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을 공부하면 지금의 한국이 보인다
타이완의 북부 타이베이에 다녀온 지 3개월이 넘었다. 나는 왜 지난 3개월간 타이완 여행기를 한 줄도 못 썼을까? 너무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잘 쓰고 싶었다. 구석구석의 작은 느낌까지 살리고 싶었고, 거대한 장제스 동상과 기념관을 본 후 그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한동안 동북아시아 역사 공부에 푹 빠져 살았다. 폭풍처럼 밀려온 지식들을 꼼꼼하게 정리하고 싶었다. 타이완 여행 전 사전 지식은 중국과 180Km 거리에 있는 섬이라는 정도로 빈약했지만, 다녀온 뒤 역사 공부에 대한 열정은 첫 해외여행을 다녀온 일본 못지않게 차올랐다. 대만은 우리와 데칼코마니라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를 겪은 것, 수많은 외세의 지배, 독재자의 통치, 민주화와 경제 흥황을 동시에 이룬 현대사 등, 닮아 있는 요소들을 직접 보니 국사 시험 답 쓰기의 공부가 아닌, 몹시 궁금해서 알아보고 싶은 역사 공부에 몰입하게 됐다. 타이완 역사와 중국 근현대사, 그리고 1차, 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까지 공부하고 싶은 욕구와 열망이 이어져 처음으로 유튜브의 인문 채널들까지 구독해 가며 살펴보았다. 대만을 알아보려다 중국과 세계전쟁 역사까지 알아보게 되니, 이 섬은 나를 확장시킨 매력적인 곳으로 각인되었다.
3.1 운동 100주년이기도 한 올해 2월 타이완을 다녀온 것은 힐링의 시간이기도 했지만, 빈약한 역사 퍼즐을 여러 개 갖추게 한 견학이 되기도 했다. 2월 12일부터 17일까지 열린 '2019 타이베이국제도서전' 참관이 목적인 여행에서 나는 타이완에 대해 알고 싶은 갈증을 느꼈다. 새로운 지식을 쌓다 보니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겠고, 여행 에세이 쓸 타이밍을 놓치면서 공부한 내용도 희미해져 갔다.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글 쓰기 변비가 걸려 회복의 실마리마저 잃어버리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래서 지금부터 떠오르는 대로 휘갈겨 쓰기로 한다.
여행 책자를 사서 비행기 안에서 잠깐 훑어본 것 외에 타이완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출국했다. 그런데 돌아오고 나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내가 중국과 한국, 일본의 근대 이후 역사에 너무나 무지했다는 것이다.
여행을 다녀온 지 보름쯤 지난 3월 6일에 타이완에 대한 벅찬 마음을 누르며 다음과 같은 글을 SNS에 남겼다.
작년 말에 급격하게 몰려온 우울감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난 것 같다. 여행이 도움이 되었다. 1월 말에 둘째와 다녀온 제주 3일 후 갑자기 일본 여행을 같이하자고 제안해 주신 최 집사님 덕분에 다녀온 교토 3일, 그리고 3개월 전에 예정된 친한 형님이 내 몫까지 예약해 주신 2019 타이베이 국제도서전 관람차 다녀온 대만 4일.
2월 중순까지 이어진 여행 일정으로 인생을 새롭게 돌아볼 용기와 여유를 얻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덜어냈다. 여행을 마치고 출판 기획, NGO 홍보, 고려대 발전기금 연차보고서 취재 등의 일로 바쁜 일정이 몰려왔다. 비록 15년 전 다닌 첫 회사의 초봉 정도 수입이지만 지난 2년간 고정 수입이 없는 생활을 하다가 얻은 수입이 감사하기만 하다.
요즘 영화와 드라마에 흥미가 떨어졌다. 이유는 일본과 대만을 다녀온 뒤 근현대사에 대한 궁금함이 몰아치듯 일어났기 때문이다. 호기심을 해결해 가느라 역사책을 읽고 유튜브의 역사 다큐멘터리를 찾아보는 데 자투리 시간을 다 쓰고 있다.
장제스는 왜 카이로 회담에서 유일하게 한국의 독립을 주장했을까?
국민당 쑨원의 후계자로 중국의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고 왜 한참 열세인 공산당에 밀려 대만까지 후퇴했을까?
그 많은 중국의 보물을 어떻게 대만 고궁박물관에 가져올 수 있었을까?
그에 대한 평가가 독재자와 위대한 지도자로 극명하게 나뉜 이유가 무엇일까?
이러한 장제스에 대한 궁금증은 쑨원으로 연결됐고, 장제스의 아내인 송가의 세 자매의 역사, 트와이스 쯔위가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대만 국기를 흔들고 그 때문에 사과하게 된 복잡한 배경, 덩샤오핑, 장쩌민 등으로 이어지는 중국 정치사, 시진핑 시대에 다시 일어나고 있는 1인 권력 강화, 그리고 유럽 역사의 두 차례 세계 대전의 원인과 결과까지 살펴보게 되었다.
너무 방대한 양이라 짧고 명료하게 정리해 주는 유튜브 <토크멘터리 전쟁사>가 도움이 되었다. 이 기획 영상을 강추한다. 국방TV에서 만들었는데 역사와 군사 전문가 두 분의 설명이 탁월하다. 중정기념당에서 본 엄청난 크기의 장제스 동상과 그의 전시 자료에서 촉발된 호기심이 내가 역사 지식이 없어도 너무 없구나 하는 자책으로 연결돼 자기 주도형 역사 공부를 통해 많은 메시지를 얻고 있다.
1차 세계 대전의 전범은 유럽 각국의 지배자들이란 것, 참혹한 참호 전에서 희생당한 수백 만 명의 젊은 군인들 인생을 떠올리면서, 오늘날 내가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들은 어떠해야 할지...
버닝썬 사태로 조명된 돈 많은 사람들의 짐승 같은 일이 벌어지는 한국 사회의 소돔과 고모라는 그 세계대전의 참호에서 들쥐에게 먹히는 시신들과 같지 않나 하는 생각이 밀려온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중국 대약진운동 시절에 참새를 모조리 죽인 뒤 병충해가 심각해져 한국 인구 만한 농민들이 굶어 죽어간 마오쩌둥 시대는 먹이사슬과 생태계에 대한 지식을 어디에 두었을까? 인간과 환경에 대한 이해 없는 일상의 파괴가 일으키는 참혹한 결과를 살펴보니, 경제력과 권력이 생겼을 때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지금 한순간의 판단은 어떤 기준으로 가져야 할지 역사에서 배우게 된다. 가난하게 태어나 큰 뜻을 품었더라도 힘을 가지면 자기애, 권력 마취, 정서장애라는 병에 물드는 게 인간이다.
타이베이에 다녀오고 타이완이라는 나라가 궁금해진 데 장제스라는 인물이 있다. 그의 평전을 읽으면서 중국 근현대사와 세계 대전의 원인과 과정을 살펴보게 되었다. 조금 독특하게 시작하는 이 타이베이 4일의 기록에 앞서 타이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감성적인 여행 에세이를 쓰는 스타일이지만 기본적인 역사 이해부터 하고 다음 글부터 여행 글을 연재하기로.
- 수천 년 전 선사시대부터 원주민이 살아온 섬(여러 문화 유적 발견).
대만 원주민은 중국 한족이 아닌 말레이계(남방계 폴리네시아) 사람들이다. 이들은 부족별로 나뉘어 섬 곳곳에서 살았다. 1732년까지 원주민은 대두왕국을 건설해 평화롭게 지냈다. 현재 대만 본성인의 뿌리이다. 국립대만박물관에서 사진 자료로 보면 아메리카 인디언과 비슷해 보인다.
- 대항해시대 1590년 포르투갈이 발견(울창한 숲이 많은 아름다운 섬이어서 포르모사라고 명명).
대만은 1662년 이전까지 중국 본토와 뚜렷한 왕래가 없었다. 대만과 가까운 중국 대륙인 푸젠 성에서 한족들이 건너와 정착해 살기도 했고, 남서부 펑후제도가 원나라 다루가치의 관리를 받은 적 있으나 대만 본토까지 중국 세력이 미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포르투갈이 대만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의 '포르모사'라고 불렀다. 포르투갈이 대만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는지 식민지로 개발하지는 않았다.
- 1624~1662 네덜란드 식민지
본격적으로 대만을 식민지로 지배하고 착취한 것은 네덜란드다. 대만 남부를 차지한 네덜란드는 이곳을 중국(명나라)과의 무역 중계기지로 사용했다. 네덜란드에 이어서 스페인이 대만 북부 타이베이 지역에 진출했다. 설탕의 재료가 되는 사탕수수가 풍부한 대만을 독차지하고 싶은 네덜란드는 북쪽을 지배한 스페인과 다투어 승리함으로써 지배권을 독식했다. 패배한 스페인은 필리핀으로 진출했다.
네덜란드는 대만에 풍성했던 사탕수수 재배로 플랜테이션 농업을 일으켜 동아사이 중계무역을 했다. 부족한 농업 노동력을 보충하려고 중국 한족들을 이주시켜 원주민과 한족의 공존이 이뤄졌다. 네덜란드 지배는 명청 교체 시기에 끝났다.
- 1662∼1683 명나라 출신 정성공 지배(반청 항쟁)
1644년 중국 대륙을 지배하던 명나라는 만주족의 침입으로 통치권이 청나라로 교체된다. 반청복명 세력인 정성공의 정씨 세력이 청을 피해 대만으로 대거 이주했다. 그들은 네덜란드의 주거지인 남부 타이난에서 승리하여 네덜란드를 내쫓고 3대에 걸쳐 20년을 집권한다. 이에 정성공 세력은 서구 세력을 대만에서 물리친 위인으로 추앙받는다. 정씨왕조는 1683년 청의 공격으로 무너진다.
- 1683∼1895 청나라 통치
정씨왕조가 사라진 대만에 중국 본토의 한족들이 본격적으로 이주하여 원주민과 갈등이 발생한다. 청의 관리들은 원주민들을 고산지대로 내쫓아 이때부터 원주민을 고산족이라 부르기 시작한다. 한족과 동화된 원주민도 있었지만, 고산족은 현재까지 대만 전체 인구의 2%를 구성하고 있다. 말과 문화가 다른 세력의 충돌로 예견된 갈등 또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 1895~1945 일본 식민지
19세기 후반 청의 광서제와 일본의 메이지 일왕이 대립해 중일전쟁이 일어난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대만을 할양받는다. 400여 년간 한 번도 나라를 가져본 적 없는 대만은 청의 지배보다 덜 가혹한 일본의 지배를 환영했다. 철도와 도로가 건설됐고, 타이호쿠 제국대학(지금의 국립 타이완 대학) 설립 등 대만의 발전 기반이 일본에 의해 만들어졌다. 대만은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다는 의식 없이 이러한 일본의 문명 시설 기반의 통치를 그들의 역사상 가장 우호적으로 수용했다. 적자였던 조선총독부와 달리 대만총독부가 흑자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 그러나 원주민 계층에게 끔찍한 사건들
반일 저항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895년 당경숭 중심으로 대만민주국 세워 일본에 저항하기도 했으나 진압당했다. 한편, 원주민은 일본 식민 지배의 최하층에 있었다(일본인>한족>원주민의 계급 사회). 이러한 차별은 원주민 계층에게 반발을 불러와 항일 투쟁이 일어났다.
- 타파니 사건(항일 투쟁)
- 우서 사건(원주민 차별에 대한 대만 원주민들의 항일 봉기)
우서 사건은 1930년 북부 원주민 중 하나인 세디크 족의 모나 루다오 족장의 아들 결혼식 주변을 순찰 중이던 일본인 요시무라 경관이 신랑인 다호 모나 부족장이 건넨 와인을 더럽다고 거절하고 계속 권하던 그를 구타하면서 일어났다. 수치심을 느낀 부족장은 18일 후 우서초등학교에서 열린 일본 육상경기에 300여 명의 전사들을 끌고 급습해 134명의 일본인과 2명의 대만인을 살해했다. 이에 일본 측은 2천 명의 병력과 친일파 원주민을 동원해 독가스가 주입된 산탄을 살포하며 잔인하게 진압했다. 수천 명이 학살된 세디크 족의 항복 후에도 생존자들을 살해하고 동족 간에 살육행위를 조장하며 항일 반란에 대한 잔인한 본보기를 보였다. 이후 우서 사건의 끔찍한 만행에 대해 일본 내에서 비판이 일자 대만 통치를 유화적으로 바꾸고 친일 교육을 강화했다. 독립을 위해 격렬한 항일 운동을 한 조선을 탄압한 것과 다르게 대만에서는 우서 사건을 계기로 유하게 통치했다.
오늘날 대만인들이 일본 식민 통치를 우호적으로 보는 경향이 많은 이유가 우서 사건 학살극 이후 덜 강경한 지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2001년부터 대만의 20달러 동전에 우서 사건의 주인공 세디크 족장 모나 루다오가 들어갔다.
2011년 오우삼 감독은 홍콩 자본 합작으로 <세디크 발레>라는 영화로 우서 사건을 다루었다.
태평양전쟁 이후 대만인들은 일본 전쟁에 내몰렸다. 1945년 일본은 패망하면서 대만을 떠났다. 대만은 50년에 걸친 일제 강점기 역사에서 그렇게 해방을 맞는다.
- 1945년 이후 중국 대륙의 주인인 장제스의 국민당 세력의 지배
일본이 물러난 뒤 대만인은 일본 지배 이후 동족인 중국 국민당 세력에 속하는 것을 기뻐했다. 그러나 초기에 잠시뿐이었다. 1949년 국민당은 공산당에게 패배 후 본토에서 대만으로 완전 이전하여 장기집권한다. 패잔병인 국민당은 중국어를 하지 못하는 대만인을 폄하하고 기득권을 독식하며 장제스 독재정권 하에 부정부패가 쌓여간다. 대만인은 일본보다 더 무질서하고 악랄한 수탈을 일삼는 국민당의 착취 지배에 실망한다.
이민족 돼지(일본)가 사라지자 동족 늑대(국민당)가 왔다고 할 정도다.
1945년 이전에 와 있던 본성인과 외성인(국민당) 사이의 갈등과 불만이 축적되어 갔다. 한 번도 나라를 가져본 적 없이 피지배 계층으로 살던 대만인으로서는 동족인 중국인 지배보다 일본의 지배가 더 안정적이어서 그리워하기까지 했다. 현재까지 본성인과 외성인 갈등이 대만의 큰 문제로 존재한다. 지금도 대만은 일본을 동경의 대상으로 여기고 시기하지 않지만, 대만보다 못 살던 한국이 그들보다 치고 올라오자 경쟁과 시기 대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 1947년 2.28 사건 발발(대만의 제주 4.3 사건)
1947년 2월 27일 타이베이 시에서 전매국 단속원들이 밀수 담배를 팔던 한 좌판상 여인을 과잉 폭행하며 단속했다. 현장에서 이 광경을 보고 항의하던 대만인 한 명이 단속원에 의해 총격 살해되며, 본성인과 외성인 갈등이 격화된다.
28일 타이베이 전역에서 국민당 통치의 반부패운동, 파업과 시위로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했다. 이는 3월 1일 대만 섬 전역으로 확대된다.
국민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3월 8일 본토에서 2개 사단의 진압군을 불러들여 대대적인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며 진압한다.
학생과 무고한 시민들이 무참히 학살되고 정치 경제인 지도자들까지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정부 발표 2만 8천여 명 희생한 2.28 사건은 대만 전체의 산하가 피로 물드는 유례를 보기 힘든 대학살로 기록된다.
현재 대만인 가족들 중 2.28 사건과 무관한 사람을 찾을 수 없을 만큼 큰 상처였다.
대만은 원주민과 1945년 이주한 중국인,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한 뒤 몰려든 국민당으로 분열돼 있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1949년부터 1987년까지 38년을 계엄령으로 탄압 정치했다(중국 본토 수호 명분, 언론과 정치 자유 제한, 우리나라 일제강점기 36년보다 긴 탄압 기간).
1986년 9월 28일 계엄령 하에 본성인 중심의 130명이 민주진보당(민진당) 창당된다.
1987년 계엄령 해제 전까지 40년간 2.28 사건을 언급하는 것을 금기시했다.
장제스의 이러한 통치를 대만 역사가들이 좋게 볼 리가 없다.
- 1988년 본성인 출신 리덩후이(1988.01~2000.05 타이완 총통)가 직접선거에서 승리 후 국정 주도
리덩후이 정권 출범 후 '2.28 사건 진상 조사'가 진행됐다.
이때 2.28 사건 배후에 장제스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됐다. 사회 각 분야의 개혁 및 민주화가 발발됐고, 경제 발전도 성공하면서 정치 개혁과 경제 발전이 동시에 진행됐다.
1995년 2월 28일 48주기에 리덩후이 총통이 처음으로 희생자 가족에게 사죄하며, 2.28은 평화의 날로 지정됐다. 1997년 50주년에 2.28 기념탑과 기념관이 건립됐다.
- 2000년 최초의 본성인 정권 민진당 천수이벤 총통 당선
반세기 넘은 국민당 독재 정권을 민진당 천수이벤이 교체했다. 정치 개혁과 대만의 정체성 찾기 노력이 가속화하며, 2004년 재집권에도 성공한다. 그러나 천수이벤 가족 비리 사건으로 통치는 끝을 맺는다.
- 2008년 국민당 마잉주 총통 당선
2008년 국민당 마잉주가 당선되며 민진당에서 국민당으로 다시 정권을 가져온 데 이어 2012년 재집권에도 성공했다. 친 중국 행보로 민진당과 본성인들의 반발이 심화됐고, 경제 위기가 닥치면서 지지율이 급락했다.
- 2016년 민진당 차이잉원 집권
2016년 최초로 본성인이며 민진당 여성 정치인인 차이잉원이 집권한다. 중국 경제 의존율이 높은 대만으로서는 중국의 견제를 심하게 받게 됨으로써 경제 지표가 추락하며 지지율도 추락하여 총선과 대선의 민진당 승리가 불투명하다고 한다.
==> 대만의 과제: 양안 문제 해결과 정체성 지키기
국민당 - 보수 세력 / 북부 타이베이가 텃밭 / 친 중국(대만 중심으로 중국을 수복해야 한다 주장) /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이들은 현재 친공의 대륙주의자들로 변함.
민진당 - 진보 세력 / 서부와 남부 타이난이 텃밭 / 반중국(정권을 잡으면 중국이 대만을 심하게 견제하여 정치와 사회가 갈등 상황에 놓이는 경향) / 400년 동안 국가의식을 갖지 못한 대만의 주체성 문제 해결 / 일변일국, 독자적 국가를 세워 더 이상 중국의 일부가 아니라고 주장.
양안관계
대만과 중국의 관계로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수복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
1970년대 미중 외교가 시작하며 파국 / 중국과 무역하기 위해서는 대만과 단교해야 함 / 미국과 대만은 느슨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전통적 우방으로 대만 독립 보장 / 중국 불쾌
트럼프 대통령 당선 후 미국은 중국과 냉랭해지며 대만과 더 가까워졌다.
==> 중국은 대만의 내재적 모순에 상응하는 자신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 얼마나 주력하고 있을까?
현재 무리하게 억압하고 조정하려는 시진핑 주석의 통치를 보면...
대만 인구 구성(본성인, 외성인, 원주민 비율)
- 인구: 약 2,300만 명(한족漢族 98% 원주민 약 2%)
- 한족 중 본성인(대만인, 본성인) 84% - 명·청 시기부터 이주
- 한족 중 외성인(대륙인) 14% - 1949년 전후 국민당 정부와 함께 이주
한국과 대만
대만은 UN 상임이사국이었다. 미국이 중국과 수교하며 버림받고 나서 대만 기업가들은 자국 경제 흥왕에 투지를 불살랐다. 2018년 기준 2만 6천 불의 GNP, 외환보유액 세계 5위, 해외에 2천 억 이상을 투자하고 있는 투자 대국, 2012년 기준 대한 교역량 120억 불
==>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경제 무역 대국이 대만!
미국과 대만
미국은 북핵을 빙자해 중국을 견제하며 어떻게든 중국이 상승세를 타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미국이 중국 견제를 위해서라도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시키지 않는다. 대만은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 입장에서 영원히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과 같은 곳이다. 미국은 민진당을 지지.
트와이스의 대만 멤버 쯔위 사과 사건
대만을 어떤 위치로 볼 것인가의 문제 / 대만의 공식 국호는 '중화민국'이지만, 국제 경기와 회의에서는 '중화타이베이'로 참가 /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은 자신과 수교할 때 하나의 중국만 인정하도록 하며 대만을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게 함. / 대만은 청천백일만지홍기가 아닌 중화타이베이기를 올림픽기로 사용. / 중국의 중심은 대만이라는 국민당, 중국과 별개인 독립국가라고 주장하는 민진당. / 중국과 대만의 양안관계, 우리나라와의 국제법 문제에서 촉발된 사건.
==> 미성년자인 걸그룹 멤버 쯔위가 한국 예능 방송에 출연해 일본인 멤버들의 일본 국기 옆에서 청천백일만지홍기를 흔든 것이 과연 공개 사과할 만큼 잘못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