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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Jan 31. 2024

살아있는 이야기꾼들과의 만남

한 사람의 인생은 한 권의 책이다.

“지역 어르신들 대상으로 그림책을 통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하는데, 한 시간 정도 부탁드려도 될까요?”

“어르신들 강의는 처음인데, 심지어 새파랗게 젊은 제가 어르신들 앞에서 죽음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니, 자신이 없습니다.” 

“그림책을 통해서 무겁지 않게 진행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아이들한테 하듯이 하시면 돼요.”

지역 대학교와 주민센터 담당자의 설득력 있는 전화 시구는 완벽한 스트라이크였고, 어느새 나는 도서관에서 그림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림책은 너무 많았지만, 어르신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존재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책들을 선정했다. 산다는 것 자체가 깊고 복잡한데, 긴 여정을 걸어오신 어른들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저 얕게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어르신들 앞에서 죽음을 심도 있게 다룰 수 있는 삶의 깊이와 경험이 내게는 없었다.     

 

선택된 책은, 삶과 죽음은 처음부터 하나였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나는 죽음이에요』, 죽음을 설레고 편안한 여행으로 표현한 『여행 가는 날』, 삶의 가치를 생각게 하는 『할머니의 팡도르』이다. 그림책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 지루해하시지 않도록, 어르신들의 기호에 맞춘 간단한 활동(건강 박수)을 준비하고, 웃겨드릴 재미있는 문구들을 찾았다. 강의 시작 전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곡을 선별하느라, 임영웅 씨의 노래를 수십 번도 더 들었다.     

 



어르신들이 내 이야기를 들어줄까 긴장과 염려가 뒤섞인 채, 주민센터 단상에 올라섰다. 인사를 하고 그들을 마주하는 순간,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참아내느라 힘들었다. 50명의 얼굴에서 5만 가지 이상의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을 견딘 삶의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눈물로 반짝이는 듯한 그들의 눈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오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금이 간 주름진 얼굴은 소리 없이 울고 있는 듯했고, 희로애락의 목격자인 풍화된 손은 침묵할 수밖에 없는 서러움을 담고 있었다. 모두가 살아있는 이야기꾼이었다. 한 시간 동안, 내 모든 힘과 흥을 쏟아서 즐거움을 선물하겠노라 각오했다. 감사하게도 그들은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크게 소리 내어 읽고, 적극적으로 질문에 답하며 청년들보다 더 열정적으로 참여하셨다.  

    



강의 후, 의미 있는 선물을 하고 싶어서 개인적인 메시지나 버킷리스트 등 마음에 떠오르는 것들을 적을 수 있도록 캘리그래피 액자를 준비했다. 

“선생님이 대신 좀 적어 주면 안 될까?”

아차! 글을 모르는 분들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럼요, 밤새 글씨 연습했는데, 아무도 안 써달라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잖아요.”

혹여나 민망하실까, 죄송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정성껏 써드리니, 여기저기서 대신 써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나는 힘들어서 못 살겠다고 써 줘.”

“아이고~ 우리 어머님하고 똑같이 말씀하시네.”

하며 ‘힘들어도 살자.’라고 적어 드리니, 내 눈을 보시며 활짝 웃으셨다.      


몇몇 분들은 살면서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며, 뭘 써야 할지 몰라 망설이셨다. A할아버지는 한참을 고민한 뒤, 꽃을 좋아하는 아내에게 선물할 거라며 “여보, 건강하세요.”라고 쓰셨다. 아들 자랑을 하셨던 S할머니께는 내가 직접 “아들아, 용돈 넉넉히.”라고 써드리니, 속마음을 들켰다는 듯 깔깔 웃으셨다.      



그렇게 내가 맡은 강의는 마무리되었지만, ‘청춘 사진 찍기’ 프로그램에도 함께하며 어르신들에게 힘을 보태기로 했다. 차례를 기다리시는 동안 말동무를 해드리고, 사진을 찍고 나오시면 소지품을 분실하지 않도록 챙겨드렸다. 

“선생님, 우리 딸이 진짜 공부도 잘하고 착했거든. 애들 중에서 제일 똑똑해서, 신문사 기자로 일했잖아.”

자랑거리였던 딸이 신문사 일을 그만뒀던지, 최근에 할머니를 서운하게 한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 깜깜한 밤에 사고로 죽었어. 서른한 살 제일 예쁠 때였는데... 그날 이후로 내가 이렇게 폐허처럼 다 망가졌다.”

할머니 연세가 89세라고 하시니,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살아온 고통의 세월이 40년이다. 삶에는 시간이 치유하지 못하는 상처도 있다. 그녀의 삶은 그날 이후로 영원한 겨울이었을 것이다. 대응할 수 있는 말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순간 몸과 마음이 얼어붙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런 민감한 주제를 초면에 나눌 수 있는 건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아이고, 또 딸 이야기 하나 보네. 선생님 바쁘다. 이리 온나.”

노인정 단짝 친구분이 내게 무언의 신호를 보내며, 안쓰러운 표정으로 할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자리로 가셨다.     



순간 홀로되신 아빠 얼굴이 떠올랐다. 엄마가 하늘로 떠난 지 20년이 지났고, 자식들 앞에서는 늘 강한척하셨지만, 그의 외로움은 늘 어딘가의 틈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그를 보며, 외로움은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감출 수 없는 향기처럼 뿜어져 나오는 것임을 알았다. ‘모두가 외롭고, 그래서 한 사람은 하나의 섬과 같으며, 천 사람은 천 개의 섬과 같다.’는 글을 읽으며 그에 대한 연민으로 눈물 흘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아빠는 광활한 바다 위에 고립된 외로운 ‘섬’이 아니라, 변함없이 빛을 비추는 ‘등대’ 같은 존재임을 깨달았다. 그는 삶의 폭풍을 묵묵히 견디며, 내가 인생의 바다에서 길을 잃고 표류할 때마다 안전한 해안가로 인도한다. 언젠가는 그의 빛이 완전히 꺼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남은 시간을 무엇을 하며 보내고 싶은지, 남기고 싶은 말은 없는지, 어떤 치료를 받고 싶은지 묻고 준비해야 하지만, 막상 말을 꺼낼 용기도 기술도 없어, 외면하고 있다. 죽음을 용기 있게 직면해야 한다고 외쳤지만, 사실 그 공간에서 내가 제일 겁쟁이였다.  

   

“선생님, 내 좀 도와줘.”

짧은 사색을 깨며, 강의 내내 생글생글 웃으셨던 B할머니가 다짜고짜 내 손을 이끌며 화장실로 가신다. 거기서 나는 수업 내내 씩씩하게 잘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나는 이게 마지막 사진일 것도 같아서.”

하시며 한복을 꺼내시는 게 아닌가. 몰래 눈물을 훔치며 감춰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울지 마라. 나는 죽는 연습 많이 해서 괜찮다.”

“죽는 연습을 어떻게 하시는데요?”

“낮잠 엄청 많이 잔다.”

그야말로 울다가 웃었다. 덤덤하게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은 삶의 긴 여정을 보여주는 증거일 수 있다. 시간은 흐르면서 삶의 깊이를 만들어 내고, 사랑하는 배우자와 친구, 심지어 자녀의 죽음을 마주하며, 그들의 삶은 깊어졌다. ‘한 사람의 인생은 한 권의 책이다.’는 말의 의미가 어느 때보다도 가깝게 다가왔다.     



부부끼리 오신 분들은 부부 사진을 찍어드렸는데, 할머니 한 분이 개인 사진만 찍고 말도 없이 먼저 집으로 가신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부부 사진을 찍을 차례를 기다리시다가, 뒤늦게 아내가 사라졌다는 걸 알아채셨다. 

“아버님, 다른 예쁜 친구분 옆에 앉혀드릴까요? 저는 어때요?” 

당황스럽고 민망하실 것 같아,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띄우려 했다.

“그건 안돼. 그러다 오늘 죽어.”

인생의 굴곡을 헤쳐나가며 60년 정도를 동고동락하면, 싸우지 않아도 혼자 집에 갈 수도 있고, 혼자 남겨진 것이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 지점이 오는 듯하다. 그러나 여자의 질투는 바싹 마른 사막에서도 살아남는 선인장 같은 끈질긴 생명력을 가졌다.


“정권 바뀌고 나서, 대통령이 이런 거 해주는 거 처음이다. 선생님, 고맙데이.”

순간순간 뭉클했던 마음과 삶에 대한 수많은 생각들이 뒤엉켰던 긴 하루가 드디어 끝이 났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오늘의 복잡한 심경을 녹아내리게 하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뜻깊은 경험이었지만, 삶의 내공이 더 쌓여야 가능한 일이었기에, 두 번은 못 할 것 같았다. 얼른 담당자에게 인사를 전하고 도망가듯 주민센터를 빠져나오려는 순간, 담당자가 놀라운 속도로 쫓아왔다.   

  

“선생님, 2월에 다른 동에서 오늘 강의 한 번 더 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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