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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미 May 27. 2023

'거지방'과 모스크바의 신사와의 상관관계

요즘 사람들의 유머에 관하여


"당신은 거지라는 것을 잊었나요? 정신 차리세요"


한쪽에선 30만 원짜리 오마카세를 먹지만 다른 한쪽에선 400원 도시락을 찾는다는 MZ세대 기획기사가 떴다. 기사가 뜬 배경에는 이른바 '거지방'이라는 단체 카톡방이 있다. '거지방'에선 서로 잔소리를 하면서 절약을 독려한다고 한다. 주머니는 가볍지만 마음만은 풍요로운 일명 '거르주아'들의 놀이문화가 요즘 트렌드이다.


동아일보 <주머니 가볍지만 마음 풍요로운 '거 르주아'랍니다>


400여 명이 포함된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에 동아일보 기자가 동참해 봤단다. 

"헤어 오일 7090원짜리 사도 될까요? 인터넷 최저가입니다" 했더니 

"집에 있는 올리브유로는 안 되나요?" "식용유 바르세요" 등 냉정한 답변이 돌아왔단다.


참여자들은 지출 전 다른 이들의 승인을 구하거나 지출 후 내역을 써 올리면서 공유하고 절약과 무지출엔 칭찬을, 불필요한 지출에는 무자비한 불호령을 쏟아낸단다.

그들은 서로의 지출 내역을 보면서 동료애를 느끼고 동기부여도 된다면서 재미있다고 말한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떠돌아다니는 '버블티 사 먹고 싶은데 돈이 없을 때 꿀팁'은 정말 기발하다고 생각하는데, 웃프기도 하지만 유머를 잃지 않는 태도가 번뜩인다.


인터넷 커뮤니티


나는 유머에 대해 생각했다. 

사전적 정의는 남을 웃기는 말이나 행동. 우스개, 익살 등으로 순화 가능하다. 

어원을 살펴보면  라틴어 "umor"에서 유래되었다. "umor"는 체액(humor)을 의미하는데,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은 인체 내에는 혈액, 담즙, 점액, 검은 담즙이라는 4가지 체액이 있다고 믿었으며, 이 체액들의 균형이 건강과 감정상태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체액은 "혈액(humor)"이었는데, 이 체액이 과다하거나 부족해지면 사람은 우울하거나 과민해지는 등 다양한 증상을 보이게 된다고 믿었고 이후 "umor"는 인체 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과 관련하여 "기분, 기분 전환" 등의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체액에서 유래한 '유머'라는 개념은 어쩌면 인간에게는 필수 조건일 수 있다. 실제로 휴머니티에서 유머를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에이모 토울스의 <모스크바의 신사>를 떠올렸다.


에이모 토울스 <모스크바의 신사>


모스크바의 신사는 에이모 토울스의 장편소설로 반평생을 호텔에서 연금당한 로스토프 백작의 이야기다. 호텔 안에서 벌어지는 일만으로 장편의 스토리를 꾸릴 수 있는 작가의 필력에도 놀랐지만, 그것 자체가 소설의 메시지와도 일맥 상통하면서 더욱 울림이 크다. 주인공 로스토프 백작은 혁명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자신이 쓴 시가 체제에 반항하는 메시지를 품고 있다며 코너에 몰리게 되고 호텔에 구금된다. 작가는 특히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백작이 어떤 태도로 살아가는지를 그린다. 이를테면 그는 신사로서의 품격과 우아함을 잃지 않고 호텔 안에 있는 사람들과 쌓아온 교양과 지식을 나누며 깊은 유대감을 만들어 나간다.


"편리함이라는 게 뭔지 얘기해 줄게요" 잠시 후 그가 입을 뗐다. "정오까지 잠을 잔 다음에 누군가를 시켜 쟁반에 받친 아침 식사를 가져오도록 하는 것. 약속 시간 직전에 약속을 취소해 버리는 것. 한 파티장의 문 앞에 마차를 대기시킴으로써 얘기만 하면 즉시 다른 파티장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하는 것. 젊었을 때 결혼을 피하고 아이 갖기를 미루는 것. 이런 것들이야 말로 최고의 편리함이에요, 안나. 한 때 난 그 모든 걸 누렸었죠. 그런데 결국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불편함이었어요."


옮긴이는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재미있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백작이라 해서 매사가 심각하고 진지하지 않다. 호텔의 웨이터가 되기로 하는 과정, 여자 아이를 맡게 되면서 양육을 하게 되는 과정, 호텔을 탈출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기도 하면서 특유의 여유와 유머 감각은 더욱 빛이 났다.


백작은 의도적으로 서두르지 않는 삶을 택했다. 약속 시간에 맞추고자 서두르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시계를 차는 것도 경멸했다- 한가롭게 점심 식사를 즐기거나 강둑을 따라 산책하는 것을 세속적인 문제들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을 친구에게 납득시킬 때 최상의 만족감을 느꼈다. 어쨌든 와인은 세월이 흐를수록 맛이 좋아지지 않던가? 가구에 고색창연한 멋을 부여하는 것은 세월의 흐름이 아니던가? 결국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시급하다고 여기는 일들 (가령 은행가와의 약속이나 출발 시각에 늦지 않는 것 등)은 기다려도 되는 것들이며, 반면 그들이 가장 사소하다고 여기는 것들 (가령 차 한 잔이나 다정한 대화 등)은 즉각적인 관심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들이었다. 차 한 잔과 다정한 대화라고! 현대인은 그걸 가소롭게 여긴다. 그렇게 한가로운 것에 시간을 할애한다면 어른이 되는 데 필요한 일들은 어떻게 처리할 수 있단 말인가!


'거지방'에서도 기발한 유머와 하릴없는 단어들이 떠다닌다. 이런 상황에선 진지한 위로보단 해학이 더 어울리는 이유다. 요즘의 유머가 1920년 소설 속 백작의 사색과 전혀 다르지 않은 이유는 그 때나 지금이나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고 이를 제대로 마주 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다. 


인생이란 것은 성큼성큼 나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만큼은 현명했다. 인생은 서서히 펼쳐지는 것이다. 주어진 하나하나의 순간마다 천 번에 걸친 변화를 보여주는 과정이다. 우리의 능력은 흥하다가 이울고, 우리의 경험은 축적되며, 우리의 의견은-빙하가 녹듯 매우 느리지는 않다 해도 적어도 천천히 점진적으로-진화한다. 소량의 후추가 스튜를 변화시키듯,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들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누구나 환경이 어려울 때는 쉽게 남 탓을 하게 된다. 그러나 탓을 할 대상을 찾기도 어려울 정도로 이해관계로 점철된 복잡한 사회에 살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선동형 메시지는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다. 남을 바꾸려는 과격한 말들은 애초에 취향에도 맞지 않다. '꼰대'라는 말이 생겨난 이유도 아마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싶다. 내가 소설을 읽고 유머를 사랑하는 이유다.


첫째는 '인간이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지 못하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가장 현명한 지혜는 늘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라는 몽테뉴의 격언이었다. 하지만 이별의 아픔을 털어놓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감정을 억제하지 않았다.


자극적인 썸네일과 헤드라인이 넘쳐나는 시대, 가성비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문화.

여유와 인간성이라는 여백을 야금야금 좀먹고 아등바등 확보한 각자의 좁은 공간 속에서 우리의 유머는 어떻게 진화할까.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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