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아직 노는 법을 잊지 않았지.

팔딱팔딱 건강한 아이들을 만나다.



라오를 여행하기 딱 좋은 2월, 귀엽고 똘망하게 생긴 쌍둥이 자매가 농장을 찾았다. 3월이면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될 아이들, 두경과 래경. 말하는 것도 어찌나 예쁜지 자꾸만 들여다보게 되는 그런 아이들이었다. 한국과 다른 새로운 환경이 아직 낯선 건지, 습관인지 모르겠지만 부모에게 자꾸 아이패드를 달라는 말을 했다. 요즘은 스케치북도, 책도, TV도, 카메라도 되는 그 신통한 네모난 전자기기가 좀 컸다 싶은 아이들의 장난감으로도 쓰이는 모양이다. 그래도 기왕 농장까지 왔으니 농장에서 키우는 염소도 봐보고, 앞에 흐르는 강에도 가보면서 알아서 놀라는 부모의 말에 아이들은 툴툴거리면서도 이내 투정을 멈춘다. 아이들의 관심이 농장 식당에 머무는 고양이들에게로 향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따르지도 않는 길고양이들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던 쌍둥이는 그네들이 영 관심을 보이질 않자, 다른 것들을 찾으러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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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CF0100.JPG 염소야, 안녕!


이제 다른 살아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길가 천지에 널린 신기한 풀들과 꽃나무들이 아이들을 부르고, 초록의 동네가 금세 소꿉 놀이터로 변한다. 아이들은 거한 밥상을 한 상 차릴 기세로 여기저기를 훑는다. 꽃을 따서 돌로 빻은 꽃밥을 짓고, 길가에서 주운 나뭇잎으로 이불보를 만들고는 살갑게 이모를 부른다. 연초록빛 이불보는 찾았는데 누구를 덮어줘야 할지 고민하는 모양이다. 그러다가도 눈앞을 지나가는 노란 나비 한 쌍을 만나면 꽉 쥐고 있던 돌멩이를 내려놓고 그새 나비를 쫓아가느라 정신이 없다.



나비만 보며 뛰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는 어른들은 뛰다 행여 돌부리에 걸리진 않을까 하는 맘도 올라오지만, 괘념치 않는 아이들을 보며 걱정은 잠시 내려놓는다. 새침데기 서울 아가씨 같던 두 아이는 어느새 제 얼굴에 흙이 묻은 줄도 모르고 뛰어다닌다.


마주치는 살아있는 것들에게 백 퍼센트 웃음을 보여주는 아이들을 마냥 보고 있자니, 마음 속에 스쳐 지나가는 문장 하나.


그래, 아이들은 아직 노는 법을 잊지 않았지.

꽃밥 재료를 찾는 아이들


다음 날, 래 아저씨 집에 저녁식사 초대를 받아 쌍둥이 가족과 함께 찾아갔다. 마을 목수인 래 아저씨와 푸근한 미소가 아름다운 래 아저씨 부인 사이에는 늦둥이 막내딸 샨니가 있다. 월반할 만큼 영특하지만, 그만큼 까불이로 소문난 마을 대표 말괄량이 샨니가 한국에서 온 비슷한 또래의 쌍둥이를 보고 어색해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났다. 하지만 역시나 그 어색함은 잠깐이렷다. 힐끔힐끔 서로를 탐색하는 시간을 좀 갖는가 싶더니 어느새 세 아이는 집 앞마당에 떨어진 나뭇잎들을 다 끌어와서는 잔뜩 쌓아놓고 하늘 위로 던지며 놀고 있다.




무심한 듯 안 보는 척하며 아이들의 놀이가 익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내려오는 나뭇잎들 사이로 끊임없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눈빛을 마주치는 아이들, 스치는 눈빛은 말로 하지 않는 그네들의 인사였다. 서로를 만지고 쓰다듬는다. 데굴데굴 구르며 쉬지 않고 뭔가를 한다, 이게 뭐지 싶은 ‘무언가’를 한다. 굳이 정의한다면 지금 아이들은 노는 것 같다. 그다지 규칙이 있어 보이지도 않고, 그 속에 있는 재미는 더더욱 모르겠는데, 이 녀석들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숨넘어갈 듯 웃어 젖히며 논다. 말이 통하지도 않는데도 함께 노는 법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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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어색함을 뛰어넘은 아이들의 모습과 놀이가 진화되는 순간들을 몰래 지켜보고 있자니, 놀랍기도 하고 맴이 아릿하게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게 어떻게 되는 거지?’, ‘뭐가 재밌는 거지?’ 싶다. 머리로 이해해보려고 하는 나를 보니 순간 입이 써진다.


머리가 아니라 직감과 본능으로, 몸으로 아는 놀이.


그래, 아이들은 노는 법을 아직 잊어버리지 않았어.



밥 잘 먹고, 잠 잘 자며 나를 챙기는 일 말고는 라오에서 딱히 해내야 하는 일이 없다 보니, 자연스레 다른 이들의 일상이 보이는 빈 시간이 생겼다. 농장 앞을 지나가는 남쏭 강가에 나가 앉아있으면, 팔딱팔딱 살아있는 라오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 밖이 어둑어둑해져야 피곤한 몸을 끌다시피 하여 사무실을 나서던 지난날에는 만날 수 없는 시간이다. 일에 묻혀 지낼 땐 겨우 지인들이 올리는 사진과 글에서, 혹은 인터넷 뉴스로만 한국의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접할 수 있었는데, 매일같이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이렇게나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 지나치는 풍경이 아니라 오래도록 지켜볼 수 있는 것은 엄청난 호강이 아닐 수 없다.


오후 5시 남쏭의 풍경


맑은 햇볕에 그을린 아이들이 물살을 타고 논다. 코흘리개 아이들은 물살이 세지 않은 곳에 옹기종이 모여 물장구를 치고, 제법 큰 녀석들은 빠른 물살을 타고 논다. 정해진 레인에서 한 방향 일렬로 맞추어 앞뒤 간격 조정해가며 나가는 수영장 수영이 아니라, 물살과 깊이를 가늠해보며 강과 몸의 기운을 맞춰가는 물질이자 물놀이이다.


웃옷과 가방, 신발은 던져두고 강으로 들어간다.


이 아이들은 태생적으로 ‘잘’ 노는 법을 몸으로 안다. 지치지 않고 논다, 아니 질리지 않고 논다. ‘이만큼 놀았으니 됐어’가 아니라 그저 끊이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놀이를 이어간다. 몇몇이 모여 강둑에서 소꿉놀이를 하다가도 한 명이 강물로 돌진하면 나머지도 ‘이때다’ 하며 옷을 훌렁 벗어던지고 따라 들어가 신나게 논다. 누가 오래 잠수하는지 시합도 하고,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큰 형들의 다이빙 점프를 넋 놓고 바라보기도 한다. 그 무리 중에 제 오빠가 있는 모양인지 조막만 한 손으로 누군가를 계속 가리키는 꼬마를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내가 겪어보지 못한 누군가들의 옛날을 상상해보게 된다.


동네 아이들이 다 모였다는 물 맑았던 우리 동네 광주천,

더운 여름날에 늦둥이 동생 손잡고 냇가로 나간 오빠는 친구들을 만나 물살 타고 놀기 한 참이고, 아직 물이 무서운 여동생은 또래들 틈에 껴서 얕은 물에 있는 돌을 뒤집으며 다슬기를 잡느라 정신이 없는데, 저쪽에서는 학교 마치고 돌아오는 옆집 언니가 자전거를 끌고 와서 정성스레 씻기고 있는 그 옛날. 여러 무리로 놀고 있지만, 저 아이들이 다들 어디에 사는지, 누구 집 몇째 딸 인지쯤은 대충 아는 마을 사람들이 지나가며 한 마디씩 거들던 그 날들.

울 엄마의, 울 아빠의 어린 시절.


엇, 어느새 물에서 노는 게 시들해졌는지 한 무리의 꼬마들이 뭍으로 올라온다. 물가의 흙을 다져 단단한 공을 만들어 굴리기 시작하면 또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몰려온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게 흙공의 단단한 자태가 감탄할 지경이다. 그리고 또 무언가를 한다. 놀이가 이어지고 진화되는 순간이다.


라오의 아이들을 보면 “건강한”이라는 단어가 자동으로 떠오른다. 한국에서 아이들을 마주칠 때마다 반사적으로 나오는 “귀엽다”와는 결이 다른 단어, “건강한”을 라오의 아이들에게 붙여본다.


건강한 아이들

어떠한 한정된 공간이 놀이의 공간이자 폭이 아니라, 살고 있는 마을 전체가 열린 놀이터이고, 자연이 놀이터인 이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놀이의 반경, 움직임의 반경이 넓은 사회가 건강한 아이들을 만드는 것 아닌가 싶다. 매일같이 마을 골목골목을 뛰어다니고, 열린 대문을 두고도 굳이 담을 탄다. 열매가 익어가는 모습을 볼 때면, 떨어지길 기다리기 보단 입에 침이 다 고일 정도로 엄청 신 녀석일지라도 장대로 털거나 안 되겠다 싶으면 나무에 올라가서 따고 만다.


나무장대로도 털어보고, 나무에도 올라가보고!


어른들은 도통 잘 모를 이유로 열심히 뛰어다니다가도 갑자기 멈추고는 마주치는 것들에 인사를 한다. 그들을 멈추게 하는 것들은 땅을 기어가는 벌레이거나, 뜨거운 사월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먹음직스러운 오디열매이거나 길가에 무심히 핀 꽃나무들, 혹은 무심히 지나가던 당신의 발걸음이다. 도시와 달리 ‘앉는 자리’가 정형화되지 않은 이 마을에서는 어디든 풀썩 주저앉아 그 무언가들을 넉넉한 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다.


푸딘댕에서 마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찬찬히 보기 전까지는 눈치 채지 못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산품 ‘장난감’이 거의 없다는 것을. 시골에서는 자연 천지가 정말 놀잇감이다. 금과일이라 불리는 막캄(타마린드, Tamarind)을 먹고 나서 남은 씨앗은 잘 말려 공기놀이에 쓰고, 대나무로 만든 새총은 동네 개구쟁이라면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자연물로 만든 장난감이 있지만, 아이들에게 가장 즐거운 놀잇감이자 놀이터는 마을을 흐르는 쏭강일 것이다. 강으로 뛰어온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게 없이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는 강에 뛰어 들어가 몸을 쓴다. 팔딱팔딱, 건강한 아이들이다.


대나무로 만든 새총



다시 서울에서 온 쌍둥이 자매.

어느새 쌍둥이는 아이패드 대신 마을에서, 자연에서 스스로의 놀잇감을 찾아가고 있었다. 놀이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을 금세 찾아가는 두 아이의 모습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알아차리고, 궁금해하고, 감탄하는 반응하는 눈. 그 눈이 아직 트여있을 때일수록 놀이에 대한 감각을 찾아가는 시간이 더 짧아지겠지. 영국 시인 워즈워드는 무지개를 보고 뛰는 가슴에 대해 얘기하면서, 이렇게 계속 어린아이처럼 자연에 감탄할 수 있길 바라지만, 사실 굳이 무지개가 아니어도 아이들은 만물을 궁금해하고 신기해할 줄 안다. 작은 것에서도 수만 가지의 물음을 끌어낼 수 있는 게 그들일 것이다.


"이건 두뇌발달에 좋아."

"이걸 누르면 불도 들어오고 소리도 나서, 시각, 청각을 둘 다 자극한대."

"손가락 근육을 만드는데 좋아."

"이건 국민장난감이지. 집마다 하나씩 있어."


이렇게 아이가 있는 친구들의 집엔 장난감들이 쌓여간다. 호기심이 많고 새로운 자극에 반응하는 아이들은 금방 질려하며 새로운 자극을 찾아가고, 주변 아이들이 갖고 있는 장난감을 갖지 못해서 속상해하기도 한다. 혹은 반대로 국민장난감을 사주지 못하는 부모 맘은 또 쓰리다. 만물에 호기심이 가득한 아이들이 공장에서 만들어진 장난감에 쉽게 질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그러다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의 눈에는) 잘 놀지 못하는 아이들이 생겨나고, 어른들은 또 다른 놀이들을 가르쳐주기에 바쁘다. 다양한 놀이를 가르치려는 긍정적인 시도도 분명 많지만, 놀이가 새로운 과제가 되어 놀이를 부러 배워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도 벌어지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라오의 건강한 아이들처럼,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사실 ‘국민장난감’이 아니라, 뛰어다니고, 만지고, 궁금해하고, 살펴볼 수 있는 환경이 아닐까? 친구들과 맘 놓고 동네를 돌아다녀도 부모들이 걱정하지 않을 사회가 아닐까? 놀이의 반경, 움직임의 반경이 넓어서 마을 전체가 놀이터가 되고, 새로운 놀잇감이 천지인 터전이 되면 아이들이 더 건강해지지 않을까? 그런 마을과 터를 넓혀갈 수 있으면, 이제 장난감은 아이들이 찾을 것이다.


아이들은 아직 노는 법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서울에서 온 쌍둥이들을 보며 다시 깨닫는 날이다.


아이들이 서울로 돌아가서도 가능하면 조금 더, 아주 조금이라도 더 오랫동안 노는 법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억하고 있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만든 꽃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