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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씩 네가 너무 싫어

그러니까 내 글에서 나가

by 박작가

2024년 작








일기를 쓰다 보면 헷갈릴 때가 있다. 글의 주인공이 나인 건지 남자친구인 건지. 깨어있는 내내 같이 있는 게 아니니 분명 나만의 생활이 있는데도 난 습관적으로 윤호 얘기를 썼다. 마치 하루를 돌아봤을 때 그 애를 빼면 아무 것도 얘기할 수 없다는 것처럼. 늘 걔를 생각해서 그런 거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이제 난 애인 없으면 아무 얘기도 할 수 없는 남미새같은 사람이 된 걸까 싶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아. 그렇게밖에 설명을 못 하겠다. 태어났을 때는 혼자였는데, 하지만 오래 사귀기도 했는데. 내가 윤호 이야기를 쓰는 게 이상한 건 아닌데, 하지만 그렇다고 쟤 얘기만 주구장창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분명 나를 중심으로 할 말도 할 수 있는 말도 많은데, 왜 자꾸 도돌이표처럼, 글감이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구는 걸까. 일기에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초등학생이라도 된 기분이다.



그래도 하나는 확실하다. 시시하다는 거지. 머리 아프게 뭘 쓸까 생각하다가 결국 쓰는 게 또 애인 이야기라니. 결혼 후에 남편 얘기만 하는 일상 브이로그 유튜버라도 된 기분이다. 그러니까… 나는 연애 이야기나 하는 작가, 뭐 그런 게 된 것 같다는 거지. 작가에겐 특정 소재에 꽂히는 시기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수학이든 우주든 립밤이든 상관없지만, 남자는 아니었으면 했다. 이성 이야기만 하는 건 여러모로 별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입만 열면 남자 이야기를 하고 스스로의 주관 보다는 애인의 생각이 더 중요하고 또 모든 행위의 목적이 남자인 사람. 내가 그런 남미새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그래. 정말 스스로가 너무 별볼일 없다고 느껴진다. 아무리 좋게 포장하려고 해도 전혀 멋있지 않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또 내가 나를 우습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가수 셰어는 어떤 프로그램에서 남자란 디저트같은 거라고 했지. 있으면 좋지만 사는데 꼭 필요하진 않다고. ……아니, 달라. 디저트는 99퍼센트의 행복을 보장해 주지만 남자는 그러지 못하는 걸.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만 그에 상응하는 혹은 그보다 더한 상처를 주고 불행하게 만들기도 한다고. 그러니까 남자와 디저트를 비교하는 건 옳지 않다. 그런 존재에게 매달리는 건 더 옳지 않고! 먹고 나서 후회할만한 건 성심당 튀김 소보루 정도면 충분하다고 본다. 보장되지 않은 아무 빵이나 좋다고, 혹은 이 빵이 최고라고 무턱대고 먹었는데 그게 사실 똥 맛이면 어쩔 건데? ㅡ그래도 빵이면 낫지, 소화되기 전에 뱉을 수라도 있잖아. 남자는 그럴 수도 없는 걸.



내가 과하게 생각하고 있는 걸 수도 있다. 그거 인정. 모든 남자가 이상하지는 않을 거다. 이것도 인정. 이 글의 시작이 윤호 하나에서 시작한 건데 걔는 그렇게 이상한 애는 아니니까 가만히 있는 게 맞을 지도 모른다. 이건… 반만 인정이야. 윤호는 나한테는 좋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은 모르는 걸. 게다가 친구 남자친구가 나한테는 그저 그런 사람인 것처럼 윤호도 다른 사람한테는 그저 그런 남자라고. 그러니까. 내가 계속 윤호 이야기해봤자 다른 사람한테는 오징어 지킴이에 남미새로 보일 뿐일 거다,.



남미새. 씁……, 남미새라. 이런 생각이 들긴 해도, 난 남미새는 아닐 거다. 그럴 수도 있다는 이유는 하나 밖에 없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이유는 수도 없이 댈 수 있으니까(그걸 일일이 나열하는 건 별로 멋있지 않으니 생략하겠다). 좋아하는 사람 이야기를 쓰는 거니 이런 글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난 숨기겠다. 글의 주제가 아무리 너여야만 하더라도 옆으로 밀어두고 주인공은 나로 만들고 말 거다.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라도 해도, 너를 자랑하고 싶더라도, 우리의 사랑을 널리 알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도! 다른 종에게는 없고 우리 종에게만 있다는 그 자제력을 발동시켜, 그런 마음을 장독처럼 땅에 꽁꽁 묻을 거다. 왜냐하면 나는 남자 이야기를 자주 하는 작가는 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작가는 별로 멋있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또, 그런 작가는 충분히 많으니까. 나는 다른 작가가 되고 싶다.



나는 대체로 네가 좋지만 그래도 가끔은 싫다. 내 삶은 물론 내 글도 지배하는 것 같거든. 그러니 앞으로 글에서만큼은 엑스트라로 남아주면 좋겠다. 실명이 아닌 애인 혹은 남자친구라는 두루뭉실한 이름으로 등장해서, 주어진 대사만 몇 개 뱉고는 후다닥 사라줘 주라. 그래, 윤호야! 주인공인 나를 반짝 빛나게 해주고는 그냥 날아가 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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