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퍼 판타시아 [Hyperphantasia]
바람은 여전히 차다.
그것은 클로에의 얼굴 표면을 아리게 훑으며,
몸속 깊은 곳에서 치열하게 꺼내놓은 감정들을 식혀버린다.
따뜻한 커피를 한 잔 주문한다.
음악이 흐른다.
요즘 유행하는 노래들이다.
가사는 온통 사랑을 말한다.
결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들이,
마치 이 평범한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맞은편 손님들은 자신에게만 중요한 존재들에게
갖가지 형용사나 동사를 붙이기 바쁘다.
사랑하는 가족, 집안의 사건 사고,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걱정.
그녀들의 감정을 먹고 자라는 먼 미래의 아이들까지.
그녀들은 웃고, 허공에 호통을 치며
삶이 정신없다고 말하지만,
그 대화 속에는 정작 자신들의 이야기가 빠져 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흩어지는
노이즈가 흐릿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클로에의 맞은편에 앉아 말을 건다.
저 사람들, 가면 뒤에 숨어 있어.
클로에는 눈을 감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그렇구나."
그건 그저 그녀들의 일일 뿐이다.
잠깐씩, 초대받은 것처럼
물리적인 세계의 다른 이면이 숨어 있다가
슬쩍 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녀는 그것을 지나가는 소음쯤으로 여겨 버린다.
클로에는 문득 생각한다.
이 정교한 '섬광의 심상들'이 머무는 세상에
초대되는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많은 것일까,라고.
글을 잔뜩 써두었다.
준비하다 만 창작물들도 쌓여 있다.
혼잡하다. 그리고 또 혼잡하다.
마음에 들었다고 생각한 문장들도
다시 뜯어고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그녀는 삶의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글을 쓴다.
그리고 삶의 밖으로 나가기 위해 디자인을 한다.
그 둘은 결코 함께할 수 없다.
이번에는 클로에가 노이즈에게 말을 건다.
“나도 가면 하나 벗어볼까?”
노트북 화면에 띄워 둔 문장을 바라본다.
커서의 깜빡임이 심장 박동처럼 느껴진다.
무의식이 아직 숨 쉬고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글은 하나같이 엉망이다.
우습다.
그림은 연필로 그리면서 글은 노트북으로 쓴다.
그것도, 우습다.
조각난 것들을 붙여 볼까.
아니면 끈기를 짜내어 볼까.
… 모르겠다.
하지만 모른다는 감정 또한 그녀에게 중요하다.
바쁜 일상이 끝나고 확인이라도 받은 것처럼
한기와 몸살을 얻었었다.
이제는 별일 아니다. 그럴 때도 되었기에.
그래서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음악 소리, 사람들의 대화,
클로에의 머릿속에서 속삭이는 형체 없는 환상들이 뒤섞여
작은 카페가 생각보다 다채롭게 느껴진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맞은편의 이야기를 백색소음 삼아 읽다 만 책을 펼친다.
뭐 잊은 거 없어?
집중이 되지 않는다.
그녀들의 대화, 두 곡의 음악, 노이즈의 수다.
이 혼잡한 순간에도 그녀는 책을 읽어 내려간다.
피아노 줄처럼 가늘고, 거미줄처럼 가벼우나,
절대 끊어질 것 같지 않은 미세하고 섬세한
그— 참을 수 없는 몰입의 선을 붙잡으며 스스로를 세뇌시킨다.
그래서 듣고 싶은 음악을 틀어본다.
소리를 소리로 덮는다.
요란하지만 고요해진다.
그녀는 글을 쓴다, 온갖 색깔의 노트에다……. 밤늦도록 언어 속에 머무른다.
— 크리스티앙 보뱅, 『작은 파티 드레스』 중에서
마치 이 상황을 위해 준비된 문장처럼 책 속에 놓여 있다.
클로에는 노트북의 새 창을 연다.
아까부터 수다스러운 노이즈에게 대꾸한다.
“밖으로 꺼내 줄게.”
그녀는 처음 만난 노이즈를 세상 밖으로 풀어놓고
현실 세계로 걸어 나간다.
바람이 차갑다.
커피로 몸을 녹일 수 있어 다행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녀의 감정을 먹고사는
사랑하는 천사가 기다리고 있다.
유온의 숲 스물한 번째 이야기 Dream
#시네마틱 에세이 #에세이스트 #작가 #소설 #글쓰기 #시 #명리심리학 #심리학 #가치 #회복 #우울 #번아웃 #슬픔 #마음 #불안 #고독 #인생 #삽화 #그림 #그림에세이 #몰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