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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교진 Aug 08. 2019

대만 여행, 타이베이 4일 _셋째 날

삶은 설렘이 있어야 행복하다는 것을 절감하다

2월 16일

쓰쓰난춘

화샨 1914 원츄앙위엔취(화산1914문창원구)

대만프로야구 30년사

점심 - 치킨카레라이스, 밀크티

타이베이국제도서전(세계무역센터)

시먼띵

저녁 - 철판구이, 두부 요리





2월 16일 타이베이에서의 셋째 날 이야기를 8월에야 쓴다.

대만 여행은 풍광의 환희와 입맛을 돋우는 여행으로만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센과 치히로의 애니메이션 분위기를 만날 수 있고 음식과 패션, 고궁국립박물원의 어마어마한 볼거리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역사와 인문학의 인사이트가 가득하다. 다른 여행지의 휴식보다 좀 더 가치 있는 휴식을 느낄 수 있는 포인트가 우리와 대만 사이에 흐른다.

대만 여행 후 일상에 복귀해서 살아가는 게 여의치 않아 이 여행 기록을 쓸 여유를 낼 수 없었다. 더 늦춰서는 안 되겠다는 결단이 선 것은 최근 한일관계 악화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이 지정한 27개국의 수출 허가신청 면제 국가(백색국가) 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시킨 일이 대만 여행의 관심도를 높인 모양이다. 내 브런치에 대만 여행을 검색해서 들어오는 분들이 훌쩍 많아졌다. 올여름이나 가을에 대만 여행을 계획한 분들께 내가 다녀온 기록과 생각을 빨리 정리해 드려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됐다. 언젠가 한 번은 심각하게 치러야 할 한일관계의 과거사 문제가 더 이상 때린 놈의 추악한 왜곡으로 끝나지 않고 사실과 지성에 입각해 정리되는 토양이 되길 바란다.


타이베이에서 셋째 날은 이곳에 온 목적인 2019타이베이국제도서전을 관람할 일정을 세워두었다. 도서전 전시관을 오후에 둘러보기로 하고 숙소 앞 메인 스테이션을 걸었다. 오래된 기차가 전시돼 있어 사진을 찍었다. 최초로 운행한 기차인 듯 올드한 느낌었는데, 이런 기차를 만나면 묘한 그리움이 일렁인다. 떠나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가슴 아프기도 한 만남과 떠남의 옛 향수 같은 거.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언제 복잡한 서울 경기를 떠날 수 있을까.








쓰쓰난춘 _최대 번화가에 위치한 과거 국민당 군인들이 살던 마을


타이베이 101 역에서 하차 후 2번 출구로 나와 도보로 3분이면 쓰쓰난춘에 도착한다.

타이베이 최대 번화가 신이취 한복판에 색다른 작은 마을이 보전돼 있다. 2차세계대전 당시와 현대를 대비시킨 이 묘한 타임캡슐 같은 공간은 신비로운 탄성을 짓게 한다. 과거 이 마을은 무기를 만드는 44병공창의 남쪽이어서 쓰쓰난춘(四四南村)이라 불렸다고. 세월이 흐르면서 1999년 노후한 건물과 낙후된 시설을 재개발하려 했지만, 문화계 인사들의 부탁으로 이곳을 보존하기로 결정하고 2003년부터 '신이꽁민훼이관'이란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오래된 군인의 숙소였던 자리를 복합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쓰쓰난춘에는 전시장, 카페, 아이스크림 가게 등 다양한 현대의 타이베이 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으면서도, 과거의 오래된 시간이 골목골목 남아 있다. 바로 인근에 타이베이 101이 높이 솟은 모습이 보인다. 나지막한 자리에 둥지를 튼 이곳에서 바라보는 화려한 도시의 상징물은 대조적으로 펼쳐진다. 소소하게 산책하면서 베이글과 아이스크림 가게를 들러 맛보라고 알려져 있다. 매주 주말에는 심플 마켓(Simple Market)이라는 이름의 벼룩시장이 열려 다양한 상품들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북적인다고 한다.


대만에는 이러한 퇴역군인과 가족이 모여 사는 마을이 800여 곳 남아 있다고 한다. 당시 생활상을 볼 수 있는 사진과 가구를 관람할 수 있는데, 현대 문명 지점에서 보는 20세기 초의 모습에서 문득 어린 시절 향수가 떠오르기도 한다. 친근한 소품들 속에 오랜 전투의 고통과 절박함도 엿보인다. 폭격을 피하려는 참호 위 야트막한 언덕이 휴식 공간처럼 펼쳐져 있다. 번화한 거리의 바로 옆 평화로운 세상에 이런 2차세계대전 당시의 군인 마을을 걷다 보면 특유의 호젓함과 무상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지금처럼 발전한 만큼 잃어버린 것, 희생한 것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화샨 1914 원츄앙위엔취(화산1914문창원구) _양조장이 테마문화공원이 되다


나는 어렸을 때 서대문형무소 주변의 달동네인 현저동에 살았다. 지금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된 그 건물과 비슷한 느낌의 건물이 화샨 1914 원츄앙위엔취에 있는데 이는 과거 양조장이었다고 한다. 1987년 문을 닫기 전까지 대만에서 가장 큰 주류 제조공장이었다. 방치돼 있다가 2007년 2월 시민들을 위한 문화예술공원으로 변모시켜 개장했다. 이런 아이디어에서 배우는 게 많다. 무조건 파헤치고 허물어서 현대적인 세련된 모습의 재개발 아파트나 공원을 만드는 한국에 비해 대만은 양조공장을 보전시켜 가며 문화예술공원으로 멋지게 만들어 관광수입까지 얻으니 얼마나 다른가.


술을 제조하던 공장, 창고, 술 담는 도자기를 굽던 가마 공장을 모두 보전하여 시민 단체나 문화, 예술 단체에 임대했다. 패션쇼, 연극, 전시, 공연, 출판 박람회가 활기차게 열린다. 오래된 채로 색이 바래고 담쟁이로 둘러싸여 특유의 빈티지한 느낌을 감상할 수 있다. 가게마다 아기자기한 컨셉이 있고 신기한 볼거리가 있다. 야외 공간에는 버스킹 공연을 하는 무술가, 마술사들이 있어 시간을 두고 감상하기에 좋은 콘텐츠가 있는 곳이다.


대만 국민은 역사와 의미가 있는 건물을 낡고 오래됐다고 허물지 않는다. 오래된 것을 리뉴얼해 과거를 현재로, 미래의 유산으로 재탄생시켜 운치 있는 곳으로 만들어 여행객에게 즐거움을 준다. 자본주의에만 열중하지 않는 이런 모습을 배우고 반성하게 된다.






대만프로야구 30년사 _경기력이 중요하지만 문화가 더 중요하다


대만인이 사랑하는 야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전시회가 있어 유료 티켓을 끊고 들어가 보았다. 30년이 된 대만야구 역사와 문화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매년 우승팀이 결정된 결승 경기의 환호가 영상으로 보이고, 스타플레이어들의 유니폼과 야구 장비들이 전시돼 있다. 한국프로야구 태동 이후 이런 야구 역사를 담은 전시시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대만인의 야구 사랑은 훨씬 지극하다는 느낌이 전해져 온다.

아이 손잡고 온 아빠들의 얼굴에 야구 덕후만의 설렘과 환희가 서려 있다. 아이에게 자신이 경험한 야구팀과 선수의 정보들 하나하나 설명해 주는 아빠의 모습에서 괜스레 감동이 느껴져 울컥했다. 한국에 있는 우리 아이들 잘 있을까. 미안하고 사랑한다. 아빠가 너희들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 많은데 마음뿐인 날이 얼마나 많았던가.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점심 - 치킨카레라이스, 밀크티


야구특별전시관을 나와 부근에서 점심을 먹었다. 더위도 피하고 다리도 좀 아파서 깔끔해 보이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카레라이스를 먹었는데 맛이 괜찮았다. 바로 옆 테이블에는 불어를 쓰는 백인 남자 둘이 수다를 떨며 식사 중이었다. 밀크티까지 한잔 마시니 피로가 싹 풀렸다. 잘 먹어서 해소된 것도 있지만, 다음 행선지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 아닐까. 여행을 하며 느끼는 부분으로, 삶은 설렘이 있어야 행복하다는 것을 절감한다. 잘 먹어도 현실과 미래에 대한 설렘과 호기심이 없다면 별 감흥이 없는 게 인생이다.

 




레스토랑을 나와 국제도서전이 열리는 세계무역센터로 떠나기 아쉬워 목조 장난감 가게와 신기한 1인 버스킹을 감상했다. 아이들이 북적이는 곳이었지만, 어른인 내 눈에도 즐거움이 들어온다. 다들 아이디어로 살고 또 열심히 산다.




세계무역센터로 이동하는 거리에 십자가 교회가 보였다. 외국에 나가면 꼭 예배당에 한 번씩 들리게 된다. 같은 성경으로 이들은 어떤 공간에서 어떻게 예배할지 궁금하다. 이단인지도 분명하게 살핀다. 침례교로 확인된 교회 건물이 반가워 들어가니 작은 정원이 단정하게 꾸며져 있다. 2층 본당에 들어가 보았다. 강단 옆 오르간 곁에서 연습하는 이들이 눈에 띈다. 같은 종교를 믿는다는 것으로 친근하고 무장해제되어 마음이 편안해진다. 잠시 엄숙하고 거룩한 기분에 정결해지는 마음으로, 마흔여덟에 첫 해외여행을 나가본 뒤 네 번째로 경험하는 대만 여행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타이베이국제도서전(세계무역센터) _출판 대국, 독서 인프라 탄탄한 대만의 위엄


타이베이 세계무역센터에서 개최되는 국제도서전은 1987년 1회 도서전을 시작해 격년으로 열리다가 1998년 제6회 도서전부터 매년 2월에 열리고 있다. 2018년 제26회에 2월 6일부터 11일간 열렸으며 60개국 684개 출판사가 참여했고 1,180개의 행사와 활동이 진행됐으며 53만 명가량의 방문객을 끌어들였다. 이는 서울국제도서전의 3배 규모이다.


앞의 첫 글과 두 번째 글에서 설명했듯이 대만은 출판 대국이다. 인구 대비 신간 도서 출간 비율 579명당 1권으로 영국에 이어 세계 2위다. 출판사와 독서 인프라가 탄탄해서 우리나라 출판사보다 훨씬 강한 회사들이 숫적으로도 압도한다. 스마트폰이 널리 퍼져 있으면서도 우리보다 훨씬 책을 많이 읽는 곳임을 타이베이국제도서전에서 엿볼 수 있다. 홍콩국제도서전처럼 크지는 않지만 서울국제도서전보다는 크고 풍부해 보였다.


2019년 제27회 도서전은 2월 12에서 17일까지 열리는데 나는 16일 주말 오후에 관람했다. 가장 붐비는 시간이어서, 동행해 주신 형님과 길을 잃을까 봐 꼭 붙어 다녀야 했다. 해외 출판 부스도 많았고, 책의 종류와 부스의 특색이 인상적인 곳이 많아서 세심하게 둘러보는 건 좀 내려놓아야 했다. 여러 곳에서 저자 강연회 이벤트가 열리고 있었다.


중국 문단의 기인이자 무협소설의 거장인 김용 작가의 특별 전시 부스에 머물러 둘러보았다. 그의 글씨를 볼 수 있는 원고지까지 전시돼 있다. 무협소설을 즐기지 않아 읽어본 적 없지만 이런 전시를 통해 호기심이 생긴다. 방대한 유가의 군경에 통달하고 노자와 장자의 철학은 물론 불경에 심취하여 학문의 영역을 넓혀온 김용 작가님 작품에는 풍부한 상상력과 해박한 지식이 담겨 있다. 무려 신앙의 대상처럼 존경하는 독자가 천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대작가의 여러 작품을 기리는 전시답게 규모도 컸다.


한국특별문학전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페이스북 친구이기도 한 공지영 작가님 책이 다섯 권이나 보였다. 그 외 국내 베스트셀러 작품들이 여러 권 전시돼 있다. 한국관 판권 담당자와 잠시 대화를 나누고, 공지영 작가님께 진열된 작품 사진과 함께 문자를 보내 드렸다.


- 지금 타이베이국제도서전 한국문학특별전에 선생님 책 보고 반가웠어요.^^

바로 답 메시지를 주셨다.

- 아, 감사해요. 황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랜선으로만 뵙지만 이런 이유로 잠시 나눈 한마디 문자에 기쁨이 크다.


한국관 담당자가 지금 한국 작가와의 토크 시간이 열다고 알려주어 끝나기 전에 부랴부랴 찾아가 봤다. 손아람, 황정은 작가를 초청해 문학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이 진행됐는데, 내가 도착했을 때는 황정은 작가님의 이야기가 통역되고 있었다. '사회를 위한 문학, 문학을 위한 사회'를 주제로 한 대화였다. 이렇게 자신의 작품으로 해외도서전에 초청받아 생각을 나누는 작가님에 대한 부러움이 일렁이기도.

소설을 쓸 능력이 있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도전해 보기로 결심한다.


기독교 코너를 방문하는 걸 빼놓을 수 없다. 고 옥한흠 목사님의 책과 C. S. 루이스의 책 등 반가운 표지들이 보인다. 기독교인이 훨씬 많은 한국의 서울국제도서전보다 타이베이국제도서전의 기독교 코너가 더 크다. 천주교 책과 함께 진열되어 있기는 했지만, 종교 서적도 대만이 더 많이 본다는 방증이지 않을까.


내쇼널지오그래픽의 비주얼한 부스를 지나, 대만의 연도별 베스트셀러 전시회장을 보니 역시 지도자의 자서전이 큰 관심을 받고 있었다. 저자 파워가 중요하다는 건 새삼스럽지 않다. 국민당 마잉주에서 민진당 차이잉원으로 권력이 이양된 드라마가 어떻게 펼쳐질지 나도 궁금해진다.

내년에도 올 수 있을까.





시먼띵 _젊음이 가득한 거리


시먼은 고대 타이베이 시를 구축하고 있던 성문의 서쪽 지역이다. 타이베이의 명동이라고 비유되지만, 한국의 강남이나 홍대를 합친 것 같은 보행자 거리이다. 1950~1960년대에 대만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였다. 과거의 화려한 모습을 이어받아 백화점과 쇼핑몰이 즐비한 현대적인 거리로 조성하여 일본의 신주쿠에 비견되고 있다.


주말 저녁이라 지하철 출구를 통제할 만큼 젊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지하철 출구 앞의 넓은 광장에는 힙합그룹의 거대한 공연이 열리고 있어 사람들 속을 헤집고 나가야 했다. 젊은 에너지가 가득한 공연장을 겨우 빠져나오니 최신 유행의 의류, 가방, 신발 등을 판매하는 쇼핑 특별구역이 이어진다. 상점 사이로 현지 식당을 찾는 한국 관광객도 만날 수 있다. 늦은 밤까지 간식을 먹거나 상점을 돌아다니는 젊은이들이 가득하다.


100년의 시간을 품은 극장이라는 시먼 홍로우에서 사진을 찍었다. 일제 강점기인 1908년에 지은 타이베이 최초의 극장은 고풍스러운 붉은 벽돌의 외장재를 쓴 외관이 8면이어서 팔각극장이라고도 한다. 원래 1층이었으나 1945년 2층으로 개조돼 매일 밤 경극과 오페라가 상연되던 곳이다. 1950년대는 밤마다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그 후 흑백 무협영화와 시대극이 상영되면서 예술전용관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97년 문을 닫았다. 2002년부터 전시공연단체들의 공연이 올려지면서 예전의 생기를 되찾다가 2015년 리모델링 후 찻집과 상점, 공방이 입점해 있다. 드라마 야인시대에 나올 법한 곳이지만, 고풍스러움이 잘 간직돼 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저녁 - 철판구이, 두부 요리


국제도서전에 이어 시먼띵 거리까지 한참을 걸었더니 시장기가 돌았다. 적절한 식당을 찾다가 패키지여행을 온 한국 관광객 두 명을 만났다. 젊은 대학생으로 보이는 그들은 지금 자유 여행 시간이라 식당을 찾는 중이고 가이드가 알려준 곳이 바로 앞의 식당이라고 했다. 철판구이를 파는 그곳에 들어가 나란히 옆에 앉아서 저녁을 들었다.

우리의 김치, 마늘 냄새처럼 일본은 거리에서 독특한 간장 냄새가 나고, 대만은 취두부 냄새가 난다. 이 철판구이 식당에서도 두부 요리가 있어 취두부 특유의 냄새가 났다. 평범한 두부를 시켰는데도 살짝 취두부 냄새가 배어 있다. 한국이라면 벌칙을 받을 때 먹을 음식으로 삼겠지만, 처음 고약하게 느껴진 냄새가 조금씩 친숙해졌다. 취두부의 유래가 궁금해서 위키백과에서 찾아보니 재밌는 내용이 나온다.   


"처우더우푸(臭豆腐)는 소금에 절인 두부를 발효시켜 석회 속에 넣어 보존한 식품으로 향이 아주 강하다. 이것을 즐겨 먹는 사람들은 '냄새는 역겨워도 먹으면 고소하다. 실로 특이한 맛이다'라고 말한다. 처우더우푸는 왕치화(王致和)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청나라 강희제 때, 안후이 성에서 과거시험을 보러 북경으로 올라온 왕치화는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고 그만 낙방하게 되었다. 그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 고향으로 돌아갈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고 북경에서 두부장수를 하게 되었다.

개업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비는 구질구질 내리고 두부는 전혀 팔리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 두부는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밑천까지 날리게 될 판이었다. 생각하던 끝에 그는 곰팡이가 핀 두부를 소금물에 절였다. 그 후 두부는 푸른색으로 변했고 먹어보니 맛이 특이했다. 그는 처우더우푸 간판을 내걸고 팔기 시작했다. 한번 산 사람은 다시 사러 올 정도로 그의 가게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고 온 장안에 소문이 자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음식은 황제의 식단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출처: 위키백과)."


결국 과거 낙방한 사람의 자존심과 밑천을 날리게 된 손실의 아까움이 취두부를 탄생시키고 황제의 식단까지 들어가는 기염을 토했다는 이야기다. 사업에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강한 자존심과 환경적으로 따르는 운, 두 가지의 조화로 성과를 이룬 이가 대부분이다. 자존심 강하지만 선하고, 부자이지만 부동산 욕심 없는 그런 사람이 있을까. 현실은 형용모순으로 읽힌다. 취두부 유래 알아보다가 별 생각을 다한다.

철판구이에 더 젓가락이 많이 갔지만, 이 여행기를 쓰는 지금은 희한하게도 취두부 냄새가 그립기까지 하다. 다음에 대만이나 중국에 갈 기회가 생기면 정통 취두부에 한 번 도전해 보고 싶다.





셋째 날 마지막 코스인 시먼띵을 늦은 시간까지 돌아다니다 다리가 아파서 발 마사지를 받아 보기로 했다. 작년 여름 홍콩국제도서전 참관차 갔을 때 발마사지는 너무 약해서 좀 실망스러웠다고 얘기하니, 대만의 마시지 근로자는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 거의 나를 반 죽여놓았다.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러도 웃으면서 "아파?" 하며 계속 급소 같은 지점을 꾹꾹 눌러대는데 20분 정도가 지옥의 형벌과 같았다. 살살해달라는 말을 전혀 듣지 않던 그 대만 원주민처럼 생기신 분의 회심의 미소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앞으로 발 마사지받을 때 절대로 "스트롱!"을 주문하지 않으리라.


숙소에 돌아와 피로를 씻어주는 대만맥주 한 캔을 마시고 마지막 하루를 아쉬움과 설렘으로 보냈다. 내가 이런 호사스러운 대만 여행을 할 수 있을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여행을 도와주신 '아는 형님'께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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