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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미석 Sep 25. 2015

사람의 얼굴.

발라프-리하르츠 미술관(Wallraf-Richartz Museum).

0 비 오는 쾰른(Köln)   


 독일 날씨가 지랄 맞다는 건 여행을 준비할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던 터였다. 그래도 여행 초반, 독일 북부에 머물 때만 하더라도 서너 번의 소나기 외에는 계속 화창한 날이 이어져 악명 높은 독일 날씨지만 그래도 여름엔 괜찮은가보다 했더랬다. 하지만 웬걸, 그건 그저 날씨운이 엄청나게 좋았을 따름이었다. 사흘 연속으로 비가 내리는 쾰른은 음산하기 그지없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이자 쾰른의 상징인 대성당의 가고일(Gargoyle)들은 당장이라도 무겁게 내려앉은 구름을 뚫고 빗줄기 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고 뾰족하게 솟은 첨탑은 웅장하다기보다는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여행지에서 우울한 날씨에 축 쳐질 땐 더욱더 미술관과 박물관이 고맙다. 다행히도 쾰른에는 다양한 범주의 미술관과 박물관이 많다. 로마 – 게르만 박물관(Römisch-Germanisches Museum, 쾰른이란 이름 자체가 라틴어인 ‘콜로니아(colonia)’에서 유래하며 식민지란 뜻이다. 쾰른은 로마의 라인 강 방어기지 중 하나로 건설된 식민도시이다.), 루트비히 미술관(Museum Ludwig, 현대 미술 위주), 발라프-리하르츠 미술관, 초콜릿 박물관(Schokoladenmuseum), 독일 스포츠 & 올림픽 박물관((Deutsches Sport & Olympia Museum), 향수 박물관(Duftmuseum) 등등... 그야말로 골라보는 재미가 있는 도시가 쾰른이다.      


1 노인의 얼굴


전시실 입구 양 옆에 발라프와 리하르츠의 흉상이 놓여있다.


 비를 뚫고 온 보람이 있었다. 발라프 – 리하르츠 미술관에는 13세기부터 20세기까지를 아우르는 작품들이 전시실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미술관은 1827년에 문을 열었다. 미술관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방대한 양의 개인 컬렉션을 기증한 학자 페르디난트 프란츠 발라프와 미술관 확장을 위해 거액을 기부한 상인 하인리히 리하르츠를 기리기 위해 발라프 – 리하르츠 미술관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전시실로 입구에는 그들의 흉상이 놓여있다.

 내가 누르는 셔터 소리에 깜짝 놀랄 정도로 한적한 전시실에서는 밖에 비바람이 몰아치든 해가 쨍쨍하든 오롯이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중세의 이름 없는 마이스터(Meister)의 작품을 지나자 루벤스, 반 다이크, 부셰 등 익숙한 이름들이 나타나 반가웠다. 그리고 전시실 한 구석,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는 작은 그림. 말년의 렘브란트가 나를 향해 장난스러운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렘브란트, 자화상, 1669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 ~ 1669)는 17세기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거장이다. 그는 유독 자화상을 많이 그린 작가로 알려져 있다. 나 역시 런던과 파리에서 이미 그의 자화상을 접한 바 있다. 그래도 유독 발라프 – 리하르츠 미술관에 있는 자화상에 눈이 가는 것은 이 그림이 그려졌던 시기 렘브란트가 처했던 상황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훌륭한 작품을 남겼지만 가난한 삶을 살다간 화가가 있는가하면 렘브란트는 이미 살아 있을 때 대가로서 인정받고 부와 명예를 누렸던 화가 중 하나이다. 하지만 절제 없이 허영을 추구한 결과 당시 유럽에서 손꼽히는 부자 도시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비싼 그림 값을 받는 화가였지만 결국 1656년 파산에 이른다. 설상가상으로 그 이후로 아들을 비롯한 주변인들의 죽음까지 연달아 겪게 된다. 하지만 시련 앞에도 그의 창작욕은 꺾이지 않았나 보다. 화가는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았고 이 그림은 세상을 떠난 해인 1669년에 그려졌다.(발라프 – 리하르츠 미술관의 그림 정보에는 작품 제작년도가 1662년 혹은 63년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다수의 자료들이 1669년을 따르고 있다.) 작품의 표면은 매우 거칠어 환갑을 넘긴 렘브란트의 주름살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그것 인 냥 느껴질 정도였다. 거의 없는 이를 드러내고 웃는 그의 표정은 ‘그래도 인생 꽤 재밌게 살다가네!’라고 말하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던 붓! 어두운 배경에 잘 안 보이긴 하지만 화가의 오른손에는 분명히 붓이 들려있다.(나중에 알아보니 ‘말스틱(mahlstick)’이라는 미술 용구였다.) 젊은 시절 자화상의 자신감과 당당함도 좋지만 유쾌하고 재기 넘치는 이 모습이야말로 렘브란트가 마지막까지 잃지 않았던 진짜 모습이지 않을까.

 ‘렘브란트 씨, 당신 참 잘 살다 가셨어요.’     


2 아이의 얼굴


요한 에르트만 후멜, 화가 고트 프라이드 브뤼케의 아들인 에른스트 브뤼케, 1823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의 얼굴을 보고 왔기 때문일까. 발갛게 상기된 두 볼에 금발 곱슬머리의 소녀가 한층 더 생기 넘치게 느껴졌다. 어쩜 이토록 사랑스러운지! 성급하게 화가의 딸이 아닐까 추측해봤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화가의 이름도 익숙지 않은데 놀라운 것은 이 그림의 주인공이 남자 아이라는 사실! 화가인 요한 에르트만 후멜(Johann Erdmann Hummel, 1769 ~ 1852)은 카셀(Kassel)에서 태어나 그림을 배웠고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Akademie der Künste)의 교수로 재직하며 원근법, 광학(光學)을 강의했다고 한다. 그의 화풍은 지나치게 과학적이고 사실적이라고 하는데 재미있게도 이 그림의 주인공은 훗날 생리학자가 되는 에른스트 브뤼케(Ernst Wilhelm von Brücke, 1819 ~ 1892)이다. 프로이드가 대학 시절 브뤼케의 실험실에서 일했고 평생에 걸쳐 존경하는 사람으로 꼽았던 저명한 학자이다. 똘망똘망한 눈망울이 아이가 미래에 무슨 직업을 갖게 될지 말해주는 것만 같다. 브뤼케의 아빠 역시 화가였다. 후멜과는 베를린에서 만나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맺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처음에 그림의 주인공을 화가의 딸이라고 착각했던 이유가 그림 가득 사랑이 넘쳐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아이가 아닌 남의 아이를 이렇게 그릴 수 있으려면 그만큼 자주 만나고 아이와 정을 쌓아야 한다. 화가가 아이를 바라보고 아이 역시 화가를 바라본다. 화가와 피사체가 서로를 바라보는 공간 가득 사랑이 넘쳐흘렀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비바람이 몰아쳤던 쾰른에서의 마지막 날, 그 으스스한 기운을 떨쳐버릴 수 있을 정도로 내 마음 역시 따뜻해졌다.      



발라프 – 리하르츠 미술관     


개관 시간 : 화 ~ 일 10:00 ~ 18:00(목 ~21:00), 월요일 휴관

입장료 : 8유로

비고 : 쾰른 뮤지엄 카드 18유로(이틀 동안 쾰른 시내의 모든 미술관, 박물관에서 유효하며 개시 당일은 공공 교통수단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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