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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배의 여름

by 이음

도시의 여름은 늘 같은 풍경이었다. 뜨거운 햇빛이 건물 유리창에 반사되어 눈을 찌르고, 회색 빌딩 숲 사이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은 땀방울을 물줄기로 만든다. 아스팔트 위로 일렁이는 열기, 그 일그러진 풍경 속에 비틀린 내가 있었다. 에어컨 바람에 기대어 하루씩만 버텼다. 여름휴가라고 해봐야, 호텔 방의 에어컨 아래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식히는 게 전부였다. 워터파크나 바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해수욕장은 남의 이야기였다. 체력도 마음도 바닥인 내게, 여름은 그저 지나가는 계절이었다.


“하나님은 초록색을 제일 좋아하시나 봐. 세상엔 초록이 진짜 많잖아.”

딸아이는 산이 유독 가까운 거제의 여름을 이렇게 표현했다. 산 아래 펼쳐진 푸른 바다는 초록빛 산과 대조되어, 더 선명하게 반짝인다. 저 멀리 바다 끝자락은 하늘과 맞닿아 경계를 허물고, 두 세계는 하나가 되어 섞인다. 황금빛 모래사장 위로 밀려오는 하얀 포말은 바다의 호흡을 따라 잠시 머물다, 다시 부드럽게 사라진다. 간질거리는 바람이 바다와 하늘을 흔들고, 구름은 솜사탕처럼 풀리며 흩어진다. ‘여름의 색은 이런 거였지.’ 이곳에서 잃어버렸던 여름을 한꺼번에 되찾은 기분이었다. 거제의 여름은 즐길 거리가 많아, 도시보다 다섯 배는 더 길게 느껴진다.


딸아이는 물놀이보다는 해변에서의 모래놀이를 더 좋아한다. 그녀에게는 몇 군데 모래놀이용 해변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집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와현 해수욕장’을 자주 찾는다. 모래가 부드러워, 물을 적시면 점도가 모래성 쌓기에 그만이다. 파도가 세지 않고, 물도 깊지 않아 물놀이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모래사장 위에 아는 글자도 써보고, 그림도 그리고, 모래성도 쌓는다. 그러다 몸이 으슬으슬해지면 뜨끈한 모래찜질로 몸을 녹인다. 모래의 온기에 움츠렸던 몸이 풀어지고, 눈꺼풀까지 녹아내린다. 주변에 편의시설도 잘 갖춰져 있어, 짐을 잔뜩 챙길 필요 없이 가볍게 다녀올 수 있다.


동네 엄마들과 근처 바닷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집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엄마, 진짜 딱 10분만 모래 만져보고 가면 안 돼?”

“안 돼. 오늘은 모래놀이할 준비도 안 해왔잖아.”

“에이, 물이랑 모래만 있으면 됐지, 준비할 게 뭐가 있어!”

짧은 말을 남기고, 그녀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모래사장으로 달려갔다. 그녀의 뒷모습이 말했다. 우리 삶에도 사실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건강한 몸과 평온한 마음, 사랑하는 사람들, 작은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일상. 이미 충분한데, 왜 그토록 욕심을 부리고 안달하며 살았을까? 진짜 행복은 어쩌면, 물과 모래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워할 수 있는, 소박한 기쁨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힘을 빼고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더 살맛 나게 할지도. 물과 모래만 있으면 충분하니, 결국 10분은 3시간이 되었다.


조금 더 멀리 갈 때는 40분 거리의 ‘명사 해수욕장’으로 향한다. 이름처럼 모래가 곱고, 바닷물도 맑다. 수심이 얕고, 백사장 뒤로는 울창한 노송이 우거져 있어, 뜨거운 햇살에 달궈진 몸을 식히기에 그만이다. 텐트촌과 평상도 마련되어 있고, 차박도 가능해서, 시간상으로 좀 더 여유 있게 머물 수 있다. 해상 데크길을 따라 산책도 즐길 수 있고, 수국이 필 때면 근처 수국 동산에 들러, 만발한 수국을 만끽할 수 있다. 조용한 곳에서의 한적한 시간을 원할 땐, ‘물안 해수욕장’이나 ‘황포 해수욕장’으로 간다. 차분한 바다 앞에선, 마음속 소란스러운 것들도 고요히 가라앉는다.


“다온이는 신석기 시대에 태어났으면 훨씬 재밌게 살았을 것 같다!”

“왜? 신석기 시대가 뭔데?”

“아~주 옛날에 사람들 살던 시절인데, 그때는 사람들이 물고기나 조개 같은 거, 직접 잡아서 먹고살았거든.”

“진짜? 마트에서 안 사고? 그때 태어났으면 진짜 좋았겠다!”

채집 활동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갯벌 체험은 없어서는 안 될 즐거움이다. 집에서 15분 거리인 ‘사곡 해수욕장’은 그녀의 단골 코스다. 홍합, 가리비, 굴, 고둥, 조개, 바다게, 소라게까지 다양한 생물들이 그녀를 기다린다. 해수욕장과 갯벌이 한데 붙어 있어, 물놀이하다 물이 빠지면, 바로 장비를 챙겨 갯벌로 향한다. 쫄깃한 갯벌에서 ‘나 잡아봐라.’며 움찔거리는 생물들과의 술래잡기. 최소 4시간은 기본이다.


물이 빠지면, 숨어 있던 생물들이 고개를 내민다. 우리 삶에서도, 사라져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미처 알지 못했던 가능성과 감춰진 기회가 물이 빠진 뒤, 드러날지도 모른다. 때로는 떠나야만 진짜 중요한 것들이 보이기도 한다. 다니던 직장이 사라졌을 때, 안정된 삶 뒤에 가려졌던 내 가능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생을 살아온 고향을 떠나고 나서야, 그동안 보지 못했던, 삶의 다른 모양과 색깔이 눈앞에 펼쳐졌다.


‘다대 해수욕장’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여기선 수상 레저와 갯벌 체험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다. 갯벌이 푹푹 빠지지 않아 발걸음도 비교적 가볍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그녀는, ‘구영 해수욕장’, 매미성 근처의 ‘대금마을’ 등, 여러 바다를 골라 다니며, 채집 본능을 마음껏 채운다.


내 최애 바다는 ‘학동 몽돌해수욕장’이다. 바닷물도 깨끗하고, 해안을 따라 펼쳐진 동백 림도 즐길 수 있다. 무엇보다도 몽돌로 덮인 해변이라, 신나게 놀고 나서도 모래가 묻지 않은 채, 깔끔하게 돌아올 수 있다. 몽돌이 깔린 해변 위로 파도가 넘나들며 내는 소리는, 우리나라 자연의 소리 100선에 선정될 정도로 아름답다. ‘철릭철릭, 촤르르르.’ 잔돌들이 부딪히고, 파도에 부서지며, 모난 부분이 둥글어지는 울음소리. 그 울음이 모여, 노래가 되었다. 크기도 모양도 색깔도 제각각인 돌들이 빚어내는 선율. 서로 다른 삶의 흔적을 지닌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도,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울까.


거제의 여름 바다는 마음의 소란을 씻어 갔고, 잊고 지냈던 것들을 되찾게 했다. 바람의 온도와 빗소리의 변화, 구름이 지나가는 방향과 길가에 핀 꽃들의 이름. 처음엔 가벼운 물결로 발끝에만 스쳤던 것들이, 어느새 파도가 되어 내 안을 넘실거린다. 내 안에 바다가 차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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