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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 May 02. 2023

[배우입니다] 불 꺼진 곳에서 분장을 지우는 삐에로

떠나보내지 못한 '수연'

 어릴 적에, 5분짜리 영상 하나를 4시간 내내 돌려본 적이 있었다. 내가 무대 위에서 공연했던 모습을 담은 영상이었다. 나는 공연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돌아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방 안에 틀어박혀 4시간 내내 5분짜리 영상을 돌려봤다. 그 짧은 영상을 수십 번도 더 반복 재생해 댄 이유를, 나는 아직도 분명히 기억한다. 떨쳐낼 수 없는 공허함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고작’ 5분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 5분을 가득 채우기 위해 하루하루 공들여 아주 큰 나만의 탑을 쌓아 올렸었다.

그렇게 끊은 결승점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내 손으로 내가 만든 탑을 다 부숴버린 기분이었다. 사라진 함성소리, 화려한 조명, 꿈꿔왔던 모든 순간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제 영화촬영을 끝마쳤다. 여태껏 참여했던 작품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캐릭터였고 시나리오였었다. 그래서 잘 해내고 싶었다. 연출부, 그리고 상대배우님과 함께 모여 대본리딩도 가장 많이 했었다. 함께 호흡했던 순간이 겹겹이 쌓인 만큼, 캐스팅된 순간부터 촬영이 끝마칠 때까지 ‘잘하고 싶다’라는 마음밖에 없었다.‘잘하고 싶다’는 마음은 꼭 욕심을 부른다. 그 욕심에 촬영 전 날까지 스스로를 들들 볶아대며 늦은 시간까지 혼자 연습실에서 수없이 연습하곤 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나의 역량이 여기까지 밖에 되지 않는구나, 스스로를 의심했던 순간들로 가득했다. 그래서 끝나면 마냥 후련할 줄 알았는데, 나에게 밀려온 건 다시 공허함이다.

 이번에 맡게 된 캐릭터 ‘수연’은 나 자체였다. 그래서 유난히 애착이 갔었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자신의 장애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수연의 모습에서 내가 보였었다. 큰 수술을 하고 건강을 잃어버리며 하고 싶은 일을 눈앞에 두고도 포기했었던, 그 앞에서 수없이 울었던 내 모습이 자꾸 보였다. 그래서 ‘나’를 버리고 ‘수연’이 되는 일이 어렵지 않았었다.


 나는 수연이 자신의 장애를 고백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유난히 좋아했다. ‘수연’이 아니라 꼭 내가 ‘나’의 아픔을 고백하는 것만 같아서 그랬을까, 그 장면을 연습할 때마다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그 감정을 잘 살리고 싶어서 촬영 전부터 일부러 기분을 가라앉혔다. 거울을 보고 나 자신에게 나의 결핍을 고백하며 하염없이 울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촬영을 할 땐 ‘컷’ 소리가 나고도 그 감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대성통곡을 했다.

 나는 아직도 수연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길을 걷다가도 눈에 눈물이 고이고, 혼자 있으면 괜스레 마음이 찡해진다. 수시로 기분이 바닥까지 내려앉아 애를 먹는다. 언제쯤 수연을 완전히 보내줄 수 있을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엄마는 나에게 그런 말씀을 해주셨다. 분장실에서 분장을 지우는 광대가 세상에서 제일 비참하다고. 나는 지금, 불 꺼진 곳에서 분장을 지우는 중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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