 삭막했던 에버렛 집에 따뜻한 그림으로 컬러를 채워주는 모드, 그녀는 그토록 바라던 비워냄을 시작하게 된 거죠. 종이 살 돈이 없어 굴러다니는 나무판자에 그림을 그리는 그녀에게, 가난하니까 그저 판자가 보일 때마다 주워다 주는 에버렛. 그는 세상과 등지고 고립되었던 자신의 삶에 비집고 들어와 그녀로 인해 그제야 안정된 삶의 호흡이 채워지죠.

영화 <내 사랑> 스틸컷


누군가에게 작은 무언가를 해줄 수 있다.


별 것 아니게 느껴질지 모르는 이 하나의 사실이 사람에게 얼마나 확실한 존재감을 주는지 체감시켜주는 작품입니다.


사람이 주는 상처가 싫었던 에버렛에게
 모드는 다가가 친구가 되어주었고,
외로웠던 모드에게
 에버렛은 집이 되어 주었죠.


영화 <내 사랑> 스틸컷

붓 하나 제대로 쥐지 못하는,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오그라든 손.

몸이 불편했던 화가 '모드 루이스'가 사망하자, 시에서 그 집을 철거하려고 했다죠.

그러나 시민들이 발 벗고 나서서 막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 집에 고스란히 그녀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고 하는데요.

한 사람의 진심이 담긴, 나무판자 그림이, 이제는 세상에 따뜻함을 전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작은 무언가를 해주는 행복

그 행복을 알게 해주는 따뜻한 영화 <내 사랑> 소개였습니다.


화가 모드 루이스
모드 루이스와 에버렛 루이스

author, SuJi 2020

영화서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