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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Jan 24. 2024

美로

무결점 광채 피부로 가는 길

“너 그러나 한방에 훅 간다. 얼굴에 뭐 좀 발라.”

“계속 기술이 좋아지고 있으니까, 나중에 한방에 해결하면 돼요.”

사랑이를 가진 후, 수년간 시어머니는 거의 경고 수준으로 내게 피부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피부 관리와 담을 쌓은 내가 안타까워서인지, 그녀 자신의 젊음에 대한 향수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당시 나는 혁명적인 기술이 한 번에 해결해 줄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고, 시어머니로부터 받은 고가의 화장품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유통기한이 지나 버려졌다.       

  

엄마가 되기 전에는 full-makeup과 완벽한 hair-setting 없이는 집 앞 편의점에도 가지 않았다. 그러나 뱃속에 사랑이를 품게 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나도 몰랐던 모성 본능이 깨어나, 내가 바르는 화장품의 화학 물질이 뱃속의 사랑이에게 스며들지 않을까 걱정되었고, 아이에게 해를 끼칠까 염려되어 스킨로션을 바르지 않게 되었다. 처음에는 얼굴이 땅기고 불편했지만, 금새 익숙해졌다. 사랑이가 태어난 후에는 아이를 돌보는 데만 집중하느라, 스킨로션을 바를 생각도 하지 못했다.




6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현실을 마주했다. 얼굴에는 주름이 깊게 파였고, 군데군데 낯선 점들이 생겼다. 눈꼬리 밑에는 기미가 옅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모공은 5배는 넓어진 듯했다.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충격적 노화의 흔적이었다. 다급하게 세월의 흔적을 되돌리기 위한 값비싼 묘약(화려한 명성의 화장품과 자외선 차단제)을 구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월의 흔적을 되돌리는 마법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기, ○○은행 계좌 열어봐. 앞자리가 바뀌었을걸?”

친구들과 밥이나 먹으라고 돈 좀 보내고는 허세가 하늘을 찌른다. 그런데 웬걸, 정말 앞자리가 바뀐게 아닌가. 

“옴마나! 이게 얼마야? 혹시 더 있음 좀 더 줘봐.”

“같이 제주도 가려고 모은 건데, 다른 데 쓰지 말고 꼭 피부과 가.

내 얼굴이 그토록 못 봐줄 정도였던걸까? 피부 관리에 전혀 관심이 없던 그가, 갑자기 내 피부의 후원자가 된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다. 그렇게 가족 여행을 위해 힘들게 모아 왔던 긴급 자금은 궁지에 몰린 내 피부를 위해 희생되었다. 피부 관리에 큰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처음이라 정당성과 합리성을 계속 의심했지만, 때마침 오픈 기념 할인 행사가 있기도 했고, 피부 관리에 쓰지 않으면 남편이 비상금을 되찾아 갈 것 같은 생각에, 반강제적으로 피부과로 향했다.    

   


피부과에 들어서자마자 세련된 분위기와 완벽한 청결함, 예상치 못한 화려함에 놀랐다. 이런 공간이라면 美에 도달하는 길고 고된 여정을, 너그럽고 즐거운 여행으로 바꾸어 줄 것 같았다. 카운터 뒤에 있던 직원들은 키보드 위에서 가녀린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얼굴에는 우아한 미소를 잃지 않으며 나를 환대했다. 심지어 나와 눈을 마주치면서, 동시에 논리적인 안내 멘트를 매끄럽게 쏟아내는 묘기를 선보였다.  

     

접수를 한 후에도 상담을 위해 2시간 동안의 기다림이 이어졌지만, 세심하게 가꾸어진 편안한 환경 덕에 견딜만했다. 마침내 10분간의 상담이 진행되었다. 

“고객님은 색소 침착이 잘 되는 피부라 평생 관리하셔야 하는데, 잘 오셨습니다. 믿고 따라오시면 피부관리에 대한 인식의 판도 자체가 바뀌실 겁니다. 고객님께는 합리적인 가격에 최고의 기술력까지 갖춘 완벽한 시술인 ○○○를 추천드립니다.” 

짧은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상담원의 설득력 있는 입담 폭격에, 거의 현혹되는 듯한 느낌으로 결제하고야 말았다. 상담실을 빠져나와 생각해 보니, ‘美와 money의 공생 관계’라는 막연한 느낌밖에 없었다. 홀린 게 분명했다. 진행될 시술을 받으려면 2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는데, 테이블 앞에 ‘너는 꿈꾸기만 해. 다 이뤄줄게.’라는 광고지가 눈에 들어왔다. 심플하지만 자극적인 문구에 동요되지 않을 수 없었다. 2시간의 대기 시간은, 꿈이 실현되는 약속을 위한 대가로는 작은 것 같았고, 기꺼이 기다림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행히 미리 챙겨 간 책이 있어 지루하지는 않았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기가 아쉬웠는지, 내 눈은 방황하기 시작했고, 이내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피부과에는 이미 우윳빛 꿀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훨씬 많이 온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완벽하게 조각된 듯한 몸매를 뽐내고 있었다. 이미 완성된 몸을 가진 사람들만 헬스장에 온다는 친구의 아이러니한 주장과 유사한 뜻밖의 발견이었다. 그들의 美에 대한 열심에 미묘한 질투가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발견은 피부과 전문의가 가진 전문지식보다 더 깊은 신뢰를 갖게 했다. 나도 곧 저들처럼 우윳빛 꿀피부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가득 찼다.     


길었던 기다림에 비해, 시술은 10분도 채 안 되어 순식간에 끝이 났다. ‘드디어 나도 무결점 광채 피부가 되었구나!’하는 기대로 마지막 스킨케어를 받는 순간, 직원분이 말했다.

“웬만하면 꼭 3주 안에 또 오세요. 앞으로 아홉 번 남은 거 아시죠?

순간, 연예인 피부를 꿈꾸던 기대는 은하계 저 멀리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랬다. 아직 9회나 남았다. 아쉽게도 1회의 시술만으로 피부 미인이 될 수 있는 기술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최상의 결과를 위해서는 3주 이내에 관리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아무리 뚫어져라 달력을 쳐다봐도 일정이 나오지 않았다. 한때 오롯이 나의 소유였던 주말은 사랑이의 탄생과 동시에 내 것이 아니다. 주중에는 업무에 우선순위를 두느라, 몇 시간씩 피부 관리에 시간을 투자할 수가 없다. 이미 지불한 10회의 듀얼 토닝 케어를 올해 안에 모두 끝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의 성공은 요원해 보인다. 

     


결국 다음 예약 일정을 잡지 못하고 피부과를 나왔다. 피부과의 문이 앨리스를 또 다른 세계로 이끌었던 토끼굴 이었을까? 단 한 번의 피부과 방문 후, 나는 ‘비밀 피부 탐정’으로 변신했다. 거리를 거닐면서 내 시선은 모든 행인들의 피부로 비밀스럽게 향했고, 요리조리 눈을 굴려 가며 힐끔힐끔 그들의 피부를 훑어보았다. ‘저 사람은 분명 피부과 단골일 거야. 얼마나 자주 관리를 받는 걸까? 저 완벽한 피부 뒤에는 어떤 비밀 시술이 숨어 있을까?’ 그저 평범하고 무심했던 걸음은 사람들의 얼굴 뒤에 숨겨진 비밀을 밝혀내는 흥미진진한 수사로 변했다. 이러한 변화가 스스로도 우스워 혼자 키득거렸다. 다양한 경험은 우리의 시야를 넓힐 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유머 감각도 키워주나 보다. 

      

왜 내가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 피부과를 방문했는지,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피하기 위해서였는지, 젊음에 집착하는 욕망 때문이었는지, 나이보다 더 늙어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등의 철학적 고민은 접어두기로 했다.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아이라이너를 사용했다는 기록이나 우리나라 삼국시대 벽화에서 얼굴 연지가 있었던 것을 보면, 美을 추구하는 마음은 시대를 초월한 인간의 본능인 것 같다.      


확실한 건, 누구보다 내 피부의 대변신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시어머니께는 당분간 보정 필터(광채 필터가 특징인)를 사용한 셀카 사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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