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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 Jan 17. 2024

우리의 반짝임이 좋아

나는 예대생입니다

서촌에서 학교 사람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학교 사람들과 자리를 가진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그들은 내가 ‘상처 팔아서 예술하는 기분이야’ 라고 어떠한 부연설명도 없이 투덜거릴 때, 고개를 끄덕여줄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날도 모두가 공연 연습을 하고 오는 길이었다. 누군가는 다음 날 연습이 있다며 목을 아끼기 위해 술을 마시지 않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공연을 위해 체중관리를 하고 있다며 음식을 덜어 먹었다. 나 또한 그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같은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예대에 입학하는 사람들 중에서 ‘성적 맞춰서 들어왔어요’ 라고 말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예대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실기 시험을 봐야하기에 가고자 하는 길에 진정으로 뜻이 없으면 그 고된 시험을 준비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학교가 좋았다. 같은 열정들이 한데 모여 있는 이곳에서는 다른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어떠한 반짝임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늘 영감을 받을 수 있었다. 수업이 있는 날이면 나는 메모장에 항상 무엇인가를 빼곡하게 적어왔다. 그럴 때마다 이곳에 온 내가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그랬던 나의 반짝임도 바래지기 시작했다.
 꽤 좋은 학점과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등수로 학기를 마무리 지었다. 원하는 성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만족했다. 다음 학기에도 계속 전액 장학금을 계속 받을 수 있어서였다. 나에게는 당장 눈앞의 등록금이 해결되는 것이 중요했고 생활비를 버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낮에는 학교를 다녔고 밤에는 일을 했다. 피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내야만 했다. 그 밖에도 현생을 지켜내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태산 같았다. 한 해가 지나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내 어깨 위에 얹어지는 짐이 쌓여만 갔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해내기 위해 주먹을 꽉 쥐고서 살아왔다. 돌이켜보면 주먹에 들어간 힘만큼이나 많은 것을 얻었지만 되려 많은 것을 잃은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눈앞에 닥친 현실의 고민과 푸념들을 늘어놓는데, 한 친구가 내 이야기를 듣더니 말을 꺼냈다
“언니는 되게 현실세계 사람 같다.”
“응? 현실세계 사람?”

 학교 캠퍼스 근처에 있는 마로니에 공원에는 유명한 문구가 있다
‘예술은 삶을 예술보다 더 흥미롭게 하는 것’
학교를 갈 때마다 매일 그 문구를 보며 학교를 간다. 처음 마로니에 공원에서 그 문구를 보았을 땐 가슴이 뛰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문장에 대고 콧방귀를 치기 시작했다. 그 때 깨달았다. 내가 점점 현실세계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맞다. 나는 현실과 점점 타협을 하고 있었다. 물론 현실과 타협하는 일이 무조건적으로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상을 현실로 만들어 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겠지만 어쨌거나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중간에서 적절한 조율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실 지금의 내 모습은 현실과 이상의 조율이 아닌 그저 꿈을 잃어가는 사람일 뿐이었다. 문득 과거의 나에게 미안했다. 꿈을 위해 큰 포부와 함께 많은 위험들을 안고 뛰어 들었던, 예전의 반짝‘였던’ 나에게 말이다.

 그 때 또 다른 친구가 말을 꺼냈다.
“있잖아, 나는 이 일이 너무 행복해”
 취중진담으로 뱉을 법한 말이지만 그 친구는 술에 취해 있지 않았다. 다음 날 또 연습이 있다며 술 대신 콜라를 마시던 친구였다. 또렷한 정신으로 진심을 담아 말을 이어 나갔다.
“밥이 맛있다, 옷이 예쁘다, 라는 말은 쉽게 할 수 있는데 연기를 잘한다, 노래를 잘한다, 라는 말은 쉽게 못하겠어. 왜냐면 내가 너무 소중히 여기는 것이니까… 함부로 말하기가 어려워”
 그 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진심어린 표정을 보았다.

 자리가 파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그 날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하나 둘 스쳐갔다.  그리고 내가 잃어버렸던 것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예술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게 한 숱한 순간들 말이다. 암전된 공연장 안에서 불이 켜지길 기다리며 설레어 했던 마음, 둥둥거리는 우퍼소리에 날아갈 것만 같았던 기분들, 아름다운 거짓말을 만들어 내는 그 환상의 순간들 말이다. 그 날, 여전히 무대를 향해 빛을 발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현실에 치여 바래졌던 나의 꿈과 행복한 상상들이 하나 둘 일깨워졌다.

 스물 넷, 연극학과에 가겠다며 부모님 몰래 휴학을 내고 입시를 준비했던 나의 행동은 무모한 도전이었을까 혹은 인생을 뒤바꿀 최고의 도전이었을까. 아직 그 결말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반짝이는 하루에 또 그러한 하루를 더하다보면 분명 별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나는 지금 이렇게 반짝이는 우리의 모습이 좋다. 내가 잃어버린 것을 다시 되찾게 해준 이 아이들의 순수함이 자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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