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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 Jun 02. 2023

세상에서 나의 흔적이 사라질 때

나를 기억하기

 처음 투병사실을 알리고 가장 놀랐던 건 하루에 수십 통도 더 쏟아지는 연락이었다. 안부를 묻는 짧은 카톡부터 시작해서 몸에 좋다는 건 죄다 싸들고 집 앞까지 찾아오는 사람들까지, 다들 각자의 방식대로 나를 안아주러 오곤 했다. 하지만 그건 모두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들은 잠시 안부를 묻고서 다시 각자의 일상을 위해 떠나야만 했고 나는 혼자 남아 나의 세상을 지켜야만 했다. 밀물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나 혼자 덩그러니 겨졌다.

 처음엔 통증을 짊어지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주사 한 대에도 몸을 가누지 못해 하루 종일 누워있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매일 같이 침대에 누워 꼼짝도 않은 채 같은 벽만 바라보는 단조로움은 그 통증을 완전히 이겨버렸다. 병원에 있는 내내, 나는 병실에 있는 것조차 거부했다. 무통 주사와 온갖 링거를 주렁주렁 달고 병실에서 나와 하루 종일 병원 복도에 앉아있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몸을 절뚝이며 온 병원을 돌아다녔고 병원 편의점 구경부터 지나가는 사람 구경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벌이고서야 겨우 지쳐 잠에 들었다.

 퇴원하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발악을 시작했다. 그러나 수술용 칼로 죽죽 그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흉터 자국들을 가득 안고서 할 수 있는 발악은 애석하게도 그리 많지 않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늘어지는 몸 때문에 제약이 컸다. 그래서 나는 앉아서 할 수 있는 자기 계발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매우 과도하게. 나는 글을 쓰는 재주가 있으니까, 앉아서 글을 썼다. 객원기자에 지원해서 기사도 쓰고  대회에 나가서 장관상도 받았다. 이만하면 으쓱해도 될 만한 성과를 여럿 내보였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성과에 대한 나의 집착은 계속되었다.

 사람이 죽는 순간은 사람에게 잊히는 순간이라고 하던가. 인간은 어울려 사는 생물이라 존재가 잊히지 않기를, 기억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나는 투병을 하면서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내가 잊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나는 그게 두려웠다. 세상에 나에 대한 흔적이 지워지는 것만 같았다. 끊임없이 실적을 내지 않으면, 무엇인가를 내보이지 않으면, 나란 존재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곧, 사망선고인 것 같았다. 그렇게 살아남기 위해 나는 투병하는 내내 가시적인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애를 썼다. 그때 만들어 놓은 결과는 현재의 나에게 좋은 영향이 되어 돌아왔다. 덕분에 나는 꽤 많은 액수의 장학금도 받았고 이력서도 가득 채워 원하는 곳에서 일도 했다. 하지만 후회한다. 그때 추스르지 못한 몸과 마음은 아직도 채워지지 않은 채 비어있다.

  사실 잊히지 않는 법은 아주 간단했다. 내가 나를 기억하면 되는 것이었다.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 내가 다하고 싶은 삶의 소명, 내가 추구하는 모든 가치들을 기억한다면야 나는 세상에서 절대로 잊힐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잊어도 단 한 사람이 항상 나를 기억하고 있으니까. 가장 무서운 ‘잊힘’은 내가 내 자신을 잊는 것이었다. 타인을 통해, 그 타인의 기억을 통해, 덜 중요하고 더 중요하고의 가치 판단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 내가 나를 늘 기억하니까 나는 늘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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