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육지 사이, 선택해야 한다면
2953년 해상 단일 국가 ROS(Republic of Sea)
오늘은 1년에 단 한 번, 육지로 나갈 수 있는 테스트가 열리는 날.
만 15세가 되어 테스트 출전 자격을 얻은 ‘원’은 긴장된 표정으로 첫 번째 체력 테스트를 준비하고 있다.
‘첫 번째 선발 테스트, 체력 검정을 곧 시작하겠습니다.
3, 2, 1 출발’
이제는 원래부터 있었던 듯 익숙해진 인공 인어의 꼬리를 벗고 오랜만에 두 다리를 움직이며 몸을 푸는 참가자들 사이, 출발 신호와 동시에 ‘원’이 힘차게 달려 나간다.
지구온난화로 모든 빙하가 녹아 지구에 남은 토지 면적 단 1,800㎢. 예고 없는 지진과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홍수, 토네이도, 태풍, 산불까지 반복된 자연재해로 지구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다. 결국 제주도 크기만큼의 육지만 남은 지구를 두고 인간들은 치열한 논의 끝에 새로운 삶의 방식을 택했다.
해상 단일 국가 Republic of Sea
살아남은 각국의 정상들은 UN과 협의해 ROS를 선포하고 세계적인 기술력을 총동원, 바다에서 생존 가능한 인공 인어를 개발해 바다 세계의 삶을 일궜다. 이들은 먹는 것부터 숨 쉬는 것까지 제한적인 산소와 자원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엄격한 규율 하에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바다의 자원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법. 궁극적으로 다수의 더 오랜 생존을 위해 육지의 자원 수급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한 ROS는 1년에 단 한 번, 남아있는 육지로 나가 필요한 소수의 자원을 가져오는 임무를 수행할 인원을 선발하는 테스트를 진행한다.
#출전 자격: 만 15세 인어(여자만 출전 가능/ ROS 인구의 5%로 이루어진 소수의 남자는 인구 유지를 위해 향후 50년간 육지 진출 불가)
#테스트: 기초 체력 테스트 (참가자 중 10위까지 1차 선발)
기초 지력 테스트 (체력 테스트를 통해 뽑힌 10명의 참가자 중 5위까지 2차 선발)
인성 면접 (임무 수행에 참여한 이유 등의 질의응답 통해 최종 1위 선발)
#미션: 육지에 도착해 흙, 씨앗(모종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자원), 벌레, 가축, 민물을 담아올 것. (매년 가져와야 하는 모종/벌레/가축의 종류는 상이하다)
#성공 시 혜택: ROS에서 평생 음식, 돈 등 걱정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최적의 환경 ‘ELITE MERMAID VALUE’ 서비스를 평생 누릴 수 있다.
#실패 시 규정: 완수하지 못할 경우 황폐해진 육지에 장기간 노출 & 오염된 것으로 판단해 ROS로의 복귀가 불가하며, 이에 대해 ROS는 일체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
다섯 명의 언니를 둔 막내 ‘원’은 집안을 일으킬 마지막 구세주로 가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가장 총명했던 첫째 언니는 인어가 되었지만 미션에 실패, ROS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어 네 명의 언니들은 모두 15세가 되던 해 테스트에 임했지만 떨어졌기 때문이다.
"왜 이 테스트에 참가했나요?"
마지막 인성 면접에 면접관이 질문하자 ‘원’이 고개를 들어 대답한다.
"언니를 찾고 싶어서요."
모든 면접 내용을 컴퓨터에 옮겨 적고 있던 면접관의 손이 멈칫한다. ‘언니를 찾고 싶어서요.’라는 말 대신 ‘육지에서 반드시 자원을 구해와 평생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고 싶다.’라고 타이핑하는 면접관의 손.
‘원’은 마침내 테스트 1위로 선발된다.
인공 인어의 꼬리를 힘차게 저으며 수면을 향해 도약하는 ‘원’은 의지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육지에 다다른다. 오랜만에 두 다리로 밟아보는 땅. 어색한 발걸음을 앞뒤로 저어보며 몸을 풀어본다. 숨을 한번 크게 쉰 ‘원’은 주머니에서 접혀 있는 지도를 꺼내 펼친다.
‘바로 여기야. X표를 친 곳 보이지? ROS가 철저히 숨기는 비밀의 숲이라 그들이 준 육지 지도에는 아마 표시되어 있지 않을 거야. 너희 언니는 이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아.’
‘원’은 육지로 떠나기 전 과거 육지 미션에 실패했지만 특별 면접 전형을 통해 유일하게 ROS 돌아와 살고 있는 마녀를 찾았다. 바로 육지 지도를 얻기 위해서. 마녀는 목소리를 요구했고 ‘원’은 고민하지 않고 협상을 체결했다.
마녀가 준 지도를 따라 한 걸음씩 내딛는 ‘원’. 푸르른 청록색의 나무와 풀, 선선한 자연 바람과 발에 닿는 흙의 느낌까지 온몸으로 육지를 체감한 ‘원’은 완전히 매료되어간다. 어느덧 도착한 숲의 끝자락, 작은 언덕이 보인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온다.
“원… 원이야? 원아!”
첫째 언니가 틀림없다. 상기된 ‘원’이 언니의 부름에 한 발 더 내디뎌 언덕을 힘차게 오른다. 환한 햇빛 사이로 언니가 뻗은 손이 보인다.
“너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바다에서 배척당한 인간, 바다의 룰을 어겨 쫓겨난 이들이 모여 만든 육지의 숲. 하지만 허름하기 짝이 없는 그 모습에 ‘원’은 언니의 손을 잡아 바다 쪽으로 끈다. 하지만 '원'의 간절한 손을 거절하고 언니가 답한다.
“난 바다로 안 돌아가. 여긴 음식을 구하기도 힘들고, 보시다시피 이 모양 이 꼴이지만 말이야. 우리 나름대로 살아갈 방법을 찾고 있어. 난 육지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원아, 네가 ROS로 돌아가길 원한다면 필요한 육지 자원을 모두 담아 줄게. 그게 아니면 여기 남아도 돼. 너의 선택에 따를게.”
대답할 수 없는 ‘원’의 손가락 끝이 움찔거린다.
이윽고 고개를 드는 ‘원’이 언니를 바라보며 어딘가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