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진 김에 쉬어가는 중입니다 #1
호주로 처음 오게 된 것은 순전히 누구나 다 살면서 한 번쯤은 해본다는 워킹홀리데이였다.
한국에서도 간호사라는 직업은 꽤나 안정적이어서
내가 그만두지만 않는다면 은퇴하기 전까지 한국에서 간호사로 일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렇기에 더 늦어지기 전에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은 로망을 실현시키고자 호주로 왔다.
호주에서의 생활은 자유로웠지만, 호주에서 호주달러, 외화벌이의 맛을 보기 시작하면서
나는 이내 "홀리데이는 없는" 워킹홀리데이에 빠져들었다.
호주에서는 한국의 요양보호자와 비슷한 에이지드케어 워커(Aged Care worker)로 일을 시작했는데
호주도 한국과 마찬가지고 Aged care는 매우 큰 발전하는 사업이었고 일자리는 넘쳐났다.
내가 일을 할 당시에는 Aged care로 영주권이 가능하지 않았지만, 현재는 호주 영주권이 가능하게 될 정로도 Aged care는 여전히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분야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하루에 16시간을, 그리고 원한다면 주 7일을 일 할 수 있었다.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이렇게 많은 기회가 있는 것에 감사하며 나는 열심히 노를 저었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해서 번 돈은 호주 간호대 석사과정 첫 학년의 학비를 내고 나니 끝이 났다.
1년에 3천만 원에 달하는 호주 간호대의 학비는 지금도 많은 호주 간호 유학을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장벽이지만, 학비뿐만 아니라 생활비까지 스스로 충당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영어 진행되는 대학원 수준의 강의를 간신히 쫓아가면서도, 하루 4시간씩 Aged care에서 계속 일을 했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병원 실습이 진행되는 주간에는 오전에 병원 실습을 갔다가, 저녁에 Aged care에서 일을 하거나, 주말 시프트를 픽업했다.
아직 1년의 학비와 생활비를 더 벌어서 내야 했기 때문에, 계속 열심히 노를 저었다.
호주에서 간호사 면허를 받고 나니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한국에서 배웠던 간호 지식과 기술들은 호주에서도 여전히 유용했고, 나를 "일을 잘하는 간호사"로 만들어주었다.
시간이 흘러 영어가 좀 더 늘게 되자, 나에게 더 많은 기회가 열렸고 나는 호주에서 가장 큰 병원 중 한 곳의 중환자실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작된 COVID 시대가 되자 더 많은 기회가, 일자리가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호주도 간호사가 항상 부족 직업군에 속해 있을 정도로 부족한 나라인데, 환자들이 넘쳐나고 간호사들도 COVID에 걸려 일할 수 없게 되면서 사태가 심각해졌다.
호주는 간호사가 여러 병원에서 일을 하는 겸업이 가능한 나라인데, 그 당시에는 그렇게 Health care worker들이 COVID를 여러 병원에 전파시킨다는 이유로 겸업이 금지되었다.
여러 곳에서 일을 하던 간호사들은 일할 곳을 선택해야만 했고, 상대적으로 선택받지 못한 곳은 간호사가 더욱 부족해졌다.
나도 겸업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수입에 전혀 타격을 주지 않을 정도로, 주로 일하는 중환자실에서도 추가 근무가 넘쳐났다. 나는 이미 풀타임으로 일하면서도 일주일에 몇 개씩 추가 근무를 하였지만 COVID로 인해 휴가는 2년 동안 갈 수 없었다.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지!"
나는 동료들에게 항상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계속 병원에 출근을 했고, 동료들은 농담으로 "You are always here! (너는 여기 항상 있구나!)"라며 웃었다.
일하는 시간의 절댓값이 많아지는 만큼, 나는 더 많은 환자의 케이스를, 더 많은 위급 상황들을 통해 경험을 쌓았고, 그 덕분에 COVID 시대가 끝이 났을 때 다른 동기들보다 먼저 승진을 했다.
승진을 하고 나면 조금 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직위가 올라가는 만큼 책임은 커졌고, 할 일은 더 늘어났다.
물이 계속 들어와서, 노를 계속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노를 젓다 보니, 어느새 망망대해 위에 그저 홀로 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돌아보니 1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었고
내 손에는 이제 낡고 부러진 노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물은 지금도 계속 들어오고 있지만, 나는 마침내 노를 젓지 않기로 마음먹고 그것을 내려놓았다.
이 노를 계속 젓지 않는다면 파도에 쓸려 어디론가 가버릴지도 모르지만
그 파도가 데려가는 곳이 또 새로운 세상이길 소망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