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먹이며 사진을 찍는 교실의 현실
보육교사의 하루는 기록이 아니라 ‘증명’이 될 때가 있다
나는 아이들을 보면서도, 동시에 화면을 본다.
누군가에게는 “기록”이고, 누군가에게는 “공유”인 일.
내게는 하루를 증명하는 일이 된다.
사진이 없으면, 오늘이 없었던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찍는다.
아이의 웃음보다 먼저 ‘장면’을 찾는 눈으로.
보육교사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키즈노트를 쓰고 아이들의 사진을 올리는 일이다.
기록은 다정한 말처럼 들리지만, 현장에서는 종종 증명에 가깝다.
오늘 하루가 잘 흘러갔다는 것.
아이가 이 시간에 무엇을 했다는 것.
내가 이 아이를 놓치지 않았다는 것.
남겨야 한다는 말이, 어느 순간부터는 해야 한다는 말로 바뀐다.
하루는 ‘장면’으로 끊기지 않게
아이들의 모든 모습을 담아내야 한다.
활동을 하는 모습도 가능한 한 세부적으로.
스티커 붙이기를 했으면 스티커를 하나하나 붙이는 순간을 찍는다.
특별활동이 있으면 체육시간, 영어시간, 음악시간…
그 시간마다 연거푸 사진을 찍는다.
시작과 과정과 결과가 화면 안에서 끊기지 않게.
하루가 빠짐없이 남게.
그러다 보면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간과
화면을 바라보는 시간이 비슷해질 때가 있다.
나도 모르게 눈이 먼저 ‘장면’을 찾는다.
‘지금이다’ 싶으면 폰을 든다.
찍고, 내려놓고, 다시 아이에게 간다.
내 하루는 계속 그 왕복으로 채워진다.
아이들이 집중할수록, 내 폰은 더 자주 들린다
활동을 진행할 때는 압박이 더 선명해진다.
진행은 진행대로 해야 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봐야 하고,
그 와중에 ‘찍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 한쪽에서 떠나지 않는다.
아이들이 가장 집중하는 순간에
내가 폰을 들고 있다는 사실이
어떤 날은 마음에 걸린다.
그런데도 든다.
남겨야 하니까.
남기지 않으면, 하루가 없는 것처럼 되어버리니까.
수백 장의 사진은, 또 다른 업무가 된다
하루가 끝나면 앨범에는 수백 장이 쌓인다.
눈을 감은 사진, 흔들린 사진을 지우고
그중에서도 얼굴이 정면으로 나온 사진을 고른다.
기록을 만든다는 말은 결국 선택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남기지 못한 장면은, 있었던 일인데도
없었던 일처럼 뒤로 밀린다.
좋은 사진은 대체로 ‘좋은 하루’처럼 보인다.
그래서 더 조심하게 된다.
사진 한 장이 아이를 설명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질까 봐.
오늘의 표정 하나가 아이의 성격이 되고,
오늘의 한 장면이 아이의 하루 전체가 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우리 아이 사진은 왜 이것뿐이에요?”
가끔 어떤 어머님이 묻는다.
우리 아이 사진이 몇 장인지,
다른 아이는 몇 장인지.
그리고 왜 우리 아이 사진은 그만큼이 아니냐고.
그 질문이 나오면,
내가 정말 보육교사인지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인지
잠깐 헷갈린다.
아이의 기분을 살피는 일보다 먼저
사진의 개수를 설명하는 말이
입안에 준비된다.
“오늘은 활동이 많아서요.”
“움직임이 많아서요.”
말은 늘 그럴듯하게 나온다.
그럴듯한 말이 먼저 나오는 내가
가끔 낯설다.
밥을 먹이면서도, 기록을 만든다
밥을 먹일 때도 폰을 드는 순간이 있다.
숟가락을 들고 “한 입 더”를 말하다가
옆자리 아이가 혼자 숟가락을 잡아 올리는 걸 보면
반사적으로 폰을 찾는다.
처음으로 국을 흘리지 않고 먹는 모습.
입가에 밥풀이 묻은 채 웃는 모습.
젓가락을 따라 하겠다고 괜히 힘주는 얼굴.
그건 분명 귀엽고, 남기고 싶은 순간이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동시에 두 가지를 한다.
밥을 먹이고, 기록을 만든다.
내 손은 하나인데, 해야 하는 일은 늘 둘이다.
조용한 교실에서 나는 쉬는 대신 일한다
사진을 고르는 시간은 대개 낮잠시간으로 밀린다.
교실이 조용해지면 나는 폰을 켠다.
방금 전까지 내 앞에서 웃던 아이들이
이제는 화면 속에서 다시 지나간다.
낮잠시간은 쉬는 시간이 아니다.
지우고, 고르고, 확대하고, 다시 고른다.
손가락은 유리 위를 쉼 없이 넘기는데
마음은 자꾸 교실 쪽으로 걸려 있다.
아이들이 이불을 걷어차지는 않았는지.
잠결에 뒤척이며 울지는 않는지.
나는 틈틈이 아이들 쪽으로 시선을 보내면서도
손은 계속 화면을 넘긴다.
조용한 교실에서 나는
쉬는 대신 조용히 일한다.
투담임을 하던 때,
가끔 다른 반 친구들 활동하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예뻐서 찍었고, 좋아서 찍었는데
나중에 사진을 고를 때면
그 예쁨이 그대로 부담이 되었다.
누구는 더 많이 찍혔고,
누구는 덜 찍혔다는 말이 생기지 않게
나는 내 마음보다 균형을 먼저 계산한다.
내 짝꿍 선생님은 한국폰을 썼고 나는 해외폰을 썼다.
어쩌다 내가 찍어준 사진의 느낌이나 색감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
그 선생님 반 학부모님들이 유난히 내 사진을 좋아한다며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결국 그 선생님은 나와 같은 기종으로 핸드폰을 바꾸기까지 했다.
나중에는 “사진이 너무 잘 나온다”며 웃었다.
그 웃음이 싫지는 않았다.
다만 우리가 칭찬받는 지점이
아이를 얼마나 잘 돌봤는지가 아니라
사진이 얼마나 잘 나왔는지로
기울어지는 순간들을
나는 가끔 오래 생각한다.
돌봄이 아니라 결과물로 평가받는 기분.
아이가 아니라 이미지로 증명해야 하는 기분.
그래도, 놓치지 않으려고
물론 기록이 필요하다는 것도 안다.
아이의 하루를 궁금해하는 마음이 틀린 게 아니라는 것도 안다.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감당하는 건 다른 일이었다.
아이를 안아주는 팔과
사진을 찍는 손이 동시에 필요할 때
내 하루는 자주 둘로 나뉜다.
사진이 잘 나오면 다행이고,
사진이 부족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게 지금의 현실이라면
나는 그 현실 속에서도
아이들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아이의 하루는 사진보다 훨씬 크다.
적어도 한순간만큼은
화면이 아니라 아이를 먼저 보려고 했다.
하지만 내일의 시간표에도 특별활동은 적혀 있을 것이다.
교실이 조용해지는 시간에 나는 더 바빠진다.
나는 오늘도 아이들을 찍고,
아이들을 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