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lie Apr 26. 2020

이별 후,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었다

아니면 또 다른 감정이었을 수도 있고

1.

나는 꽤 신중한 편이다.

어떤 일이든 시작하기 전에 너무 많은 돌다리를 두들기다가 결국 그 돌다리를 건너보지도 못했던 적이 수 없이 많다. 그게 내 감정과 관련된 상황이라면 정도가 더 심했다. 누군가에 대해 좋은 감정이 생겼을 때, 나는 내 마음이 진심인가를 (알 수 없는 나만의 방법으로) 수 차례 확인해보곤 했다. 물론, 그에 대한 정답은 없다. 심판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너의 감정은 정답이다. 어서 너의 마음을 고백해라"라고 말해주지 않는 한, 나는 절대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먼저 전해본 적도, 고민해 본 적도 없었다. 치밀한 건지 미련한 건지 모를 정도로 철저한 편이다.


2.

20대의 어느 날, 나는 복잡하고도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상대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내 주변에 몇 안 되는 따뜻한 오빠였다.

그의 눈빛은 매우 따뜻했고, 말투는 자상했다. 그와 나누는 대화는 재미있기도 했고 유머 코드가 좀 맞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는 여러 가지 면에서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다. 책을 자주 읽어서인지 글을 잘 쓰고 감성은 충만했다. 당시 싸이월드 감성보다는 좀 더 고급스러웠다. 담백하면서도 마음을 움직이는 짧은 문장을 여럿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매우 잘생겼다.


그럼에도 그 오빠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어쩌면 나보다 더 괜찮은 상대를 만나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일찍부터 선을 그었던 것 같다. (실제로 나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을 만났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선이 생겼던 모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전 남자 친구와의 이별의 여운이 강하게 남아돌던 어느 여름날, 그 따뜻한 오빠란 사람이 왜 불현듯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그 시기에 나는 굉장한 외로움에 지쳐있었다. 이별의 과정도 너무 힘들었고 또 이별 후에 느낀 후유증은 이 전의 이별과는 매우 달라, 마치 감기약을 먹고도 열이 떨어지지 않는 것 같은, 답답한데 출구를 모르겠다 싶은, 처음 겪어보는 고통을 맞이하는 시기였다. 그 어려움을 나는 줄곧 친구들과 함께 술로 이겨내려 했었고, 어느 날은 회식 자리에서 필름이 끊길 듯 말 듯 외줄 타기 하는 나를 간신히 부축하고 택시를 태워줬던 따뜻한 오빠의 어깨에 기대어 올림픽대로를 달렸음에도 그는 나에게 진지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나 왜 불현듯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무작정 문자를 보냈다.

"우리 저녁 먹자"


두 시간 후쯤, 어렵지 않게 바로 만나 저녁 식사를 하고 한강을 갔다. 그리고 그 순간, 이제껏 살아오며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고민을 시작했다. '내 마음을 표현해봐야 하는 순간인가?' 어떻게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당시에도 믿기지가 않았다. 감정 프로세스의 오류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에도 고민은 이어졌다.


이럴 땐, 여우 같은 여자애들이 참 부러웠다. 겉으로는 재수 없다며 뒷담화 한 적도 여러 번이었던, 말주변도 있고 마음을 표현하는 것 같으면서도 털털한 것 같으면서도 긴가민가 상대를 헷갈리게 만들 것만 같은 여자 친구들이 생각났다. 어설프게 따라 해 봐야 괜한 웃음거리만 될 것 같아서 나는 그저 평소처럼 무덤덤하게 얘기하고 보일 듯 말듯한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날의 한강 수다는 새벽까지 이어졌고, 긴 시간 동안 수 없이 고민하다가 결국은 고민을 접어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그 날 새벽 잠들기 전, 내 선택에 대해 굉장히 만족했었다. 상대가 나에게 마음이 있다는 확신이 전혀 없는데 내가 지금 외롭고 힘들고 무엇인가에 의지하고 싶다는 얕은 이기심에 내 주변 가장 괜찮은 오빠에게 애틋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각인지 위안인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그러했다.


3.

그 이후, 어느 날은 친한 언니를 만났다. 내 연애사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는 가장 친한 언니이자 친구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우리의 사랑에 대해 맥락 없는 토론이 이어졌다. 그리고 나는, 따뜻한 오빠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사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잘 모르겠어! 한 번 잘 들어봐-"


그렇게, 따뜻한 오빠와 관련된 아주 사소한 에피소드부터 지난 여름날 저녁식사와 한강 수다까지 자세히 들려줬다. 내 감정을 모르겠어서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지만, 결국은 그게 잘한 것 같다며 슬쩍 그 언니의 반응을 떠보기도 했다. 돌아오는 언니의 반응은 의외였다. "그 사람은 왜 너한테 아무런 표현을 안 해?"


제삼자의 시선에서는 그가 나에게 관심이 있어 따뜻하게 대했을 것이라는 해석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곧바로 그는 원래 누구에게나 따뜻하며 누구와도 그렇게 잘 어울린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또다시 그 언니는 나에게 물었다. "그 사람은 왜 항상 니 주변에 있는 거야? 누구든지 갑자기 만나자고 하면 2시간 만에 차를 끌고 와서 밥도 먹고 한강도 가는 거야?"


원래 여자들의 대화라는 게 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가령, "그 사람이랑 잘해봐" 라던지, "그 사람이 너한테 관심 있는 것 같아" 같은 대화를 하는 건 꽤나 유치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날 가장 친한 언니와의 대화가 딱 그랬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지 않아 곧바로 대화 주제를 회사 상사 얘기로 바꿨다. 그렇게 한참을 얘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따뜻한 오빠라는 사람의 행동을 하나씩 떠올려보기로 했다.


그는 나에게 매우 따뜻했던 건 분명했다.

동네가 가까워 내가 회사 회식자리에서 술에 잔뜩 취한 날이면 집 근처까지 항상 데려다줬다.

내가 상사에게 괴롭힘을 당하면 슬쩍 와서 분위기를 바꿔주곤 했다.

생일을 잊지 않고 축하해줬고 주변 다른 이들에게 내 생일 축하를 강요하기도 했다.

남자 친구와 헤어졌던 시점엔 따뜻하게 위로해줬다.

그리고 어느 여름날, 나의 연락에 부리나케 달려 나와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외에 그 어떤 적극적인 행동은 없었다. (예를 들면, 먼저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든지, 주말에 따로 식사를 하자고 하든지 뭐 이런 거)

그리고, 나와 알고 지내던 중간에 다른 (예쁜) 여자 친구를 만났었다.


그 날의 결론도 역시, 그는 나에게 따뜻한 오빠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4.

시간이 꽤 흘렀다.

어느 추웠던 겨울, 한 동안 연락하고 지내지 않았던 따뜻한 오빠 생각이 났다. 내가 회사를 옮기면서 자연스럽게 자주 보지 못하던 시점이었다.


신입사원 시절, 그 당시 남자 친구와 전화로 크게 싸우고 헤어지던 날, 따뜻한 오빠는 펑펑 울던 나를 위로해주며 새벽 3시까지 술과 커피로 쓰린 속을 달래던(?) 적이 있었다. 집에 가던 길, 술기운이 아직 남아 비틀거리면서도 춥다며 벌벌 떠는 나를 붙잡고 본인의 코트를 한 겹 더 입혀주던 상황이 스쳐 지나갔다. 그 당시 별로 친하지 않았던 사이였는데 나는 따뜻한 그의 품 안에서 펑펑 울 수 있었고, 새벽까지 술기운에 취해 있다 보니 상대방이 듣기에 황당할 법도 한 얘기들을 건넬 수도 있었다.

그런 시간을 보냈음에도 생각보다 가까운 사이가 되진 못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아마도 나는 그때부터 그 따뜻한 오빠를 내심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너무 조심스러웠던 나머지 그에게 '친한 척' 하며 다가가는 것조차 쓸데없이 신중했었던 모양이다. '아, 도대체 나는 이런 상태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표현하며 살 수나 있을까' 싶었다. 신중함이라고 표현했던 것이 어쩌면 상대에게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나를 보호하려던 최소한의 장치였을 수도 있다. (사랑의 상처에 대한 트라우마를 심어준 예전 남자 친구들에 대한 원망도 잠시 이어졌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보호하기만 하다가 제대로 된 감정도 모르는 채 수년을 지내왔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가 안쓰럽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아낌없이 사랑을 표현해주는 좋은 남자 친구를 만나 기분 좋은 연애를 시작했을 시기였다는 것이다. 내 모습이 안쓰러웠던 것도 잠시, 이제부터는 나도 상대방에게 더 많이 표현하고 더 많이 웃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니 이런 게 조금 더 성숙한 관계를 형성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됐으리라 생각했다.

 

5.

그리고 그즈음, 아주 오랜만에 따뜻한 오빠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그렇게 먼저 연락이 온 건 처음이었다. 얼굴을 본지도 꽤 시간이 흐른 듯했다. 그렇게 오랜만이었던 것 치고 그는 뜬금없이 물었다. "전어 먹으러 갈래?"

내 카톡 프로필 메시지에 "가을 전어"라고 쓴 멘트를 보고 인사 겸 던진 말 같았다. 오랜만이기도 하고, 좋은 추억을 많이 가지고 있던 상대였기에 당장이라도 전어를 먹으러 가고 싶었지만, 어쩐지 남자 친구가 마음에 걸렸다. "시간이 좀 늦었으니 우리 다음에 가자"라고 대답했지만 그는 평소 같지 않게 단호했다. "아니야, 오늘 밤에 꼭 먹으러 가자" 이전에 알고 지냈던 그의 성향과는 너무나 달라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다. 먼저 밥을 먹자고 한 적도 없었고, 그렇다 보니 꼭 오늘 밤을 단정지은 적도 당연히 없었다. 만나야만 할 것 같은 이유가 분명해 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나가면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남자 친구를 배신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를 들어 약속을 미루기로 했다. "나 요즘 밤 10시면 집에 들어가고 있어..."


그렇게 전어에 대한 카톡 대화를 마무리했고, 그 이후 따뜻한 오빠에게서 먼저 연락이 오진 않았다.


꼭 그날 밤 전어를 먹었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는지는 지금도 매우 궁금하다. 그래도 나와 친했던 언니가 물었던 "그 사람은 왜 너한테 아무런 표현을 안 해?"라는 질문에 이런 카톡 대화가 나중에 있었다고 대답할 수는 있을 것도 같았다. 그의 의미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나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저녁 먹자고 갑자기 물어봤던, 너무도 외로웠던 어느 여름날과 비슷한 감정이었기를 바라며.



작가의 이전글 그 날 이후 나는 프로야구와 연애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