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세월이 파도치고, 나는 어른이 되어 가는 중이었다.
과거 연인과의 이별은 지겨울 만큼 술자리의 단골 소재가 되었고, 그마저도 지쳐서 어느 날부턴가 주변 사람들과의 술자리보다는 여행이나 공연으로 내 시간을 가득 채웠던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힘든 나를 위로해주는 좋은 친구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고, 내가 무슨 일을 겪든지 항상 내 편이 되어주고 나를 응원해주는 가족이 있음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또 다른 큰 수확은 내가 앞으로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하는지에 대해 완벽하게 학습했다는 거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이어진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몇 번의 소개팅을 했고,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부담 없이 '기다림이 주는 설렘'을 받아들일 줄도 알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어느 10월, 친구와 계획 없이 KTX를 타고 부산에 갔다. 목요일 밤 친구와 카톡을 하다가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다는 대화를 했고, 친구와 나 모두 운전을 할 줄 몰랐던 터라 부산행 기차를 타기로 결정했다.
친절하게도 참 맑고 깨끗했던 그 날 부산의 날씨.
우리는 부산역에 도착하자마자 밀면을 사 먹고 곧바로 해운대에 갔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마주한 바다는 뭐랄까. 격렬한 감정 소비를 완벽하게 끝내고 쉴 곳을 찾아 헤매던 내게 누군가가 건네준 나침반과도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바다만 바라보고 쏟아지는 햇살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그 순간이 너무도 소중했다. 그러고 보니 동행했던 친구가 참 고마웠다. 내게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한참 동안 바다를 함께 바라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그 친구에게도 휴식이 필요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우리는 커피 한 잔씩 들고 동백섬을 걸었다. 경치는 말할 것도 없이 좋았고 바다가 더 가까이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바람이 솔솔 불고 시원한 아메리카노가 들어가니 그제야 나는 말문이 트였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와있는 걸까"
당시 우리 나이는 20대 후반. 그 친구도 나도, 각자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며 달려가던 중 앞을 내다보거나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 보니 내가 어떻게 하다가 이 자리에 왔으며, 어떤 기분으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나 스스로에 대해서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TV 토크쇼에나 나올 것 같은 질문을 나와 친구에게 각각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잠시 후 친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는데, 어쨌든 나는 지금 내 삶에 만족해. 내가 하고 싶은 일도 하고 있고, 원한다면 이렇게 갑자기 너랑 부산 여행을 올 수도 있을 만큼 내 시간도 가지고 있어. 그런데 하나 아쉬운 건... 아빠가 보고 싶어"
친구는 어릴 때 아빠가 돌아가셨던 터라 아빠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다고 늘 얘기했었다. 그래서 평소 아빠 얘길 꺼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던 어느 날 아빠 생각이 난다고 했다. 이전에 그 친구는 엄마, 오빠와 함께 치킨에 맥주를 먹으며 TV를 보다가 너무 웃겨서 체할 정도로 웃었다면서 그 날의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나와는 다르게 가족들과 살갑게 지내고 치맥과 TV만으로도 배가 아플 정도로 즐거워하는 친구가 꽤 부럽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나는 그 친구의 숨겨진 마음 한편에 잘 기억나지 않는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남겨져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친구는 아빠가 어디선가 딸을 지켜보고 있다면, 이 바다를 품에 안고 보고 계실 것 같다고 얘기했다. 그렇다. 그 정도로 그 날 우리가 바라본 부산의 바다는 너무나 따뜻하고 너무나 황홀해서 그리운 사람이 생각나는 곳이었고, 위로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너는 지금 무슨 생각나? 전 남자 친구가 생각나지는 않고?"
친구가 내게 물었다. 글쎄, 나는 단지 이 바다가 아름답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 바다에 비치는 모습은 이상하게도 나 한 명뿐이었다. 가족 생각을 하던 친구와 다른 행보에 나 스스로 실망했지만 이내 괜찮아졌다. 이 곳에 와서 나는 나를 다시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 생각도 안나. 서울에서 부산으로 도망치듯 달려왔는데 지금 이 순간은 다시 평온해졌어. 전 남자 친구도, 지금 연락하고 있는 소개팅 상대도 생각나지 않아. 나는 이상하게 바다에 내 얼굴만 보이네. 근데 이렇게라도 내 모습이 보이는 게 너무 오랜만이기도 하고, 신기하다. 하하하하"
그리고 다시 바다를 바라봤다. 나는 회사가 있고, 전 남자 친구와의 추억이 있고, 시기와 질투가 넘치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남아있는 서울을 도망쳐 이 곳에 잠시 머무르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닌 것 같다. 나는 나 자신을 두고 멀리 도망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도망치고 싶었던 '나'라는 존재는 당시 자존감도 떨어져 있었고, 자신감도 없었고, 꿈도 꾸지 않고, 사랑을 그리는 것조차 귀찮아하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이 싫었는지 나 스스로를 내팽개쳐두고 나를 보지 못하는 곳으로 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랬던 내가 동백섬에서 바다를 바라보다 나를 발견했다. 다행이었다. 마치 모든 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나를 다시 찾은 느낌이랄까?
길지도, 짧지도 않았던 암흑기 같던 몇 년의 시간이 저 파도 위에 넘실거리는 것 같았다. 파도는 몇 번을 철썩이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다가 어느새 또 다른 파도가 내 눈 앞에 와 있었다. 그렇게 모든 시간은 흐르는 것이고, 상대방에게 미처 전하지 못했던 이야기나 기억하려 했던 장면들도 파도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리운 기억이 있다면 비록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더라도 이렇게 바다를 보며 한 번 더 되새겨볼 수 있으니 더 강렬하게 머릿속에 남겨둘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좋은 선배가 조언해줘도, 가장 친한 친구가 위로해줘도 나아지지 않던 마음속 어떤 짐의 무게가 덜어지는 순간을 마주하자 나는 그 날부터 부산의 바다를 사랑하게 됐다. 그 날의 바다는 나 자체의 존재를 가치 있게 만들어 줬고, 아프고 힘든 기억을 품고 있더라도 성숙한 어른이 될 수 있다는 용기를 줬다. 계획 없이 들른 부산에서 받은 인생 선물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일도, 인간관계도, 사랑도 내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걸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는 게 아쉬웠지만, 그 날 이후로 내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신선한 설렘을 느꼈던 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부산 숙소에서 토이의 "너의 바다에 머무네"를 지겹도록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