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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미석 Sep 27. 2015

이탈리아, 이탈리아!

슈테델 미술관(Städel Museum).

0 나의 이탈리아, 그의 이탈리아.    


 미술관 문이 열리자마자 들어가 가장 먼저 표를 사고 겅중겅중 계단을 두 개씩 밟아 1층(우리나라 건물의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 끄트머리에 서자 벌써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옛 로마의 유적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는 그의 모습이...

 독일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았기에 여행을 준비하면서도 무얼 꼭 해야겠다든가 어딜 꼭 가야겠다든가 하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 와중에 단 한 가지 바람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프랑크푸르트(Frankfurt)의 슈테델 미술관에서 ‘캄파냐 지방의 괴테’(요한 하인리히 빌헬름 티슈바인, Goethe in der Campagna/ Goethe in the Campagna, 1787)를 보는 것이었다.

 독일 여행을 하면서 가장 많이 만나게 되는 인물이 아마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 ~ 1832)이지 않을까 싶다. 독일 어느 도시를 가든 괴테의 이름이 붙은 거리는 가장 번화가에 있다. 괴테와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는 도시에서는 비석과 동상으로 그 장소를 기념한다. 독일인들에게 물었을 때 호불호가 갈리지 않았던 예술가는 괴테가 유일했다. 독일은 그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한다. 독일인들만큼 열렬히는 아닐지라도 나 역시 괴테를 좋아한다.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목소리를 빌려 가슴 시린 사랑의 기억 한 조각을  우리에게 들려줬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가슴 아픔 사랑을 해보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한창 감수성이 풍부한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루지 못한 첫사랑에 가슴 아파하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몇 번이고 읽었는지 모른다.

 보통 괴테를 작가로만 알고 있지만 실상 그는 관료이자 과학자이기도 했고 또한 호기심 많은 여행자였다. 바이마르(Weimar) 공국의 재상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가길 십여 년, 괴테는 예술가로서의 칼이 무뎌졌다고 생각했던지 57세의 생일 불현 듯 이탈리아로 떠나 1년 9개월을 이탈리아에 체류한다. 당시는 유럽 상류층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랜드 투어’가 유행하던 때였다. 그들은 주로 유럽 문화의 모태이자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의 이탈리아 여행기를 들으며 자랐던 괴테 역시 이탈리아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57세의 괴테를 청년으로 되돌려놓았다. 로마에 도착한 괴테는 이런 말을 남긴다.

 “정말이지 지난 몇 년 동안은 마치 병이 든 것 같았고, 그것을 고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이곳을 내 눈으로 직접 바라보며 이곳에서 지내는 것뿐이었다.”(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괴테 지음, 박영구 옮김, 푸른숲, 1998, pp.160)

 아마도 그 이후 많은 젊은이들이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기를 읽고 이탈리아를 방문했으리라. 내 첫 번째 배낭여행의 목적지가 이탈리아였던 것도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덕분이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괴테는 15년을 묵혀두었던 ‘파우스트’의 원고를 다시 집어들었고, 나는 다니던 회사를 집어 던지고 계속해서 방랑을 하고 있다는 점은 다르지만... 하지만 그 이탈리아 여행 이후로 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고자 다짐했고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게 살고 있으니 괴테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티슈바인, 캄파냐 지방의 괴테, 1787


 캄파니아 지방은 나폴리를 주도로 하는 이탈리아 남부의 행정구역이다. 폼페이와 베수비오 화산이 있고, 보석처럼 반짝이는 지중해가 여행자를 유혹하는 곳이다. 그림 속 괴테의 뒤편으로 로마 시대의 유적이 보인다. 괴테가 입고 있는 망토가 로마 시대에 성인 남자가 입던 토가와 비슷해서 유적과 꽤 잘 어울린다. 화가 티슈바인(Johann Heinrich Wilhelm Tischbein, 1751 ~ 1828)은 실제로 괴테와 함께 캄파니아 지방을 여행했다. 화가가 남긴 친구 괴테의 모습은 괴테의 가장 유명한 전신화이자 본인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후세에 남았다.


'캄파냐 지방의 괴테'는 미술관의 가장 첫 번째 전시실 정중앙에 걸려있다.

 ‘캄파냐 지방의 괴테’ 앞에는 매우 편한 소파가 놓여 있다. 그림 속의 괴테와 마찬가지로 비스듬히 소파에 기대어 그림을 감상했다. 슈테델 미술관이 루브르 박물관이나 우피치 미술관처럼 이른 시간부터 북적이는 곳이 아니라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시간동안 기다려왔던 순간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롯이 작품과 대면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 그림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구나?”

 하얀 셔츠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할아버지 직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네, 이 그림을 매일 볼 수 있는 미술관 직원들이 부러울 정도로요!”

 할아버지는 찡긋 윙크를 하며 대답하셨다.

 “고맙구나! 괴테는 우리 독일의 자랑이지!”

 정말이지 독일인들의 괴테 사랑은 못 말린다.


1 르네상스의 여신.


보티첼리, 이상적인 여인상, 1480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워 나도 모르게 “웬일이야!”라고 큰 소리를 내는 바람에 미술관 직원으로부터 주의를 들었다. 그 정도로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가봤던 독일 미술관에서 만난 이탈리아 화가들의 작품은 거의 대부분이 종교 제단화였고 혹은 내가 잘 모르는 화가의 작품이었다. 그런데 여기 슈테델 미술관에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르네상스의 꽃 이탈리아 피렌체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불꽃 중 하나인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년경 ~ 1510)의 작품이 있다니!

 보티첼리하면 우피치 미술관의 ‘봄’과 ‘비너스의 탄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에서 열흘간 피렌체에 머무르며 1년 회원권을 끊어 매일 우피치 미술관에 출근(?)했다. 그렇게 사흘 정도 지났을까. 그 날도 어김없이 개관 전에 가서 예약 줄에 서 있는데 직원이 날 불러냈다. 미술품에 손 댄 적도 없고 사진 촬영을 한 적도 없는데 지난 사흘간 뭔가 잘못한 것이 있는 건가 마음 졸이며 다가갔다. 개관 15분여를 남겨 놓은 시간, 입장을 기다리는 줄은 한없이 길어지는데 직원은 나만을 위해 문을 열어줬다.(나중엔 몇몇 직원들과는 인사하는 사이가 됐다.) 몇 번이고 “그라찌에!”(Grazie)를 반복하며 서둘러 2층(우리나라 건물의 3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우피치 미술관은 애초에 메디치가의 궁전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천장이 매우 높다. 또한 과거에 미술관 옆을 흐르는 아르노 강(Arno)이 범람한 적이 있어서 전시가 2층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나라 3층 높이라고는 하지만 거의 5층에 가까운 높이를 쏜살같이 뛰어 올라갔다. 보티첼리의 작품이 어디 있는지는 눈 감고도 찾을 수 있었다. 워낙에 아침부터 사람이 물밀 듯이 들어오는 우피치 미술관이다. 아무리 일찍 와서 기다렸다 해도 단 한 사람이 전시실을 독점하는 것은 대관을 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 불가능한 일이 현실이 되었다. 고요함 속에서 ‘봄’과 ‘비너스의 탄생’을 마주했던 그 순간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슈테델에서 만난 보티첼리의 그림 한 점으로 피렌체에서의 행복한 기억이 떠올랐다. 다시 슈테델로 돌아와 그림 속 여인을 자세히 관찰한다. 그림의 제목은 ‘이상적인 여인상’(Weibliches Idealbildnis/ Idealized portrait of a Lady, 1480)이다. 그리고 괄호 안에 원제보다 더 긴 추측성 제목(?)이 달려있다. ‘님프로 표현된 시모네타 베스푸치의 초상화’(Portrait of Simonetta Vespucci as a Nymph)란다. 시모네타 베스푸치가 누군인가. 그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추앙받던 사람이 아닌가. 그녀는 이탈리아 북부 제노바에서 귀족의 딸로 태어나 열다섯 되던 해에 피렌체의 베스푸치 가문으로 시집을 왔다. 하지만 미인박명이라고 스물 두 살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만을 남기고 떠난 그녀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보티첼리에게도 마찬가지여서 ‘봄’과 ‘비너스의 탄생’을 비롯한 많은 작품에서 그녀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보티첼리에게 그녀야말로 ‘나만의 비너스’였을 것이다. 보티첼리의 그림을 통해 시대를 뛰어넘어 미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시모네타 베스푸치. 자신을 후원해주는 가문의 새댁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보티첼리였지만 결국엔 본인의 재능을 통해 그녀에게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은 셈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슈테델 미술관     


개관 시간 : 화 ~ 일 10:00 ~ 18:00(목, 금 ~21:00), 월요일 휴관

입장료 : 14유로

비고 : 프랑크푸르트 뮤지엄 카드 18유로(이틀 동안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미술관, 박물관 34곳에서 유효, 슈테델 미술관을 포함해 두 곳 이상의 미술관, 박물관을 방문할 경우 개별 발권하는 것보다 경제적.), 관내 와이파이 사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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