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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 Jun 20. 2020

너의 바다에 머무네

긴 세월이 파도치고, 나는 어른이 되어 가는 중이었다.

과거 연인과의 이별은 지겨울 만큼 술자리의 단골 소재가 되었고, 그마저도 지쳐서 어느 날부턴가 주변 사람들과의 술자리보다는 여행이나 공연으로 내 시간을 가득 채웠던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힘든 나를 위로해주는 좋은 친구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고, 내가 무슨 일을 겪든지 항상 내 편이 되어주고 나를 응원해주는 가족이 있음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또 다른 큰 수확은 내가 앞으로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하는지에 대해 완벽하게 학습했다는 거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이어진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몇 번의 소개팅을 했고,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부담 없이 '기다림이 주는 설렘'을 받아들일 줄도 알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어느 10, 친구와 계획 없이 KTX 타고 부산에 갔다. 목요일  친구와 카톡을 하다가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다는 대화를 했고, 친구와  모두 운전을   몰랐던 터라 부산행 기차를 타기로 결정했다.


친절하게도 참 맑고 깨끗했던 그 날 부산의 날씨.


우리는 부산역에 도착하자마자 밀면을 사 먹고 곧바로 해운대에 갔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마주한 바다는 뭐랄까. 격렬한 감정 소비를 완벽하게 끝내고 쉴 곳을 찾아 헤매던 내게 누군가가 건네준 나침반과도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바다만 바라보고 쏟아지는 햇살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그 순간이 너무도 소중했다. 그러고 보니 동행했던 친구가 참 고마웠다. 내게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한참 동안 바다를 함께 바라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그 친구에게도 휴식이 필요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우리는 커피 한 잔씩 들고 동백섬을 걸었다. 경치는 말할 것도 없이 좋았고 바다가 더 가까이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바람이 솔솔 불고 시원한 아메리카노가 들어가니 그제야 나는 말문이 트였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와있는 걸까"


당시 우리 나이는 20대 후반. 그 친구도 나도, 각자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며 달려가던 중 앞을 내다보거나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 보니 내가 어떻게 하다가 이 자리에 왔으며, 어떤 기분으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나 스스로에 대해서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TV 토크쇼에나 나올 것 같은 질문을 나와 친구에게 각각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잠시 후 친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는데, 어쨌든 나는 지금 내 삶에 만족해. 내가 하고 싶은 일도 하고 있고, 원한다면 이렇게 갑자기 너랑 부산 여행을 올 수도 있을 만큼 내 시간도 가지고 있어. 그런데 하나 아쉬운 건... 아빠가 보고 싶어"


친구는 어릴 때 아빠가 돌아가셨던 터라 아빠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다고 늘 얘기했었다. 그래서 평소 아빠 얘길 꺼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던 어느 날 아빠 생각이 난다고 했다. 이전에 그 친구는  엄마, 오빠와 함께 치킨에 맥주를 먹으며 TV를 보다가 너무 웃겨서 체할 정도로 웃었다면서 그 날의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나와는 다르게 가족들과 살갑게 지내고 치맥과 TV만으로도 배가 아플 정도로 즐거워하는 친구가 꽤 부럽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나는 그 친구의 숨겨진 마음 한편에 잘 기억나지 않는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남겨져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친구는 아빠가 어디선가 딸을 지켜보고 있다면, 이 바다를 품에 안고 보고 계실 것 같다고 얘기했다. 그렇다. 그 정도로 그 날 우리가 바라본 부산의 바다는 너무나 따뜻하고 너무나 황홀해서 그리운 사람이 생각나는 곳이었고, 위로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너는 지금 무슨 생각나? 전 남자 친구가 생각나지는 않고?"

친구가 내게 물었다. 글쎄, 나는 단지 이 바다가 아름답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 바다에 비치는 모습은 이상하게도 나 한 명뿐이었다. 가족 생각을 하던 친구와 다른 행보에 나 스스로 실망했지만 이내 괜찮아졌다. 이 곳에 와서 나는 나를 다시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 생각도 안나. 서울에서 부산으로 도망치듯 달려왔는데 지금 이 순간은 다시 평온해졌어. 전 남자 친구도, 지금 연락하고 있는 소개팅 상대도 생각나지 않아. 나는 이상하게 바다에 내 얼굴만 보이네. 근데 이렇게라도 내 모습이 보이는 게 너무 오랜만이기도 하고, 신기하다. 하하하하"


그리고 다시 바다를 바라봤다. 나는 회사가 있고, 전 남자 친구와의 추억이 있고, 시기와 질투가 넘치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남아있는 서울을 도망쳐 이 곳에 잠시 머무르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닌 것 같다. 나는 나 자신을 두고 멀리 도망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도망치고 싶었던 '나'라는 존재는 당시 자존감도 떨어져 있었고, 자신감도 없었고, 꿈도 꾸지 않고, 사랑을 그리는 것조차 귀찮아하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이 싫었는지 나 스스로를 내팽개쳐두고 나를 보지 못하는 곳으로 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랬던 내가 동백섬에서 바다를 바라보다 나를 발견했다. 다행이었다. 마치 모든 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나를 다시 찾은 느낌이랄까?


길지도, 짧지도 않았던 암흑기 같던 몇 년의 시간이 저 파도 위에 넘실거리는 것 같았다. 파도는 몇 번을 철썩이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다가 어느새 또 다른 파도가 내 눈 앞에 와 있었다. 그렇게 모든 시간은 흐르는 것이고, 상대방에게 미처 전하지 못했던 이야기나 기억하려 했던 장면들도 파도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리운 기억이 있다면 비록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더라도 이렇게 바다를 보며 한 번 더 되새겨볼 수 있으니 더 강렬하게 머릿속에 남겨둘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좋은 선배가 조언해줘도, 가장 친한 친구가 위로해줘도 나아지지 않던 마음속 어떤 짐의 무게가 덜어지는 순간을 마주하자 나는 그 날부터 부산의 바다를 사랑하게 됐다. 그 날의 바다는 나 자체의 존재를 가치 있게 만들어 줬고, 아프고 힘든 기억을 품고 있더라도 성숙한 어른이 될 수 있다는 용기를 줬다. 계획 없이 들른 부산에서 받은 인생 선물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일도, 인간관계도, 사랑도 내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걸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는 게 아쉬웠지만, 그 날 이후로 내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신선한 설렘을 느꼈던 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부산 숙소에서 토이의 "너의 바다에 머무네"를 지겹도록 들었다.

https://youtu.be/y0WP8GtzXK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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