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없어져야 정신을 차리지

익숙함에 속기 전에 소중함을 지키기 위한 방법

by 오늘도맑음
갑자기 모든 것이 멈췄다.



식사 준비를 하면서, 오븐을 돌리고 후드도 켜놓아서 온갖 모터가 돌아가고 있던 중이었다. 거기에 배경 음악처럼 늘 들리던 냉장고 소리까지 멈추면서 순식간에 적막과 어둠만 남았다. 고요했다. 전기가 나간 것이다. 두꺼비집도 들여다봤는데 별 문제가 보이진 않았다. 알고 보니 건물 전기를 점검하느라 있던 일이어서 몇 십분 정도 있다가 문명의 세계로 돌아왔다. 왜 전기가 나갔는지, 언제 복구될지도 모르는 상태로 전기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동안 그야말로 불안과 불확실성의 세계를 압축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적막함과 막막함이 공존하는 가운데, 사실 전기라는 게 쓰이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늘 들려서 들리는지조차 몰랐던 작은 백색소음들은 대부분 전기가 연결되어있는 보일러나 냉장고 같은 가전들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 외 여가생활을 풍성하게 해주는 TV나 스피커는 물론이고, 컴퓨터와 세탁기에 이르기까지, 전기가 통하지 않으면 아예 의미가 없어지는 것(=가전제품)들이 가득했다. 당장 재택근무를 해야 하는 남편은 와이파이가가 안되니 핫스폿에 연결하면서 휴대폰이나 노트북의 배터리를 염려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수밖에 없었다.




없어져봐야 소중함을 안다.


늘 함께 있어 소중한 걸 몰랐던 거죠. 언제나 나와 함께 있어준 소중한 사람들을.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말자"의 원조. H.O.T.의 빛을 이진아가 편곡했다.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hrZm_WlZqH8


주변에 자주 잠수를 타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잠수라는 단어가 쓰이는 빈도에 비추어보면, 꽤나 자주 연락을 끊거나 휴대폰을 꺼버리곤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그래야만 자신의 소중함을 알아주리란 기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적어도 회피가 그의 습관인 걸 알기 전까지 주변 사람들은, "돌아만 와다오"라는 마음으로 그의 가치와 소중함을 되새기며 그의 존재를 무척이나 바랐을 테니까.


이와 같이 끝을 상정하는 것- 예를 들면 죽음에 대한 가정-은 때때로 놀라운 통찰력을 주기도 한다. 끝이 있기 때문에 언젠가 끝날 30초를 버텨내는 플랭크 같은 양상일 때도 있지만, 주로는 내 마음속 깊이 꼭꼭 숨겨져 있는 우선순위와 중요도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용도다. 마지막이라고 가정하고 생각해보면 마음속 잡음이 사라지고 한두 가지 정말 사랑하고 소중한 것들이 떠오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출처: https://images.app.goo.gl/H7nxN5n19wMyDm8r7


내일 죽는다면, 오늘 하고 있는 그 일을 하겠는가.
-스티브 잡스


연봉은 괜찮은지, 저녁은 잘 챙겨 먹을 수 있는지, 지금의 삶이 지속 가능한지 등 덜 중요하지만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현실적인 염려 앞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오늘의 삶이 견딜만한 것이라고 해도, 이 오늘이 마지막 하루라면 다르게 살고 싶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소망, 정확히는 소망에 대한 깨달음은 결국 오늘의 삶을 바꾸어 놓는다. 고요의 정전 이후, 다시 전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해서, 그에 대한 생각이 이전과 같아질 수 없는 것처럼. 예를 들면 이제 의사결정의 기로에서 이전과 다른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태양광 패널을 고려하거나 배터리가 두둑한 제품을 찾아보면서, 전기의 부재를 염두에 두고 선택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꽤 많은 경우에서, 존재는 부재를 통해 그 존재를 드러낸다. 가만히 속 안 썩이고 지내면 "가마니"취급을 받는다는 우스갯소리처럼, 꼭 말썽을 피우면서 "착함"의 부재를 선사해야만, 사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얼마나 편안했는지를 깨닫는 것이 간사한 인간의 본성이다. 어쩌면 우리가 고이고이 접어둔 꿈 또한 그런 존재인지도 모른다. 이제 꿈을 펼칠 수 없는 (진짜 마지막) 날이 온다고 하면 그제야 후회로 점철되어 드러날지도 모르는 그것.


그러니 한 번 즈음은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보자.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 어떻게 보내고 싶은가?






*표지 그림 출처 :https://images.app.goo.gl/M71e5y73wSqWmYtt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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