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간다
메신저로 싸우다가 메신저로 전했던 이별 통보.
철이 없었던 20대 중반 어느 날.
그와 나는 그간의 서운했던 감정을 날 것 그대로 서로에게 전하며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고 보여주지 않아도 될 치부를 보였었다. 2년간의 연애가 이렇게 끝난다는 게 허무하기도 했다가 화가 나기도 했다가 또 억울해서 잠도 못 자다가 헤어지던 날의 어리석은 단어 선택에 대해 이불킥을 하기도 했던 날을 보낸 지 6개월이 됐을 무렵. 나는 그를 다시 만났다.
헤어진 연인이 다시 만난다는 얘길 들으면. 열에 아홉은 보통 이렇게 얘길 한다.
"결국 똑같은 이유로 헤어질 거야"
나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도 결국 똑같은 지점에서 서로 서운해하겠지. 하지만 그 이유가 똑같다고 해서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관계를 계속 이어나갈 자신은 없었지만 6개월이 지난 그 시점, 나는 그를 굉장히 다시 만나고 싶었고 그의 따뜻한 품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다시 만나자는 얘기를 나눈 그날의 통화는 마치 허무하게 헤어지던 어느 날처럼 뭔가 대화의 패턴이 허술했다. 익히 잘 알고 있는 "잘 지내?"로 시작하는 전 남친의 연락. 시작은 그럴듯했으나 갑자기 또 어느 순간 서운함이 몰려왔는지 서로 힘들고 서운했던 순간을 얘기하다가, 그래도 6개월 동안 끊어졌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느냐고 용기 내어 묻고 답했다. 고작 6개월밖에 지나지 않아서였는지 서로를 생판 모르는 남으로 여기지 않았던 이유로 우리는 만나서 그간의 이야기를 다시 해보기로 했다.
그 당시 나는 그와 헤어진 후 그다지 잘 살고 있진 않았다. 이별 노래를 자주 들었고,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을 여러 차례 돌려봤다. 친구들과의 약속이 별로 재미가 없었고 퇴근 시간이 되면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싶은데 마땅히 전화할 사람이 없어서 핸드폰 통화 목록만 한참을 지켜보다 집에 도착했었다. 그와 헤어질 때 분명 그가 미치도록 밉고 그와의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이 죽도록 힘들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를 만나기로 했다. 심지어 결말이 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이 미묘한 끌림은 설명이 잘 되지 않았다. 당시 가장 친했던 회사 동료는 다시 시작하는 이 만남에 대해 긍정적으로 호응했다. 결말을 다 알고 있다고 해도 지금 만나고 싶은 그 감정을 왜 참아야 하는지에 대한 매우 상식적인 접근이었다. 그렇다. 지금 당장 그가 보고 싶고 그에게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물어보고 싶은데 단지 헤어진 연인이기 때문에 그 만남을 주저한다는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어느 순간 과거와 똑같은 이유로 헤어지더라도 나는 당장 그를 만나고 손을 잡고 맥주를 마시고 같이 한강을 걷고 싶었다. 그를 만나는 이유는 단지 이것 하나뿐이었다. 다시 만난다고 해서 미래를 약속하거나 순정을 바라거나 성숙한 사랑을 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금요일 퇴근길, 그를 만나기로 한 을지로입구역 부근 맥주집으로 가는 길에 늘 듣던 재생목록을 열었더니 마침 윤종신의 <너에게 간다>가 흘러나온다.
"너의 갑작스런 통화 속에 침착할 수 없었던
내 어설펐던 태연함 속엔
하고픈 말 뒤섞인 채 보고 싶단 말도 못 하고
반가움 억누르던 나 너를 향한다"
유난히 귀에 맴도는 가사를 듣다보니 애써 반갑지 않은 척 쿨한 척 통화를 마쳤던 것이 생각났다.
나는 늘 그랬다.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힘들지 않았던 척...
어쩌면 너무나 기다렸던 그와의 통화였기 때문에 감정이 새어 나올 틈이 없었던 건가 싶기도 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저 내가 가지고 있던 일종의 '아닌 척' 병이 다시 도졌다.
이번엔 좀 달라져볼까. 맥주집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가 보이면 반가운 모습 그대로 환하게 웃어볼까. 자리에 앉으면 사실은 보고 싶었다고 얘기해볼까.
머릿속은 혼란스러워졌고 그 사이 나는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어두컴컴한 실내를 들여다보니 한눈에 그가 보였다. 그리고 그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 순간 마음을 다잡았다.
됐다. 나도 웃자. 반갑다고, 보고 싶었다고 얘기하자.
누구나 예상하는 그런 결말이 다가오더라도 내게 그 만남은 꼭 필요한 순간이었다. 힘들었던 6개월을 잠시나마 보상받을 수 있던 순간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