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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 Apr 25. 2020

그 날 이후 나는 프로야구와 연애했다

인스턴트 같은 사랑의 끝자락

정말 화창한 어느 봄 날이었다.

날씨가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따사로운 햇살은 나를 한껏 들뜨게 했고, 외출할 때마다 청바지에 회색 티를 고집하던 나는 그 날 따라 여리여리한 원피스를 입고 데이트에 나섰다.


그 당시 남자 친구는 어울리지 않게 갑자기 연극을 보자고 했다. "연극을 평소에 좋아했었어? 전혀 몰랐는데?" 놀란 듯한 나의 반응에 그는 "그냥, 갑자기 보고 싶어 졌어"라는 짧은 말만 남긴 채 내게 신도림 역에서 만나자고 했다.


신도림? 서울에 살면서 신도림역은 가 본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당시 나는 서울의 동쪽에 살고 있었고, 남자 친구는 남쪽에 살고 있었다. 그동안의 데이트 코스와도 너무 동떨어진 곳이라서 조금 놀랐다. 대학생 때 가끔 연극 보러 갔던 혜화역도 아니고 신도림이라니. '그래 신도림에서 하는 연극이 정말 너무나 보고 싶었나 보다, 그렇다면 조금 멀지만 내가 기꺼이 가 줄게! 날씨가 이렇게나 좋은데' 하면서 꽤 긴 시간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시간 동안, 나는 다음  데이트 코스를 찾아보고 있었다. 비록 팀은 달랐지만 서울을 연고로 하는 프로야구팀  팀을 각각 응원했던 터라 야구장가면 좋을  같았다. 개막전에 같이 다녀왔을   좋아했던  생각나서 얼른 예매에 나섰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전시회나 영화 스케줄은 어떻게 되는지 검색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연극 관람 이후 갈만한 신도림 맛집이 있을지 검색했다. 그렇게 많은 일을 마친 후에야 신도림역에 도착했다.


처음 간 장소여서 그랬는지, 한참을 헤매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멀끔하게 차려입은 그는 나를 보더니 어쩐 일로 원피스를 입었냐고 물었다. 이유 없이 입고 싶었다는 말에 그는 입꼬리만 살짝 올리며 웃어 보이고는 그 이후 앞만 보고 극장 앞으로 향했다. 뭔가 께름칙했지만 그냥 넘어갔다. 그저 그의 기분이 좋지 않은 줄로만 알았다.


연극 시작 시간에 맞춰 간신히 자리에 앉았다. 무슨 연극인지 전혀 정보를 모른 채로 들어왔는데, 이상하게 연극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옆자리에 앉은 그가 연극이 시작하고 나서부터 내내 다른 생각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고개는 앞을 향하고 있는데 눈은 초점을 잃은 듯했다. 옆에 앉아있었지만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그 이후부터 나는 갑자기 심장이 뛰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초조함이 느껴졌다. '이건... 뭐지?'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연극이 끝났다. 정말 단 한 장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우리는 말없이 극장을 나섰고, 그가 근처 파스타집에서 저녁을 먹자길래 신도림역 맛집 같은 건 잊은 채로 따라갔다. 별 다른 대화 없이 우리는 파스타를 먹었다. 그리고 집에 가자길래 지하철을 탔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대화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나를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아.. 알 것 같으니까 이제 어서 나에게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봐'하는 생각으로 그의 얼굴을 몇 번씩 올려다봤다. 그는 여전히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숨 막히는 시간이 이어졌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길이 너무나 멀었다. 그래, 내가 이 지하철을 타고 야구 예매도 하고 전시회도 찾아보고 신도림 맛집을 찾아보면서도 시간이 한참이 남았으니, 꽤 먼 거리였던 건 알고 있었지만 집으로 가는 길이 유난히 길게만 느껴졌다. 고요한 침묵, 지하철의 소음만 가득하던 어느 순간, 나는 갑자기 눈물이 났다.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큰일이었다. 콧물도 같이 흐르기 시작했다. 혼자서 그렇게 눈물 콧물 쏟으며 훌쩍이고 있는데도 그는 여전히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잠실역에 도착해서야 나는 숨 막히는 공간에서 나올 수 있었다. 얼굴은 이미 엉망이 된 상태였다. 그는 내 뒤를 쫓아오고 있었고,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던 나는 뒤를 돌아 지하철 플랫폼에서 소리쳤다. "야! 너 뭐야!"


그러자 그의 충혈된 눈에서도 갑자기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미안해"라고 대답한다. 아니 이게 뭐야. 너무 찌질하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아, 나 차였구나...'


그 와중에 이유가 궁금했나 보다. 이유를 따져 묻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는 계속 눈물을 흘리기만 했다. 그러다 내뱉는 말은 그저 "미안해" 뿐이었다.


누군가에게 차이는  처음이었던 나는, 감정 통제가  되지 않았다. 끝까지 나를 쳐다보지 않던 그를  이상  수가 없던 나는 잠실역에서 그를  뒤에 두고 뛰쳐나와 석촌호수를 빙빙 돌았다. 그렇게 한참을 도는데 날씨가 너무 좋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눈치 없게  원피스는 유난히도 찰랑댔다. 이제껏 데이트  제일 신경 써서 꾸미고 나온 날이었는데 완벽한 호구가  느낌이었다. 눈물은 30 간격으로 계속 흘렀고, 나중에는 분한 감정마저 들었다. 나는 결국 그를 소개해줬던 친구를 호출해 한참을   카페에서 하소연했다.


"나도 걔가 아주 다 좋았던 건 아닌데 왜 내가 차이는 거야?"

"아무런 신호도 없었어. 아무 일도 없었어. 어제까지도 웃으며 통화했는데 오늘 갑자기 이러는 거야. 무슨 일이지 이거?"

"아... 너무 억울해"


사랑이라는 감정에 배신을 느꼈다고 하기에 나는 그를 그렇게까지 사랑하지는 않았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었던 성향이 강했던 나는 그를 만나 조금은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남자 친구가 있기 때문에 주말에 무언가를 함께 할 수 있고, 연애를 하고 있다는 행위 자체에 대한 안정을 바랐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 날 나는, 슬프다는 말 보다 억울하다는 말을 더 많이 했고, 새벽까지 친구의 위로를 듣고 집에 들어가 간신히 잠을 청했다.


사랑하지도 않았다면서 나는 몇 번을 연락하고 찌질하게 매달렸다. (내 인생 최고의 호구스런 순간이었고 지금 생각해도 후회가 밀려온다.)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어쩌면 그가 돌아오는 것을 완벽히 바라는 게 아니었을지라도) 나는 나의 만족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던 것 같다. 어리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극한의 몸부림이었다.


참을 수 없던 며칠이 지났고, 핸드폰은 친절하게도 신도림역으로 가던 그 날 예매했던 프로야구 경기가 곧 시작된다는 알림을 줬다. 얄밉게도 그 날 역시 날씨가 참 좋았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 종합운동장역으로 갔다.


나는 햄버거와 과자, 맥주  캔을 사서 야구장에 들어갔다. 넓은 시야로  보이는 포수 뒷자리 구역  위층이었다. 자리를 잡고 햄버거를 반쯤 먹었을  경기가 시작됐다. 응원석과는 자리가 제법 떨어져 있어 굳이 일어나서 함께 응원에 동참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햄버거를  먹고 맥주를 들이키며 야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아빠가 야구를 좋아하셔서 TV 야구 중계를 보며 기본적인 룰을 습득하고 있던 나는 대학교  친구들과 갔던 야구장에서 응원팀을 정하고 가끔씩 시간이 나면 야구장에 가서 신나게 놀았었다. 그렇다 보니 웬만한 야구 관련 지식은 가지고 있었고 응원팀은 물론 상대팀 선수까지  많이 알고 있던 상태였다. 그렇게 야구를 접하게  이후 가장 집중해서 보게  경기가 바로  , 혼자서 야구장에 갔던 바로  날의 경기였다.


3시간 동안 말 한마디 없이 선수들의 플레이를 세심하게 관찰했고, 이닝이 끝나면 전광판의 광고를 맥없이 쳐다보거나 멀리 보이는 응원단상을 바라보며 아는 노래가 나오면 조용히 흥얼거리기도 했다.


 3시간은 정말 완벽했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차였다는 생각도, 이유가 뭘까 하는 궁금함도, 혼자 남겨진  같은 불안함도, 그리고 인스턴트 같던 모호한 추억들도 떠오르지 않았다. 함성소리와 응원소리, 공이 배트에 맞아 나가는 소리와 심판의 삼진콜만 들릴 뿐이었다.  머릿속에는, 투수가 다음어떤 구종을 던질까에 대한 궁금함 뿐이었다.


그렇게 완벽한 3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와 곧바로 잠을 청했다.


그 날 이후 나는 집에서도 (경기가 없는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야구 경기를 시청했다. 가끔은 야구장에도 갔다.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날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인스턴트 같은 사랑이 끝나고, 나는 프로야구와의 연애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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