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독립운동 100년 사의 자취가 담긴 논산 - 서천 - 군산
송재 서재필 박사와 월남 이상재 선생
주말에 아들과 아침 일찍 출발해 논산, 서천, 군산 등지를 다녀왔다. 새벽 1시가 다 되어 귀가했지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믿음의 조상인 두 분의 자취를 만나고 온 유익한 역사 투어 봄나들이였다.
논산은 대학시절 동기가 뒤늦게 군 입대할 때 따라가 준 적 있는 것 외에는 생소한 곳이다. 특히 군산은 처음 발을 디뎌봤다. 요즘 6학년에 올라 훌쩍 자란 큰아이에게 역사를 알려주는 시간이기도 했고, 내겐 휴식이 필요했기에 피곤한 줄 모르고 운전했다.
서재필 박사는 청의 세력을 몰아내려고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그의 가족이 비참하게 몰살당했다. 부모님, 형, 아내, 어린 자녀가 모두 그의 혁명으로 역적으로 몰려 죽는다. 정치적 망명으로 일본을 거쳐 미국에 가면서 가족에 대한 그의 마음은 얼마나 불행했겠는가. 미국에서 허드렛일을 하다 기독교인의 도움으로 컬럼비아 대학 의학부를 졸업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가 된다. 똑똑한 분이다. 언더우드에게 그는 주기도문을 배웠고, 그는 언더우드에게 한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척박한 타향살이에서 하나님을 믿고 미국 현지 교회 강단에서 간증을 한 일화도 있다. 미군과 군의관으로 전쟁에도 참전했고, 철도 기업의 명문가 딸과 가정을 이루었어도 평생을 죄인 된 심정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는 독립신문을 창간했고, 만민공동회 설립하며 예수의 공의가 이 땅에 임하기를 바랐다.
서재필 박사는 해방과 함께 미군정이 시작되자 과도정부 특별의정관으로 임명됐다. 그 과정에서 초대 대통령에 추대되기도 했다. 하지만 고령이었던 탓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과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추후에 이 호기심을 채운 뒤에 글을 보충하기로 한다.
은진초등학교
그의 부모님이 옥살이한 관아가 있던 자리가 첫 장소로 간 은진초등학교이다. 1920년 설립된 이 학교에는 유구한 흔적이 있다. 정문 옆에 500년은 지난 느티나무가 몇 그루 있고, 옛 관아에 반드시 심었다는 향나무가 그대로 보전되어 있다. 어디선가 옮겨왔다는 거북 석상도 보인다. 18세에 장원급제한 똑똑한 둘째 아들, 독립운동을 한 자식 때문에 이곳 은진 관아에서 갇혀 지내다 돌아가신 그의 부모님. 2살배기 아들은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 굶어 죽었다는 슬픈 가족사의 자취가 있는 곳이다. 지금은 평화로운 시골 초등교육의 아늑한 공간으로 서 있다.
고려시대 세워진 절, 관촉사
은진초등학교와 가까이에 있는 관촉사를 잠깐 들렀다가 시끄러운 축제 음악에 정신이 없었다. 고려시대에 세워진 이 절의 차분한 정취를 맛볼 수가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관촉사 올라가는 계단에 이승만 박사 추모비가 있다.
아무튼 시끄럽기만 한 관촉사에서 고려시대 절과 불상의 정취를 별로 느끼지 못하고 논산 연무대 근처에 있는 서재필 박사 본가지로 향했다.
서재필 박사 본가지
연무읍 금곡1리 마을회관에 주차시키고 조금 걸어 올라가면 서재필 박사가 어렸을 때 몇 년 살았다는 터가 나온다. 시에서 관리하는 작은 필지 바로 옆에는 전원주택을 짓고 있는 개인 소유지가 있다. 작디작은 그 필지에는 주춧돌 몇 개를 놓고 이곳이 집터와 창고 터라는 표시만 되어 있다. 볼거리 없는 아늑한 곳이지만 이렇게라도 민족 지도자이자 기독교 인물의 자취가 있는 것이 어딘가.
국민일보 전정희 기자의 글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서재필 생가 전남 보성에는 ‘서재필 기념공원’이 조성돼 있다. 생가 복원은 물론 제사를 위한 사당까지 들어서 있다. 충남 논산 본가 지역에서도 성역화 작업이 한창이다. 본가 뒤 대나무 숲 너머 묘역에도 제사를 위한 기반 시설이 갖춰져 있다. 자기 고장의 위인을 기리기 위한 지방자치단체의 노력인 셈이다. 지자체의 그런 노력을 탓할 바는 못 된다. 정작 한국교회의 무성의함이 안타까울 뿐이다. 멸문지화를 당한 서재필은 생가 및 본가 동네 주민들이 섬겼다. 그러자 지자체가 지원했다. 만약 해당 지역 기독교연합회 등이 ‘그리스도인 서재필 추모예배’를 매년 가졌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서재필만의 예가 아니다. 전북 진안의 이재명 열사도 그러했다. 뜨거운 신앙인이었던 그 역시 지자체와 문중의 주자가례에 의한 제사를 받는다. 한국 근대 인물은 대개 서재필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많다. 지역교회가 눈을 크게 뜨고 살필 일이다."
한국 기독교는 무엇에 부지런하고 무엇에 게으른가. 반공운동에 사력을 다하며 제주 4.3, 공안정국을 거쳐 번영과 축복만 기도하다가 가족이 피폐해지도록 독립운동에 힘쓴 선조는 지자체의 추모 대상이 되고 있다. 한심하다. 서울국제도서전만 보아도 기독교 존이 초라하기 그지없다. 기독 인구 2%도 안 된다는 대만국제도서전의 종교 코너가 훨씬 낫다.
이상재 선생 기념관
서천으로 가서 이상재 선생님 기념관을 관람했다.
5시가 넘어 도착했는데 관리인이 우리가 먼 곳에서 보러 왔다고 하니 관람 시간이 몇 분 안 남아 잠그고 퇴근하려던 차에 잠시 기념관을 열어주었다.
3.1 운동의 정신적 지주인 이상재 선생은 53세에 감옥에서 성경을 읽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후 YMCA 회장으로 절제운동을 이끌었다. 죽기 전까지 YMCA 운동과 신간회 등을 통해 항일 투쟁을 벌이다 1927년 4월 서울 재동에서 생을 마감한다. 20만 인파가 몰린 사회장을 마친 운구는 한산 선영에 모셔진다. 최초의 사회장인 그의 운구 행렬이 얼마나 끝없이 이어졌는지 역사 자료를 보면 그 시대 큰 존경을 받는 민족 스승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산에는 기념비와 그의 독립운동 자취 등이 잘 갖춰 있다.
이상재 기념관의 자료를 둘러보면 그가 친일 관리와 일본을 향한 촌철살인의 풍자와 해학이 넘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네 가지 기록된 사실을 옮겨오면 이렇다.
에피소드 1) "대감들은 나라 망하게 하는 천재들이 동경으로 이사하면 일본도 망할 게 아니겠소!"
- 한번은 조선미술협회라는 단체가 성립되어 그 발기식이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그 식장에는 통감 이또오 히로부미를 비롯 일본인 고관들과 우리 측 대신들도 여러 명 참석한 큰 행사였다. 이상재 선생도 초청을 받아 참석했다. 그곳에서 이상재 선생은 이완용과 송병준을 만나게 되었다. 일본인에 붙어 나라를 말아먹는 문서에 도장을 찍은 그들을 향해 "대감들께서도 동경으로 이사 가시지요"라고 했다. 두 사람은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영감, 무슨 말씀이신지요?"
"대감들은 나라 망하게 하는 데 천재들이니 동경으로 이사하시면 일본도 또 망할 게 아니겠소?"
그들은 이 절묘한 우스갯소리에 웃을 수도 화낼 수도 없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서 있었다고.
에피소드 2)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
- 을사늑약 체결 후 우리나라의 종교계 중진들이 중심이 된 시찰단을 조직해 일본으로 데리고 가서 일본 자신이 얼마나 부강한 국가인지 자랑하려 했다. 이상재 선생도 이 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 각지를 안내받다가 마지막에 동경에서 그들의 군수 병기창을 참관했다. 일종의 감히 덤비지 말라는 위협이었다. 일본은 그날 밤 시찰단 환영회에서 각자 느낀 바를 발표하게 했다.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던 이상재 선생은 마지막 순서로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오늘 병기창을 구경했더니 대포와 총이 산더미처럼 쌓인 일본은 강국의 면모에 손색이 없었소. 그러나 퍽 유감이었소. 성경에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라고 했으니 나는 일본이 그리될까 그것이 걱정이오."
함께 자리했던 일본인들의 가슴을 섬뜩하게 하는 발언이었다. 이 예견은 날카로웠다. 군국주의 피 바다로 아시아를 물들이다가 패망하고 말았으니.
에피소드 3) "때아닌 개나리 꽃이 이리도 많이 피었을까?"
- 기독교청년회에서 주관하는 수많은 강연회에서 이상재 선생은 빠짐없이 사회를 보았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는 어느 곳이든지 일본 경찰의 눈초리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한번은 이상재 선생이 어느 강연회 사회를 보고자 단상에 올라서 보니 청중들 사이에 일본 경찰들이 너무 많이 섞여 있었다. 단순한 종교 집회에 이렇게 많은 일본 경찰이 감시하러 온 것이 몹시 거슬렸다. 이상재 선생은 물끄러미 먼 산을 쳐다보더니 "때아닌 개나리 꽃이 이리도 많이 피었을까?" 하면서 짐짓 딴청을 피웠다. 일반 청중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강당이 떠나갈 듯 폭소를 터트렸다. 당시에 일본 형사는 '개'라 낮춰 부르고, 순경들은 '나리'라 불렀으므로 '개나리꽃'은 몰래 끼어 있는 일본 형사들을 놀리는 말이었다. 형사들은 멋쩍은 표정으로 화도 못 내고 슬금슬금 빠져나갔다고 한다.
에피소드 4) "허허, 사정을 아는 사람이 또 주겠지, 뭐!"
- 이상재 선생은 서울기독교청년회(서울 YMCA)로부터 월급 50원을 받았는데 식구들 생계비에 못 미치는 액수였다. 가난과 역경 속에서도 어려운 처지의 이웃을 걱정했다. 추운 겨울의 어느 날 한 청년이 이상재 선생의 집을 방문했다. 선생의 방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젊은 사람도 견디기 어려운 냉방에 칠순의 노인이 앉아 있으니 민망하여 그 청년은 돈을 꺼내 선생님께 드리며 "얼마 되지 않지만 땔감이라도 사서 방을 따뜻하게 하십시오" 하고 돌아갔다. 그 청년이 돌아가고 한 학생이 왔다. 내일 일본으로 공부하러 떠나는데 여비가 없음을 호소했다. 선생은 조금 전에 받은 돈을 내어주며 "공부 열심히 하게" 하고 격려했다. 이를 본 사람이 땔감을 사라고 준 돈을 그대로 주면 어떡하냐고 했더니 "허허, 사정을 아는 람이 또 주겠지, 뭐!"라고 했다고.
기독교관이 아니면서 월남 이상재 선생 기념관에는 성경의 정신이 곳곳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같은 민족지도자가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는 것. 지금 조선일보는 이상재 선생이 사장이던 시절을 어떻게 보는 걸까.
관리인은 퇴근하고 아무도 없는 이상재 선생 기념관 주변에는 그가 살았던 소박한 초가집도 재현해 두었다. 아들에게 역사 얘기를 들려주다가 널뛰기도 잠시 해볼 수 있었다. 박자 타기 쉽지 않다. 아들은 이날 여행의 베스트가 널뛰기였다고 한다. 산책하기에도 아주 좋은 곳이다.
부근에 종지교회가 보인다. 1904년에 설립되어 이상재 선생이 태어난 곳의 토착 교회이다. 그러나 1960년대 말에 초기에 건축된 예배당을 헐고 새로 지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유서 깊은 종교 건물의 유산을 이렇게 취급한다. 옆에다 새 예배당을 짓지 않고 헐어버리다니... 그나마 생가 옆 기념관에서 이상재 선생 관련 자료들을 통해 3.1 운동 100주년의 의미를 돌아볼 수 있어 다행이다.
빈해원, 이성당
저녁 식사 코스로 25킬로 정도 떨어진 군산에서 유명한 중국집을 가보기로 했다. 사실 이성당 빵집의 빵맛을 보러 가려다 군산 짬뽕이 유명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GM 공장 철수 때문인지 서너 시면 유명 짬뽕집들이 문은 닫는다고 한다. 맛집 검색 1, 2위 모두 이날 장사를 끝내고 말았다. 다행히 10시까지 하는 빈해원이라는 중국인이 운영하는 음식점에서 자장, 짬뽕, 탕수육을 먹을 수 있었다. 대만인이 주인이라고 하는데 홀의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이성당 빵집은 빈해원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다. 항구의 바닷바람을 맞으면 군산의 밤 정취를 맛보았다. 곧 100년이 되는 이성당의 단팥빵과 야채빵을 사느라 줄을 서서 계산하고 집에 가져올 빵들도 챙겨두었다.
채만식의 탁류
이성당 부근의 학교 담벼락 벽화가 채만식 작가의 소설 <탁류>와 어우러져 있다. 어머니 20년 간병을 마치고 내 마음을 힘겹게 하는 티끌들을 날려 보내는 바람이 불었다. 차 가스비와 통행료, 봄날을 맞아 꽃구경 하러 길게 늘어선 자동차 행렬 등 돈도 좀 들고 불편함도 있었지만, 요동치는 감정들을 씻겨 준 군산의 밤바람에 힘이 난다.
새벽 1시가 다 되어 귀가했지만 언제 또 그런 바람을 맞을 수 있을지 벌써 그리워진다. 나는 서재필 박사와 이상재 선생이 기도한 나라 사랑, 이웃 사랑의 마음이 있을까.
2019.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