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
2월 17일
타이베이한국교회 9시 예배
국립타이완대학
바오쨩옌 국제예술촌 寶藏巖
국립중정기념당(자유광장, 국가음악청, 국가희극원)
타오위엔공항 8시 25분 비행기로 귀국
타이베이에서의 마지막 날은 주일이었다.
한국에서 출국하기 전부터 주일예배를 드릴 교회로 타이베이한국교회를 정해 두었다. 1부 예배인 9시 예배에 맞추어 정든 숙소를 정리하고 교회로 향했다. 4일 동안 여행객 속에서 간간이 발견하는 한국 사람 외에 함께 예배드리며 만날 한국 사람을 생각하니 가슴이 설렜다. 대만에서의 마지막 날은 그렇게 예배로 시작했다.
타이베이한국교회 9시 예배
타이베이한국교회는 설립된 지 70년이 된 교회이다. 1949년에 세운 한인 교회가 타이베이에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1부 예배를 드리며 권상덕 목사님 말씀에 더욱 놀라운 은혜가 있었다. 이민자들의 가장 큰 소망은 번영과 건강일 것이다. 그런데 도쿄 3일 여행에서 예배한 도쿄온누리교회 문봉주 목사님은 기독교 인구가 0.7%밖에 안 되는 일본이 경제대국이면서 장수의 나라임을 강조하며 한국 동포들에게 돈과 건강을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참된 신앙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소망하라고 말씀하셨다. 타이베이한국교회의 권상덕 목사님 말씀은 한 발 더 나아가 부자 되기 원하는 번영신학이 얼마나 많은 문제를 낳는지를 서두에서 언급하며 예수의 산상수훈과 평지설교를 본문으로 제자도가 무엇인지 전해 주셨다.
한국 교회는 성경에 나오는 돈에 대한 경고들을 무시하고 번영, 번성, 축복을 강조하다가 지독하게 병들었다. 예수의 산상설교(마 5:1~12)와 평지설교(눅 6:17~26)에서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의 가난을 마음(심령)에만 국한시켜 버렸다. 그러나 여기서 '가난한 자'는 경제적인 가난도 말씀하고 계심을 명심해야 한다. 부자가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엄중한 경고를 가볍게 여긴 대가는 말할 수 없이 큰 재난으로 와 있다. 추악한 문제를 일으킨 뉴스의 중심인물 중에 부자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나는 이민자의 교회에서 단호하게 물질의 부를 좇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주일 설교를 들은 것이 감명 깊었다. 모국에서의 삶보다 훨씬 안정에 대한 열망이 깊은 성도들에게 '진짜 말씀'을 먹이시는 목자의 결의를 느낄 수 있었다. 여행객으로 잠시 머물다 가는 교회에서 경험한 진리의 말씀에 가슴이 숙연해졌다. 출구에서 목사님과 잠시 인사를 나눴다. 타이베이국제도서전에 참관차 왔다고 소개하며 간단히 악수한 것이 전부지만, 가난한 삶의 유익과 제자도를 실천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평생 가슴에 새겨야 할 말씀을 전해주신 것이 고마웠다.
타이베이한국교회에서 지하철로 향하는데 음식점 간판에 반가운 한국어가 보인다. 아마도 한인 교회 앞이라 한국인이 많이 애용하여 간판도 신경 쓴 듯하다. 여기서 춘천닭갈비라니...^^
국립타이완대학 _중화권 최고의 대학
국립타이완대학은 중국의 칭화대, 베이징대보다 우수한 인재를 배출하는 대학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대학교도 배출하지 못한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대학이다. 게다가 법학원은 타이완의 현재와 미래를 이끄는 최고의 인재를 길러낸 산실이다. 대만 총통을 지낸 천수이볜, 마잉주 그리고 현재 대만 총통 차이잉원이 모두 국립타이완대학 출신이다. 차이잉원 총통은 28살의 젊은 나이에 타이완 국립정치대학 부교수에 올랐으니 대단한 수재인 여성 정치인이다. 반(反) 범죄인 인도법안 시위로 10주째 격한 시위가 이어지는 홍콩 사태로 중화권의 국제 정세가 긴장된 요즘, 타이완 총통으로서 어떤 외교적 수완을 발휘할지 관심이 간다.
1928년 일본 '다이호쿠 제국대학'이란 이름으로 설립되었고 1945년 11월 '국립타이완대학'으로 개명했다. 11개 단과대학, 54개의 학과, 96개의 대학원이 있다. 정문에서 교정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중앙도서관에 이르는 길은 열대 야자수가 시원하게 뻗은 이국적인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야자수 길 좌측에 대학의 역사가 담긴 박물관이 있어 들어가 보았다. 명문 대학다운 도서관 책상과 역대 총장들에 대한 전시 그리고 기념품 가게 등 대학의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여행지에서 명문 대학을 방문하여 면학 정신을 들여다보는 것도 사뭇 흥미로운 경험이다.
중앙도서관 주변에서 만난 학생들은 공부 벌레라고 얼굴에 쓰여 있고, 백인 유학생도 종종 보였다. 학생 식당의 메뉴도 다채로웠고, 호수 주변의 풍경도 편안하여 수재들이 입학하고 싶은 마음이 학교의 외형에서도 절로 느껴진다. 중앙도서관 앞 계단과 호수 부근 벤치에서 한참 쉬다가 나왔다.
여행 출발 한 달 전에 아들과 다녀온 제주도에서 아끼던 에어빵빵 운동화의 에어가 터져 대만에는 등산화를 신고 왔다. 계속 평지를 걸어 다니다 보니 등산화는 무겁고 발이 아팠다. 대학가 주변 스포츠 매장에서 편안한 운동화를 한 켤레 사보려고 여러 매장을 둘러보다가 포기했다. 환전을 하지 못해 동행한 형님 신세를 져야 하는 것도 미안했고, 선호하는 에어빵빵 운동화를 사려니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대신 국립타이완대학 주변의 학생들이 잘 가는 시장 골목을 구경할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 나는 에어빵빵을 사지 못했다. 한 푼이라도 아껴서 다음 여행을 준비하고 싶고, 아들 둘 양육하는 데 드는 지출도 만만치 않기에...)
바오쨩옌 국제예술촌 寶藏巖 _아는 사람만 아는 숨겨진 여행지
한참을 걷고 정복을 입은 분께 여쭈어 바오쨩옌을 찾아갔다. 트레져 힐 아트 빌리지(Treasure Hill Art Village)라고 하는 예술인 마을이다. 나는 대만 여행 4일 중에 바오쨩옌 예술촌에서의 기억이 오래 남는다. 홍콩이나 일본 여행 가이드북에는 소개돼 있지만 한국 여행 책에는 소개돼 있지 않은 이곳은 멋진 관광지라고 하기에는 좀 독특한 곳이다. 강 옆에 자리 잡은 언덕으로 마치 옛날 가난한 마을의 국민학교 선생이 자신의 반 아이를 만나러 가정 방문하는 오르막 골목 계단과 비슷한 풍경을 만난다. 언덕 입구에는 독특한 그림의 지도가 보인다. 조용하고 한적한 느낌이면서 여러 관광객이 이 예술촌의 독특한 정취를 구경하고 있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언덕배기에 집을 짓고 사는 정취가 별것 아닌 듯하면서도 독특한 풍경으로 기억된다.
아기자기한 만화 같으면서도 가난한 시골 달동네 분위기와 예술가의 창작혼이 섞여 있다. 위에서 내려다본 마을의 모습과 멀리 흐르는 강 그리고 발전된 도시의 뷰가 어우러져 2시간 정도 걷는 길이 색다르고 지루하지 않다. 골목마다 특유의 벽화가 그려져 있고, 작은 문으로 들어가면 분위기 있는 카페를 만날 수 있다. 시야의 위치에 따라 여러 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 이런 언덕 자체가 보석 같은 여행지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최근에 뜨고 있는 타이베이의 핫플레이스라는데 우리나라도 무슨무슨 길 같은 건물값 올리다 저무는 도시 계획 말고 이런 예술촌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세련된 것만 좋은 것이 아니다. 소박함과 예술, 골목과 언덕, 가난과 불편의 향수를 조화시켜 놓아도 관광 명소가 될 수 있다.
대만에 다녀온 지 6개월이 흘러 이 글을 쓰면서 다시 가보고 싶은 가장 설레는 곳을 꼽으라면 바오쨩옌 국제예술촌이다.
국립중정기념당(자유광장, 국가음악청, 국가희극원)
대만의 북부 타이베이만 나흘간 둘러보면서 마지막 코스로 간 곳이 국립중정기념당이다. 타이베이의 웅장한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다. 1975년 4월 5일 장제스 총통이 서거한 뒤 타이완 국민과 세계 각지의 화교들이 자발적으로 기부금을 모아 세운 거대한 기념당이다. 1980년 3월 건립됐고 타이베이를 대표하는 인상적인 건축물로 자리 잡았다. 건립 당시 이름은 장제스의 호인 중정을 딴 '쭝쩡찌니엔탕(중정기념관)'이었으나 민진당의 천수이볜 정부가 탈중국화와 장제스에 대한 재평가의 일환으로 '국립타이완민주기념관'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다가 2008년 국민당의 마잉주가 집권하면서 장제스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긴다는 취지로 '쭝쩡찌니엔탕(중정기념당)'으로 복원시켰다. 어느 당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이처럼 장제스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니, 한국에 와서 내가 장제스 평전을 읽어보게 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공산당에 패한 뒤 1949년 대만으로 건너온 장제스는 대만 국민들로부터 국부인 동시에 군사통치 체제를 수립한 독재자라는 명암을 받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 기념당 이름은 논의의 대상이다. 기념당 입구의 아치형 게이트 상단 누각 현판의 '자유광장'은 그 유명한 왕희지의 서체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광장 양 옆으로 우리의 세종문화회관과 같은 문화공연장인 '국가희극원'과 '국가음악청'이 닮은 모습의 화려한 기세로 마주 보고 서 있다. 넓은 광장에는 유달리 모슬렘 여인들이 많이 와 있고, 사진 찍는 관광객과 휴일을 맞아 쉬러 온 현지인들이 가득하다. 25만 제곱미터의 광장을 가로질러 중정기념당의 계단을 올라가면 웅장한 크기의 장제스 동상을 만난다. 계단의 숫자는 장제스의 나이인 89개이다.
마침 4시에 시작한 그 유명한 근위대 교대식을 볼 수 있었다. 이 근위대 교대식은 중정기념당 최고의 이벤트다. 군인 중에 가장 수려한 키와 외모를 가진 이를 선발해 칼 같은 절도로 장제스를 향한 충성을 맹세하는 듯한 교대식에 관람객 모두 숨죽이며 지켜본다. 마지막 퇴장 후 손뼉 칠 때까지 그 위엄은 엄숙하게 홀을 매운다.
아래층의 전시실에는 장제스의 물품과 전쟁 기록, 대만과 동북아, 그리고 미국과의 역사적 관계들을 보여주는 전시품들이 있다. 특히 한국 관광 가이드들이 관광객을 몰고 다니며 설명하는 모습이 즐비하다. 문득 우리와도 깊은 연관이 있는 중국 근현대사가 궁금해졌다.
장제스의 실상은 어떤 존재였을까?
그는 김구가 이끄는 광복군의 독립운동, 특히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창호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제국의 주요 요인을 암살한 윤봉길에 깊은 감명을 받고 김구를 찾아와 중국이 하지 못한 일을 해낸 데 대한 존경을 표했다고 한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 처칠 수상은 한국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중화민국 대표로 참석한 장제스만이 한국의 독립에 적극적으로 힘을 실어 주었다. 우리 독립운동의 영향이 장제스에게 미친 것이다. 후에 그는 국공내전을 극복하고 일본을 몰아낸 뒤 대권을 쥐면 한국을 위성국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는 하나, 그가 한국의 독립과 건국에 큰 힘이 되어 준 건 분명하다. 1965년 박정희와 만난 사진도 중정기념당 전시실에 보관돼 있다.
중정기념당 전시실에서 흥미롭게 알게 된 사실이 또 있다. 중국 현대사를 이끈 세 여인, 송애령(쑹아이링), 송경령(쑹칭링), 송미령(쑹메이링)의 이야기다. <송가황조>라는 중국 역사 영화로 소개되기도 했다. 아버지 송가수(찰리 쑹)는 일찍이 개화한 유학파여서 세 딸을 모두 미국으로 유학 보낸다. 그 자신 또한 신학을 공부한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첫째 송애령은 거부이자 재무부 장관을 지낸 공상희와 결혼, 둘째 경령은 중국 국가지도자 손문과 결혼, 셋째 미령은 손문의 제자인 장제스와 결혼했다. 이 세 자매가 중국을 다스린 셈이다. 아버지 송가수는 구어체 성경을 인쇄 판매하여 거부가 됐다. 세 자매의 인생을 두고 중국인들은 송애령은 돈을 사랑했고, 경령은 조국을 사랑했으며, 미령은 권력을 사랑했다고 평한다.
한국에 돌아와 서점에서 장제스 평전을 구해 첫 챕터로 읽은 부분이 시안사변이다. 1936년 12월 12일 공산군 토벌을 위해 산시성 시안(西安)에 주둔 중인 장쉐량(張學良) 휘하의 구(舊) 북동군(만주군)이 난징(南京)에서 독전(督戰)을 위해 온 장제스(蔣介石)를 감금하는 하극상 사건이 벌어진다. 장쉐량은 상관인 장제스에게 더 이상 국공(國共) 내전으로 우리끼리 피 흘리지 말고 거국일치에 의한 항일(抗日)을 요구한다. 장쉐량이 납치한 장제스를 구해 온 것이 바로 장제스의 아내 송미령이다. 야사에 의하면 그녀와 장쉐량은 일찍이 썸을 탄 관계였다고 한다. 이 시안사건으로 중국의 역사가 바뀌고 세계사의 흐름도 바뀌었다. 마오쩌둥이 농민으로부터 힘을 키워 국민당의 장제스에게 역전승하여 대만으로 쫓아냈다. 장제스는 장쉐량의 요구 조건을 들어준 뒤, 하극상의 죗값을 받겠다고 맨몸으로 자수한 장쉐량을 죽이지 않았다. 대만에서 가택연금한 뒤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송미령은 UN에서 중국 대표로 연설할 만큼 뛰어난 여성이다. 그녀에게 반한 장제스는 부인이 있었지만 이혼하고 끈질기게 청혼했다고 한다. 장제스는 송미령과의 결혼 조건으로 종교를 기독교로 바꾸고 매일 성경을 읽고 일기를 쓸 만큼 철저한 기독교인이 됐다고 한다. 그의 정치에 얼룩으로 남은 대만에서의 장기 독재는 왜 기독교 신앙의 영향을 제대로 받지 못했을까.
타오위엔공항 8시 25분 비행기로 귀국
나는 귀국 비행기를 타면서 대만에 대해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역사 시험의 답을 맞히는 공부가 아니라 스스로 호기심 가득하여 알고 싶은 인문, 역사 공부에 불타올랐다. 중국의 근현대사와 유럽의 1차, 2차 세계대전까지 그 원인과 과정, 결과를 닥치는 대로 뒤져 보았다. 거대한 중정기념당을 본 뒤 내가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근현대사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았다. 역사 속에서 가난한 유년기를 보낸 뛰어난 지도자가 순간의 판단으로 수만 명의 목숨을 잃게 하고, 끔찍한 소용돌이 속으로 민중을 내몰기도 한다.
귀국 후 읽은 장제스 평전과 도서관에서 읽은 중국 현대사, 타이베이 관련 책들이 친근해진 것은 나흘간 타이베이를 다녀온 가장 큰 소득이다. 해외여행을 통한 지적 호기심의 자극, 그리고 마음의 평온! 타이베이뿐만 아니라 남서부의 운치와 낭만이 감도는 항구도시 '까오숑'과 문화와 역사가 스며 있는 고도 '타이난', 중부의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 '타이쫑'도 돌아볼 기회를 꼭 얻고 싶다.
생애 네 번째 해외여행인 타이베이 4일은 그렇게 소중한 추억으로 매듭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