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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 Jul 11. 2020

소개팅으로 인연을 만날 수 있을까

나는 스무살이 넘어서야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기쁨과 아픔을 처음 알게 되었고, 그래도 20대 젊은 시절 감정의 소용돌이는 내가 충분한 에너지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와 같이 느껴질 때가 많아서 시간이 조금 지나면 그 아픔이 잘 수그러들었다. 그랬기 때문인지 나는 숱한 아픈 감정을 느낀 이후에도 곧잘 다른 상대를 잘 만나왔다. 일종의 '갈아타기'가 제법 쉬웠던 모양이다. 


20대 후반, 친구들과의 약속과 여행 일정으로 주말을 빼곡하게 채웠던 어느 가을, 급작스러운 소개팅을 하게 됐다. 당시 친하게 지내던 언니의 회사 선배라고 했는데 당시 친구들과 함께하는 주말이 너무도 소중하여 소개팅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어쩐지 오랜만의 소개팅인 것 같기도 했고, 주선자 언니의 안목이 예전부터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던 나는 거절의 의사를 밝힌 지 10분 만에 대답을 번복했다. 


소개팅 당일은 내가 라식수술을 받은 지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병원에서는 당분간 눈 화장 금지를 요청했던 터라 쌍꺼풀 없는 맨 눈을 그대로 보여줘야 했고, 옷장에 몇 개 없던 원피스 중 하나는 그 날 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에 입을 수가 없어 검은색 스키니진을 입고 코엑스몰로 향했다. 


어쩐지 자존감이 낮아진 듯했지만 어차피 이 소개팅은 당시 내게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재미있는 대화도 하고 맛있는 저녁도 먹자는 마음으로 소개팅 당사자에게 전화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 오늘 만나기로 한 XXX이라고 합니다. 지금 어디 계신가요?"

"어! 안녕하세요! 서점 앞에 계시는 분 맞으시죠?"


목소리가 꽤 매력적이었다. TV에서 들었던 남궁민의 목소리와도 매우 흡사했다. 무엇보다 그는 주말인데도 정장을 입고 나타났다. (스키니진을 입고 나타난 것이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스마트해 보이는 안경을 쓰고 있었고, 밝은 표정으로 내게 인사하며 먹고 싶은 메뉴가 있냐고 물었다. 보통의 소개팅 자리에서는 파스타류를 먹으러 갔던 것 같아 파스타 좋아하시냐 물으려던 찰나.


"혹시 고기 좋아하세요? 삼겹살?"


이 신선한 질문은 뭐지?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강한 동의를 표현했다. 나는 사실 파스타나 피자류를 좋아하지 않는다. 소개팅 자리에서는 곧잘 먹지만 내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혹은 먹고싶어 하는 메뉴에 손꼽힌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도 처음 만나는 날, 어색한 꼴을 보이지 않고 가장 깔끔하게 먹기 편한 메뉴라는 생각에 제안하려 했는데, 반갑게도 그는 삼겹살을 외친다.!!! 


그와 나는 코엑스몰 바깥에 위치한 제주 흑돼지 집을 찾았다. 삼겹살 2인분과 콜라를 시켜두고, 고기가 익어가는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뭐가 그리 재미있었는지 혼자서 안경 뒤로 먼저 환한 웃음을 짓더니 내게 회사에 미친놈은 없냐고 물으며, 직장 이야기로 아이스 브레이킹을 유도했다. 


그가 선정한 적절한 토픽으로 인해 대화는 끊이지 않았고, 어느 순간 내가 회사에서의 내 위치나 행동에 대한 고민을 얘기하자 마치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선배처럼 그럴듯한 조언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낯을 많이 가리고 대화를 이어가는 것을 매우 불편해하며 조금이라도 마음이 불편하면 금방 체하고 위가 아파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건 보통의 소개팅에서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날, 나는 꽤 좋은 친구 혹은 오빠, 또는 선배를 만난 것 같은 기분으로 삼겹살과 콜라, 누룽지까지 완벽하게 클리어했다. 삼겹살 집에서의 대화만으로는 조금 아쉬웠는지 근처 커피빈으로 이동해 고기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회사 상사에 대한 이야기부터 영화나 음악에 대한 이야기까지. 내가 낯선 사람과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지루해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나간 적이 있었던가? 소개팅 후 집에 가는 내내 생각해봤지만 이런 경험은 분명 처음이었다. 


나는 꽤 정적이고 낯선 환경을 불편해 하는 성격 탓에, 소개팅으로 좋은 관계를 시작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해서 소개팅을 멀리하거나 혹시 소개팅을 하게 되더라도 상대방과 자연스러운 대화가 쉽지 않을거라는 선입견을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낯가리는 성격에 대한 자격지심도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역시 사람은 겪어봐야 하는 것이고, 일어나지 않은 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선입견은 언제나 선입견일 뿐이었다. 그는 소개팅 바로 다음 날, 그리고 그다음 날도 내게 연락을 해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만 같던 소개팅의 빛나는 결말이 내 옆에 가까이 와 있는 듯했다.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인연을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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