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나라에서 온 그 사람을 상상하며
비자를 연장하러 태국 국경을 잠깐 밟았다가 다시 돌아온 라오. 바로 돌아가기 힘에 부쳐 다시 비엔티안에 있는 영국인 마이크 할아버지 집을 찾았다. 전에 머물렀던 방에 다시 묵게 되었는데, 거실 한켠에 지난번엔 보지 못한 네모난 체중계가 놓여있었다. 그러려니 하며 지나쳤는데,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 체중계에 얽힌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건 그냥 체중계가 아니었다. 마이크 할아버지네 체중계가 아니었다.
이건 누군가가 놓고 간 물건
여행자가 부러 두고 간 체중계
자연스레 저녁 식사 자리는 여행자들이 놓고 간 물건들 이야기로 채워졌다. 자신의 집 한 공간에 여행자들이 머물기 시작하면서 이 집엔 별의별 물건들과 그에 따른 이야기가 남겨지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놓고 가게 되는 물건들을 보고 있으면 그 사람의 성격이나 생활이 그려지기도 하고, 때론 한없는 물음표가 남기도 한다고 했다.
세탁을 부탁해놓고 옷가지 없이 떠나버린 가족들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다행히 이들은 아직 국경을 넘기 전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배달을 부탁해서 결국 세탁된 옷들을 받았다고 한다.) 한 무더기가 남겨진 지도, 수건, 충전기 이야기까지. 가끔 책상에 가지런히 놓인 지도와 가이드북, 각종 종이뭉치들을 보고 있자면, 국경을 넘어 다른 곳으로 걸어갈 이들이 종이 한 장이라도 덜어내 보려고 하는 마음이 보인다고도 했다. 본의 아니게 세상에 기부한 우산이 백 개쯤 되는 나로서는 그들의 이야기와 마음이 그려지고 한편으로는 이해되기도 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짐을 꾸릴 때마다 종이 한 장이라도 줄이려고 발악하던 나였으니 말이다.
물건을 다시 찾으러 오는 이들도 있지만 계속해서 어딘가로 나아가는 여행자들 대부분은 알면서도 그저 포기하거나, 혹은 본인이 잃어버린 지도 모를 거라 했다. 식탁에 앉은 우리들 역시 끄덕거리며 자신이 어딘가에 두고 온 물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마이크 할아버지가 덧붙인다.
그런데 말이지. 며칠 전에 정말 이상한 물건을 두고 간 사람이 있었어. 사실 물건 자체가 이상한 건 아닌데, 그걸 가지고 여행을 다닌다고 생각하면 그 이유를 영 모르겠단 말이지...
식탁은 금세 일렁이는 호기심으로 가득 차고, 체중계를 두고 갔을 그 혹은 그녀에 대한 온갖 추리와 상상이 이어졌다. 어떤 마음으로 그 이는 무거운 체중계를 지고 길에 올랐을까? 그의 마음을 가늠해보려 다들 상상의 나래로 빠져들었다.
그는 이번 여행에서 ‘체중감량’을 목표로 둔 여행자였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이야기, 혹은 단순히 곧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짐 무게를 확인하려고 시장에서 얼마 하지 않는 저렴한 체중계를 산 거 일수도 있다는 그런 이야기들.
그런데 어쩌면 말이다.
그 이는 비우고 싶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가만히 있어도 이가 덜덜 떨리는 추운 곳에서 여행을 시작한 사람.
추운 나라에서 따뜻하고도 뜨거운 나라로 오는 긴 여행길에서 당신을 따뜻하게 지켜준 외투부터 오리털 침낭, 털모자 따위를 하나씩, 하나씩 길에서 만나는 누군가들에게 내어주며 이곳으로 내려온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가지고 있던 짐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나는 이만큼 가벼워졌어.’ 하며 체중계에 올라가 눈금을 확인하고, 또 자족하며 내려오길 반복하면서.......
길어진 길 위에서의 시간만큼 혼자 보내는 시간도 늘어났겠지. 무언가를 찾고 헤매던 자신을 말없이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웃어주는 시간도 늘어났을 거야. 비워야 한다는 그 ‘해내야 하는 시간’, 그리고 그 ‘의미를 찾던 시간’에 대한 무거움도 조금씩 줄여나갔을지도 몰라.
계속 줄어드는 짐의 무게와 마음의 무게를 눈금을 통해 확인하면서 나아가다가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찾아온다.
‘비울 수 있을 만큼 많이 비우고, 놓을 수 있을 만큼 많이 놓은 지금, 이젠 체중계 눈금에 큰 변화가 없네. 더 이상 버릴 게 없는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러다 마주친 그의 체중계. ‘나를 봐.’라고 외치는 체중계를 빤히 바라보다가 알게 된다.
‘아, 너구나. 네가 있었구나.’
‘이제 너와도 헤어져야겠구나. 네가 가진 눈금, 숫자가 지금까지 나를 움직였다면, 이제 너 없이도 나의 길을 가야겠구나.’
체중계의 눈금, 숫자, 어쩌면 누군가들이 만들어놓은 잣대, 기준과 다른 길을 가게 될지도 모르는 그 여행자.
이제 그는 더 많은 짐을 질 수도 있고, 다시 추운 나라로 돌아갈 수도 있다. 지금보다 더 깊은 고민으로 더 많은 무게를 지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이제 체중계로부터 자유로우므로, 이고 가는 짐의 무거움과 가벼움은 여행자 본인이 판단하리라.
이 추운 나라에서 온 여행자의 이야기를 그 저녁 식탁에서 나도 나눴을까?
아니, 이 이야기는 당신에게 처음으로 들려주는 이야기.
당신과 나의 모국어로 풀어내고 싶었어. 짐의 무게와 삶의 무게, 만져지고 보이는 짐과 추상적인 짐, 없앰의 비움과 내려놓음의 비움, 그 모국어의 미묘하고도 간질간질한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빙빙 돌고 있었거든.
그래, 계속 걸어가다 보면 나도 나만의 체중계를 내려놓을 날도 오겠지.
덧붙이는 이야기
결국 나도 보기 좋게 할아버지 집에 휴대폰을 놓고 왔다는 뒷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