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일이었다. 강원도 어딘가의 유스호스텔로 학년 전체가 수련회를 갔다. 아마도 첫 수련회였던 것 같다. 왜냐면 수련회 급식이 맛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수련회 급식은 맛이 없었다. 메뉴도, 맛도, 심지어는 온도도 별로였다. 다행히 매점이 있었다. 허나 수련회 급식이 맛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터라, 돈을 가져온 애들이 별로 없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디선가 와그작와그작 소리가 들렸다. 돈을 챙겨 온 친구가 매점에서 감자 과자를 산 것이었다. 양 옆에 친구 둘을 끼고 감자 과자를 입으로 부숴버리면서 와그작와그작 소리를 내는 그 모습은 꽤 권력자의 모습 같았다. 숙소에서 아이들은 모두 그 친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배고픈 어린애들은 1차원적이지 않은가.
때문에 그 친구가 제안을 했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자신과 똑같은 걸 계속 내는 한 명에게 과자를 조금 주겠다고. 평소에는 친하지 않았던 그 친구와 모두가 같은 마음이려고 애썼다. 한 세 명쯤 남았을 때였을까. 긴장감이 맴도는 순간, 갑자기 소리가 들렸다. 와그작. 과자를 갖고 있는 애의 옆에 서있는 친구가 과자를 먹었다. 가위바위보에서 탈락한 친구가 그 광경을 손으로 가리키며 크게 이야기했다.
쟤는 가위바위보 안 했는데?
순간적으로 정적이 흘렀다. 그 친구의 예리함 때문이 아니라, 둔함 때문이었다. 과자를 갖고 있는 친구가 이런 것까지 설명해줘야 하나 싶은 투로 말했다.
얘는 나랑 친하잖아
지적한 친구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아마 그 이유를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가위바위보가 재개됐다. 과자를 가진 애의 친한 친구는 아무렇지 않게 과자를 먹으며 가위바위보를 구경했다. 마침내 가위바위보 승자가 정해지고, 과자를 어느 정도 받게 됐다. 그리고 가위바위보에서 이긴 아이의 친구들이 아무렇지 않게 그 애 손에 담겨있는 과자를 먹었다. 그들도 가위바위보에는 졌지만 먹을 수 있었다. 그 친구랑 친했으니까.
-
먹는 걸로 얘기를 시작했으니, 먹는 걸로 비유를 들어보자. 너무나 가고 싶었던 맛집에 가기로 했을 때, 우리는 우리가 갈망하던 마음만으로는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 오픈런에 실패하면 한없이 기다려야 하고, 인내심 부족으로 웨이팅을 버티지 못하면 들어갈 수 없으며 언제나 공평하게 온 순서대로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기다려서 들어가면 기다리느라 고생했고 미안하다는 말은커녕 바빠서 예민해진 직원들의 눈치를 볼 때가 태반이다. 주문하면 시킨 만큼의 양이 나오고, 맛있게 잘 먹더라도 잘 먹어서 이쁘다며 더 먹으라고 주지 않는다. 돈을 내야만 더 먹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부분이 있나? 맛집이 만약 누군가는 기다리지 않고 들여보내 주고, 저쪽 테이블만 뭘 자꾸 주고, 나한텐 쌀쌀맞은데 다른 사람에게만 다정하게 대해준다면 어떨까?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다. 평등함, 그건 맛집뿐 아니라 다수의 삶에선 필수적인 부분이다. 하지만 개인으로서의 삶은 평등함으로만 삶이 유지되긴 어렵다. 그와 상응하는 특별함이 필요하다. 아마 이따금 사람들을 속수무책으로 무너뜨렸을 특별함.
-
영화 <아이다호>에서 마이크와 스코트는 부랑자로 살며 돈을 벌기 위해 섹스를 한다. 둘은 친해지고, 마이크는 스코트에게 우정과 사랑이 섞인 감정을 느끼고, 스코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어. 돈 안 받고 말이야… 널 사랑해, 그리고 넌 돈 안내도 돼” (“I mean… I mean for me, I could love someone even if I… wasn’t paid for it. I love you and… you don’t pay me.”)
아마 마이크는 스코트에 대한 마음이 우정인지 사랑인지에 대해 생각해봤을 거고, 그 과정에서 ‘돈이 되지 않아도 스코트를 사랑할 수 있다’라는 결론이 났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사랑은 늘 이런 식이지 않나? 모두에게 잘해주는 게 아니라 너에게만 잘해주게 되는 것이며, 너이기 때문에 잘해준 것이라는 것. 다른 사람은 걱정되지 않아도 너는 걱정되며, 다른 사람들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아도 너의 말만큼은 귀 기울여 듣게 되는 것.
매 순간 가위바위보를 하며 산다도 해도 과언이 아닌 삶에서 짧고 순간적이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사랑하고 사랑받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순간엔 왠지 세상에 있는 무수한 질서를 뒤로할 수 있게 된다. 너에게만 적용되는 예외의 마음. 예외를 만드는 일, 아마 사랑의 일은 그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