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대, 연극영화과를 소개합니다
대학에 가면 적어도 한두 명에게서 들을 수 있는 말이 있다.
“성적 맞춰서 들어왔어요”
사실 딱히 흠결이 있다거나 특별한 말은 아니다. 원하는 점수에 맞춰서 대학을 들어가는 것은 생각보다 흔한 일이니까. 그러나 내가 있는 이곳에서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그 말을 들을 수가 없다. 바로 예술대, 연극영화과에서 말이다.
나는 연극영화과에 다니고 있다. (내가 다니고 있는 중앙대의 경우, 정확한 명칭은 연극학과다) 이곳에 오기 위해서 나는 소위 말하는 ‘객기’를 부렸다. 부모님 몰래 수능과 실기를 친 것이다.
어릴 적, 나는 내가 살던 곳의 예술고등학교에서 하는 콩쿨에서 최연소로 차석을 하며 입학제의를 받았다. 집 우편함에 입학 할 경우 장학금을 주겠다고 온 편지를 보고, 나는 엄마에게 가서 당당하게 말했다
“나 예고 갈래!”
엄마의 표정은 순식간에 일그러지셨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안 돼. 어디 딴따라짓을 하려고.”
딴따라짓. 나의 어린 시절 순수한 열망과 동경은 엄마가 말하는 ‘딴따라짓’ 단 4글자로 치부되며 보기좋게 꺾여버렸다.
그러나 나는 늘 무대에 섰다. 학교나 외부에서 공연할 사람을 찾는 공고를 보면 나는 늘 먼저 손을 들고 오디션을 봤다. 그렇게 엄마아빠 눈을 피해 몰래 몰래 공연을 하며 희열을 느꼈다.
그러나 엄마는 알고 있었다. 나에게 바람이 단단히 들었다는 사실을. 학교에서 학부모와 선생님 사이에 상담이 있는 날이면 엄마는 선생님께 간곡한 부탁을 드렸다. 내가 무대에 서지 못하게 막아달라고. 그 한 번은, 공연 전 날에 내가 무대에 선다는 사실을 알고 의상을 찢어버리신 적도 있었다. 나는 그 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다른 무대 의상을 구하기 위해 친구들에게 수소문을 했었다. 그렇게 엄마는 10년을 넘게 줄곧 나를 막아왔다. 나는 그런 엄마의 노력에 못이겨 평범한 고등학교, 평범한 과에 진학하며 엄마의 기대를 충족했다. 하지만 그건 딱 23살까지의 이야기다.
24살이 되던 해, 코로나가 터졌다. 모든 수업은 비대면으로 바뀌었고 학교라는 곳에 갈 이유가 사라졌다. 나는 그 빈틈을 노렸다. 부모님 몰래 다니던 학교를 휴학한 것이다. 수업이 비대면으로 진행되니 학교에 다니는 ‘척’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그렇게 부모님의 눈을 피해. 수능 공부와 실기 공부를 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부모님 지원 없이 준비하는 입시는 쉽지 않았다. ‘돈’. 그놈의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수능을 위한 인강과 교재값을 비롯, 실기비용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3개를 뛰었다. 공부가 아닌 ‘아르바이트 3개’. 그게 내 입시의 시작이었다.
나는 지방에서 서울까지 고속버스로 4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왔다갔다하며 실기 레슨을 받았다. 고속버스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하다. 고속버스가 비용이 가장 쌌기 때문이다. 나는 왕복 10만원이나 하는 KTX 비용을 혼자 감당할 여력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새벽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 레슨이 끝나고 밤에 집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집에 도착하면 시간은 늘 새벽이었다. 나는 1년간 그 벅차고 지긋지긋한 시간을 견뎠다. 그저 ‘딴따라짓’을 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기적같이 엄마 말하는 ‘딴따라’가 되었다. 딴따라짓을 가르치는 곳에 와서 알차게 광대짓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곳이 꽤나 마음에 든다.
이곳에는 열정이 있다. 함께하는 친구들의 눈에는 내가 1년간 모든 걸 바쳐 준비했던 열정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반짝이는 빛이 숨어 있다. 모두가 예술을 하겠다는 간절한 열망으로, ‘하필’ 예술대, 그리고 ‘하필’ 연극영화과를 선택한 사람들. 그래서 이곳은 단순한 대학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삶을 걸어야만 닿을 수 있는 무대다.
나는 앞으로 그 가슴 설레이는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