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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만 선택했는데, 거제도가 왔다.

by 이음

남편의 손을 잡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거기도 다 사람 사는 덴데, 눈 딱 감고 몇 년만 버텨보지 뭐.”

그때는 몰랐다. 그 몇 년이 10년이 될 줄은.


결혼은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함께 만나는 일이라고 했다. 말은 쉬웠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어디든’이 ‘거제도’라는 세 글자로 좁혀지는 순간, 그 자신감은 얇은 얼음장처럼 금세 깨져버렸다. 익숙한 부산에 신혼집을 마련했다. 주말부부. 적당히 떨어져 사는 거리는 의외로 좋았다. 사소한 말다툼도 줄었고, 짧은 만남은 서로를 더 애틋하게 했다. 꼭 같이 살아야 가족인가 싶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몇 달이 흘렀다.


“거제도서 딱 몇 년만 살까 싶다. 나중에 다시 나오면 되지 뭐.”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불러오는 배만큼 모성애도 자란 걸까. 딸아이에게 단 몇 년이라도 아빠와 함께 지내는 시간을 주고 싶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 집을 보러 다녔다. 거제도는 그렇게, 남편과 함께 내 삶으로 들어왔다.


경상남도 남쪽, 바다가 감싼 땅 거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다. 해안선은 제주도보다 130km나 더 길다. 섬을 따라 펼쳐진 해안 절경과 온화한 기후는 사계절 내내 사람들을 부른다. 한화오션과 삼성중공업이라는 두 대형 조선소가 자리한, 대한민국 조선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윙윙거리는 기계 소리와 철컹거리는 금속 부딪히는 소리가 조용한 섬을 깨운다. 산업과 자연, 두 세계가 한곳에서 충돌하고 어우러진다. 강철의 울림과 바다의 숨결이 만나는 특별한 풍경이 있는 곳.


이러한 특별함 속에서, 나의 특별함은 서서히 희미해졌다.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지. 여행 온 것처럼 살면 돼.’ 자신을 다독였지만, 낯선 땅에서의 삶은 예상보다 더 날카롭게 외롭고 고달팠다. ‘행복은 장소에 달려 있지 않다.’라는 위로도, 불편한 현실 앞에선 힘을 잃었다. 지하철은커녕 버스조차 드문 거제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고립’이었다.

“여기선 운전 못 하면 감옥 생활이다. 생존 수영 같은 거다.”

남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는 데는 이틀도 채 걸리지 않았다. 운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거제의 풍경은 손 닿지 않는 창 너머의 그림이었다. 산도, 바다도, 눈앞에 있지만 닿을 수 없는.


남편의 회사는 늘 바빴고, 나는 점점 더 외로웠다. 익숙했던 도시 생활이, 이곳에서의 일상을 더 답답하고 낯설게 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분초를 쪼개 움직이던 날들은 사라지고, 천천히 떨어지는 모래시계 속 모래알 같은 시간만 남았다. 지하철의 소음, 북적이는 거리, 빌딩 숲이 익숙했던 나에게, 적막한 바다와 고요한 거리는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텅 빈 하늘을 마주하는 것도 어색했고, 어둠이 내리면 적막하기까지 한 거제의 밤을 어떻게 견딜지 몰라 뒤척이는 날도 많았다. 끊임없이 울리던 휴대전화도 제 역할을 잃었다. 조용해진 기기를 손에 쥔 채 억지스러운 원망을 퍼붓곤 했다. 바쁠 땐 질기게도 괴롭히더니, 왜 정작 필요할 땐 조용한 건지.


견딜 수 없는 답답함에, 마침내 평생 외면해 왔던 운전대를 붙잡았다. 두 살배기 딸을 품에 안고 울던 날들에 안녕을 고하며, 아무런 목적지 없이 해안도로를 달렸다. 어디로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마음에 드는 카페에 멈춰 커피 한 잔을 마셨다. 경치에 취해 돗자리를 깔고 앉아, 푸른 물결이 부서지는 자장가 소리에 잠시 눈을 붙였다. 시야가 끝없이 뻗어가는 풍경에, 오랜만에 숨통이 트였다. 한숨 한숨 내쉴 때마다 억눌렸던 것들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나는 여전히 나야, 변한 건 무대일 뿐이지.’ 그제야 이곳을 진짜로 살아보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곳에선 잊고 있던 감각들이 되살아났다. 코끝에 맺히는 흙 내음과 나무 향기는 머릿속을 맑게 비워냈다. 낙엽의 바스락거림에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살랑살랑 잎사귀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내는 낮은 울림. 간간이 들리는 새들의 지저귐에, 나만 아는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간지러운 바닷물에 발목을 적시고, 바위에 부딪혀 시원하게 튀는 물보라를 보고 있으면, 걱정도 함께 흩어졌다. 해안을 가로지르는 바람의 휘파람 소리, 짭짤한 바닷바람의 끈적임마저 반가웠다.


거제의 넓고 빈 풍경 속에서, 불필요하게 쥐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놓아주었다. 가벼워진 손으로 내 안을 쓰다듬었다. 나비처럼 살포시. 여린 날갯짓에, 내 안의 공기가 가볍게 흔들렸다. 외로움과 두려움이 천천히 물러가고, 작은 용기와 소소한 설렘이 스몄다. 억지로 붙잡지 않아도 된다고, 부족함을 메우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누군가는 물었다. 거제에서 살면 도시보다 느린 속도로 사는 법을 배우게 되느냐고. 고개를 저었다. 느리게 사는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하지만 내 속도에 맞춰 사는 법은 확실히 배우고 있다. 흐르는 물에 얼굴을 비춰 볼 수 없듯, 늘 쫓겨 다녔던 도시에서의 삶에선, 나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빠른 속도는 모든 것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본질적인 것들, 더 소중한 것들은 매번 손에서 미끄러졌다.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 이웃과 나누는 따뜻한 인사, 책을 읽으며 느끼는 평온. 삶의 작은 것들에서 행복을 찾는 일이 조금씩 익숙해졌다. 하루를 천천히 계획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고르고, 그 선택들로 하루를 쌓아가는 시간. 약간 부족한 듯, 과하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장함을 내려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걷는 법을 배우며, 삶은 더 부드럽고 여유로워졌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법도 알게 되었다. 이제, 이곳의 이야기가 글로 엮이고 있다.


거제에서의 삶을 통해 경험한 변화와 성장의 흔적을 담았다. 낯선 환경 속에서 길을 잃고, 방향을 찾기 위해 안갯속을 더듬던 날들. 이 이야기가, 흐릿한 지도 위를 걷는 누군가에게 작은 불빛이 되길 바란다. 흔들려도 괜찮다. 어디서든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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