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영화인 이유, 사랑의 섬세한 표현과 절제의 미학
겨울이 되면 영화 <러브레터>의 선율과 장면이 떠오른다. 그만한 영화가 또 있을까? 가슴 뭉클한 감정이 채워지며 음악까지 완벽한 최고의 작품이다. 영화의 장면이 내 과거의 실제 모습처럼 느껴지고, 음악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종영되면 뭔지 모를 아쉬운 눈물이 훅 들어오는 사랑 영화. 이제는 소녀 후지이 이츠키로 열연한 사카이 미키의 나이가 42살이 됐을 만큼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러브레터>가 안겨준 그 시절 십대의 시선은 순수함 그대로 가슴에 남는다.
<러브레터>를 다시 볼까 하다가 비슷한 일본 멜로 영화를 검색해 봤다. 많은 사람이 인생영화로 택한 영화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다. 난 왜 이 영화를 보지 않고 지나쳐 살았을까? 뒤늦은 후회와 호기심이 생겨 찾아서 감상했다.
아마도 제목만 보고 개연성이 엉망인 중국 영화라고 생각한 것 같다. 아니면 여주인공이 장애인이어서 장애 1급인 엄마를 병간호하며 살아온 내가 평소처럼 장애인 주인공 영화를 회피하는 습관에 스킵했는지도...
일본의 국민작가 중 한 사람인 다나베 세이코(1928년생으로 2019년 6월 10일 별세, 여성 독자들에게 인기가 많고 50년이 넘는 집필 생활로 600여 편에 달하는 작품을 썼다)의 작품인 것을 영화를 보고 나서 알았다. 원작은 국내 번역본 32페이지의 단편이라고 한다. 읽어보고 싶다. 어떻게 이 짧은 소설이 영화와 연극으로 펼쳐지며 감동을 안겨주었는지...
이동진 평론가는 원작보다 영화가 훨씬 낫다고 했다. 원작을 안 본 나도 영화로 표현된 이야기가 지금까지 본 영화 중에 가장 사실적이고, 연애 세포를 일깨우는 현실감 가득한 작품으로 손꼽게 되었다. 일본의 유명 멜로 영화들이 가진 초현실주의나 지나친 낭만주의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게 이 영화의 특징이다. 우리나라에는 2004년 첫 개봉 당시 스크린 수 5개의 소규모관에서 개봉돼 작품의 감동과 입소문만으로 4만 명이 관람했고, 2005년, 2006년에 이어 2016년에도 재개봉하며 명작임을 확인시켰다. (근데 왜 난 못 보고 지나쳤는지...)
프랑수아즈 사강이라는 프랑스 작가가 있다. 19세 나이로 처녀작 <슬픔이여 안녕>을 발표하면서 전후 세대 감성을 대표하는 국제적인 작가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이 심각한 때 나온 그녀의 소설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어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1954년 프랑스 문학비평상을 받았다. 19세에 쓴 첫 작품이 이렇게 뛰어난 명작이 되다니, 천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천재들처럼 사강의 삶은 불행했다. 순탄치 못한 결혼과 하룻밤에 인세를 모두 탕진하는 무절제한 생활, 신경쇠약, 수면제 과용, 정신병원 입원, 술과 도박, 마약 중독 등. 그녀가 마약 복용 혐의로 법정에 서서 진술한 유명한 말이 있다.
"나는 나 자신을 파멸시킬 권리가 있다."
그녀가 쿠아레라는 본명 대신 사강이라는 필명을 쓴 것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등장인물 이름인 사강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바로 영화 <러브레터>에서 남자 후지이 이츠키가 전학 가기 전에 찾아간 여자 후지이 이츠키에게 도서관에 대신 반납해달라고 부탁한 그 책이다. 이 책의 대출카드에 자신이 사랑해 온 흔적을 그려놓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가슴에 숨어서 잊히지 않는 첫사랑의 그 아름다운 시간을 찾아준 영화 <러브레터>의 중요한 매개체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온 사강이라는 이름을 쓴 프랑수아즈 사강이 쓴 책 <한 달 후, 일 년 후>가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 나온다. 여주인공 쿠미코가 남주인공 츠네오에게 자신의 이름을 조제라고 불러달라고 하는데 조제는 사강의 책 <한 달 후, 일 년 후>의 주인공 이름이다.
신기하게도 <러브레터>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두 영화가
프랑스 작가의 책으로 연결돼 있다.
1991년 일본의 정신과의사 오타 히로아키는 <파리 증후군>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 때문에 '파리 증후군'이라는 말이 알려졌다. 다른 문화에 대한 적응 장애와 문화충격을 기술한 책으로 프랑스를 유행의 발신지로 동경하여 파리에 이주해 살던 일본인이 현지의 관습이나 문화 등에 적응하지 못해서 정신적 균형감각이 붕괴되고, 우울증에 가까운 증상을 보이는 상태를 파리 증후군으로 설명했다. 주로 부유한 20~30대 일본 여성이 걸린 이 증후군은 기대감을 안고 파리에 갔는데 현지의 개똥 천지와 쓰레기 넘치는 길거리, 홈리스들, 무수한 흡연자들로 크게 실망한 나머지 생기를 잃은 얼굴로 귀국하는 현상에 명명됐다. 파리에서는 꿈과 기대를 가지고 와서 살다가 정신병에 걸려 돌아가는 이 현상이 오히려 명물이 됐을 정도라고 한다. 2000년대 이후, 중국의 해외여행이 증가하면서 중국인 관광객 중에도 파리 증후군을 겪는 사람이 늘고 있단다.
동경했던 곳에 살면서 환상이 깨질 수 있지만, 일본인이 파리에서 충격을 받고 정신병 발병으로까지 드러난다는 데서 그들이 얼마나 파리를 동경하는지 가늠할 수 있다. 1991년에 발간된 책 <파리 증후군>의 내용은 2004년에는 논문으로 등록되었다. 그만큼 일본인의 프랑스에 대한 기대감이 환상에 가깝다는 것을, 영화 <러브레터>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 등장하는 책이 프랑스 작가의 책인 것에서 연상된다. 누구나 다른 나라에서 직접 살아보면 알게 되는 것들이 적잖은 문화충격을 주겠지만 파리 증후군까지 있는 일본의 두 멜로 영화에 프랑스 작가의 책이 연관돼 나오는 건 단순한 우연 같지는 않다.
호랑이는 조제가 사랑을 시작하면 보고 싶은 동물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면, 호랑이를 보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덧붙이지만, 조제는 츠네오와 연인이 되자마자 동물원에 가서 호랑이를 가까이서 본다. 우리 안에 갇힌 호랑이지만 조제에게는 가장 무서운 동물이고 그 동물을 보기 위해서는 집이라는 갇힌 세계에서 떨어져 나올 용기가 필요했다. 호랑이가 무서운 게 아니고 집을 벗어날 수 있는 용기를 내어야 하는 장벽이 무서운 조제에게 자신의 연인은 용기를 주는 존재여야 했다. 츠네오가 조제를 집 밖으로 끄집어내어 준, 바로 처음으로 용기를 준 사람이다.
물고기는 물속에만 사는 동물로 조제 자신을 의미한다. 그 물고기들을 만나는 독특한 영화적 장치가 나오는데 이 장면이 참 슬프다. 조제는 자신의 사랑이 이미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다시 자기 자신과만 대화하는 밑바닥 세계로 돌아간다. 자, 이제 영화에 대한 얘기를 시작한다. 스포일러가 있으니 영화를 볼 사람은 여기까지만 읽기를 바란다.
남자 주인공 츠네오 역의 츠마부키 사토시는 한국에 일본 영화 붐을 일으킨 배우다. 하정우와 <보트>라는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고, 이상일 감독의 <분노>에도 출연하며 한국 영화에 관심을 가진 배우로 알려져 있다. 천진난만한 웃음의 미소년 얼굴을 가진 배우로 이 영화에서 자유로운 연애를 즐기는 대학생으로 나온다.
대학 졸업을 앞둔 츠네오는 심야에 마작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카지노 같은 곳인데 손님들에게 필요한 서빙을 하다가 다른 직원을 대신해 마작에 참여하기도 한다. 여기서 손님들 사이에 오가는 괴소문을 듣게 된다. 꼬부랑 노파가 매일 새벽 아무도 없는 시간에 큰 유모차에 뭔가를 숨겨두고 지나간다는 것이다. 그 유모차에 마약을 넣어두고 조폭의 심부름을 하는 게 틀림없다는 노름꾼들의 말을 듣고 있을 때 츠네오의 손에 평생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잭팟이 터진다. 하필이면 대타 직원으로 투입됐을 때, 최고의 행운이 터진 것에 시무룩한 그날 새벽에 알바를 마치고 강아지와 산책할 때 그 괴상한 노파의 유모차를 만난다. 경사로에서 갑자기 노파의 손을 떠나 굴러 떨어진 유모차 안에는 뜻밖에도 성인 여자가 숨겨져 있었다. 하마터면 그녀가 휘두르는 칼에 베일 뻔했다. 노파는 자신이 돌보는 손녀라며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어서 유모차에 숨겨 새벽에 산책을 나온다고 설명한다. 츠네오에게 미안해하며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집에 초대한다.
일본 사람들은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츠네오는 식사 초대를 사양하지만 마지못해 노파의 집에 들어가 아침을 먹는데 반찬으로 나온 달걀말이 맛이 일품이다. 맛있다고 하니 싱크대 쪽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쿠미코가 말한다.
당연하지! 내가 만든 거니까. 배가 아플 수 있으니 조심해. 달걀 껍데기에 새똥이 묻어 있었어. 살모넬라는 식중독 원인 균의 삼분의 일을 차지해.
좀 신비로워 보이는 쿠미코의 목소리에는 생기가 담겨 있지 않았다. 츠네오는 자신과 나이가 비슷해 보인 그녀가 궁금해졌다. 집에서만 지내는 그녀의 유일한 소일거리는 할머니가 주워온 책들을 읽는 것이다. 책에서 읽은 똑똑한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는 쿠미코의 음성에 고독이 가득 스며 있다. 청순한 얼굴과 달리 이미 인생을 다 산 듯한 건조한 분위기다. 그녀는 이름을 묻는 그에게 자신을 조제라 불러달라고 한다.
일본에 마비키라는 풍습이 있다. 마비키는 '솎아내기'라는 뜻이다. 에도 시대에 태어난 아기를 엄마가 목졸라 죽이는 끔찍한 일이 성행했는데 이를 마비키라고 한다. 에도 시대의 극심한 식량난 때문에 유래했지만, 일본은 20세기에 들어서까지 마비키를 근절하기 위해 애써야 할 만큼 뿌리 깊은 풍습이다. 에도 말기의 농학자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는 "데와(出羽, 현재의 야마가타와 아키타)와 오슈(奥州, 현재의 아오모리, 이와테, 미야기, 후쿠시마)에서 매년 1만 6, 7천 명, 가즈사(上総, 현재의 치바현)에서는 갓난아기 3, 4만 명이 매년 솎아냄(마비키) 되고 있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당시 일본을 방문한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일본의 여성은 기를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면 아기 목을 다리로 눌러 죽여버린다"라고 기록했다.
마비키가 성행한 이유는 봉건적 인두세와 더불어 과도한 징세로 가난한 하층민에게는 일용할 양식을 축내는 '새 식구'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즉, 식비 조절을 위해 당장 먹는 입을 하나라도 줄이려고 영아 살해를 시행한 것이다. 그만큼 노동력을 제공할 나이로 자랄 때까지 기를 만한 성인보다 덜먹는 어린아이가 먹을 만큼의 여유가 없어 생겨났다. 실제로 에도 시대에는 이런 과도한 징세 때문에 잇키라고 불리는 민란이 빈번했다. 가정에 새 생명이 태어나면 경사스러운 일이지만, 당시 가난한 서민에게는 오히려 가족의 생사가 걸린 문제였다. 결국 마비키는 그런 암울한 빈곤 속에서 전 가족이 굶어 죽지 않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그런데 이 마비키의 현대적 모습이 장애인 혐오로 드러나 있다. 롯본기 김교수의 책 <굿바이 일본>에 보면 김교수가 일본 여성과 결혼 후 아내가 아이를 가졌을 때 일본인 장인 장모는 태아가 장애인이면 고생스럽게 키우지 말고 너희 인생을 위해 낙태하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고 한다. 마치 사위와 딸의 평안한 결혼생활을 위해 장애인 자녀는 태어나기 전에 솎아내는 것이 낫다는 그들의 문화에서 마비키가 연상됐다고 한다.
2016년 7월 26일 일본 가나가와 현 사가미하라시의 한 장애인 시설에서 장애인 19명이 살해당한 참극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일본 사회의 다양한 논의를 이끌어냈다. 용의자 우에마쓰 사토시는 범행 후 "아름다운 일본"이라는 말을 트위터에 남기며 평소 "장애인은 살아 있어도 어쩔 수 없다. 안락시키는 것이 좋다"는 등의 이야기를 한 위험인물이다. 죠슈신문은 “이 사건은 단순히 ‘대마초에 빠진 정신질환자가 일으킨 사건’으로 보고 끝낼 수 없다. 끝없이 약자를 배척하고, 개인의 책임과 노력만을 강요하는 사회구조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즉, 장애인이나 노인 또는 빈민을 짐짝으로 치부해버리는 지배적 사상에 기인”한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일본 보수 우익 정치인사인 이시하라 신타로 의원이 “저런 사람(장애인)에게도 인격이 있는 건가”, “저런 문제(장애인의 삶)는, 안락사 등으로 이어지겠다는 생각이 든다” 등의 발언을 해왔던 것을 근거로 들었다.
즉, 이런 우생학적 사상에 기반을 둔 혐오범죄가 일어나는 사회 분위기와 마비키 풍습이 있는 나라에서 할머니는 유모차에 담요를 씌워 새벽 시간에 조제를 몰래 산책시키며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멜로 영화에 웬 인문학, 사회학적인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가 싶겠지만, 요즘 내 관심사가 문화인류학이어서 흩어져 있던 머릿속 단서들이 이 영화를 보며 모아졌다. 이런 관점도 있는 영화 평으로 한 걸음씩 공부하게 되니까.
덧붙여 일본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바꾸게 된 계기에 레나 마리아라는 스웨덴 장애인 여성이 있다. 우리나라에 유석인 번역작가가 번역한 <발로 쓴 내 인생의 악보>라는 책으로 소개된 레나 마리아는 1988년 서울 패럴림픽 수영에 참가해 금메달을 따기도 한 CCM 가수이다. 천상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그녀가 인생 말년에 살고 싶은 나라로 일본을 택한 바 있다. 팔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의 몸으로 노래하는 그녀가 일본에 끼친 파장이 크다. 그녀의 존재 전후로 일본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확연히 깨졌다고 한다. 일본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통념을 고쳐 준 레나 마리아를 천사로 존중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에 레나 자신도 감동하여 자주 방문한다고 한다. 실제로 레나 마리아를 빈번하게 초청한 나라가 일본이다.
츠네오는 조제가 만들어 준 밥이 먹고 싶어졌다. 밥 먹으러 왔다며 그녀의 집을 다시 찾는다. 그는 맛있는 밥을 해준 조제를 한 사람의 인격체로 대한다. 음식은 두 사람의 첫 만남에서 마음을 열어 대화시켜준 부드러운 도구이며 그녀의 집으로 그가 가도록 만드는 요소다. 집구석에서 책만 읽는 조제가 불편하게 지내는 모습을 본 츠네오는 주민센터 복지과를 연결해 할머니와 그녀의 집을 고쳐준다. 공무원을 찾아가면 복지혜택이 잘 되어 있는데 장애를 드러내지 않고 혜택을 알아보지 않으니, 츠네오가 세상과 조제의 공간을 연결하는 다리가 되어 준 것이다. 심지어 집 공사 중에도 조제는 벽장 속에 숨어 몸을 감춘다. 다른 여자들과는 나누지 못한 대화를 이어가던 츠네오는 조제를 설득해 할머니가 싫어하는 대낮 산책을 감행한다. 스케이트보드를 유모차에 장착하여 조제에게 사람들과 세상 풍경이라는 바깥공기의 자유를 빠른 속도감으로 선사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시원한 장면이 츠네오가 조제를 태운 유모차 보드를 밀고 달리는 장면이다. 너무 빠르게 달리다가 엎어지면서 조제는 하늘을 본다.
저 구름도 집에 가져가고 싶어
지붕만 보던 그녀가 태양 아래서 츠네오와 함께 하늘을 보는 장면에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누가 봐도 둘이 사랑하게 될 것 같다. 조제에게는 자유가, 츠네오게는 자신이 지켜주고 싶은 대상이 생긴 것이다. 조제의 장애는 부끄러운 걸림돌이 아니라 츠네오와 연결시켜 준 디딤돌이 되었다. 우리 인생에 나만의 쓴 뿌리가 얼마나 깊은 상처와 족쇄로 작용하는가.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그 쓴 뿌리가 사랑의 통로로 작용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 조제처럼 찬란한 행복을 경험하게 될 선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츠네오는 자신의 시간을 조제에게 사용하는 것을 즐거워하지만 아직까지 사랑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제는 이미 츠네오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을 느끼고 있다. 장애를 가진 사람은 예민하다. 그리고 자신이 절제해야 한다는 심리를 지나치게 적용한다. 츠네오가 만나고 있는 카나에(우에노 주리)라는 매력적인 존재를 알게 된 조제는 그를 멀리하고 자신을 다시 벽장 속에 가둔다. 조제를 찾아온 츠네오에게 할머니는 창문도 열어주지 않고 말한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게 남 노는 대로 놀다가 벌 받아.
총각, 제발 부탁인데 여긴 오지 마.
저 아이는 몸이 불편해서 댁 같은 사람은 감당할 수가 없어. 알겠지?
잘 가쇼. 몸 건강하고.
할머니의 말은 극사실주의다. 조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인생을 바꾸는 것이다. 일상의 욕구를 참아야 하고, 답답함, 끈기, 인내, 긴장이 따른다. 늘 좋기만 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할머니는 이 몇 마디로 조제를 단정 짓고 츠네오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명시하지만, 할머니에게 조제는 자신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곁에서 책임지고 돌봐야 하는 큰 짐이고 버릴 수 없는 가족이다. 누가 대신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맡기고 싶은 존재도 아니다. 헌신하는 사람에게는 사실만 보이고, 대안에는 어둡고 또 현실적이 된다.
조제의 집 밖에서 할머니의 건조한 말을 들은 츠네오는 원래의 자기 삶으로 발길을 돌린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 복지 관련 일을 하려고 면접을 보러 갔다가 조제의 집을 고쳐준 공무원을 만나 우연히 조제의 소식을 듣는다. 얼마 전 조제의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지금 조제는 혼자 살면서 장 보기도 불편할 거라고... 그 얘기를 듣자마자 츠네오는 조제에게 달려간다.
조제의 공간에 츠네오가 다시 찾아왔다. 둘은 마치 어제도 만난 것처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이 영화의 특징이 감정의 과장이 없다는 것이다. 평범한 대화 같은 분위기 속에 수많은 감정이 절제돼 있다. 조제는 다시 찾아온 행복한 만남이 주는 통증 때문인지 갑자기 츠네오에게 가버리라고 말한다. 츠네오는 그녀가 힘들어하는 것 같아 조용히 등을 돌리는데 조제가 기어와 그의 등을 때리면서 흐느끼며 말한다.
가버려! 가란다고 진짜로 갈 놈이라면 가버려!
그녀가 츠네오를 붙잡기 위해서는 역설적인 화법이 필요했다. 제발 곁에 있어 달라는 부탁을 하기에 얼마나 미안한지 잘 아는 자신은, 가서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하면서 영원히 곁에 있겠다는 츠네오의 말을 기다린 것이다.
츠네오는 조제와 호랑이를 보러 간다. 이제 츠네오가 있으니 조제는 언제든 집 밖으로 나올 수 있다. 동물원 우리 안에서 으르렁 거리며 다가오는 호랑이의 시선을 피하며 조제가 말한다.
꿈에 볼까 봐 무서워.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제일 무서운 걸 보고 싶었어.
남자가 안 생기면 호랑이는 평생 못 봐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게 되네.
어린아이 때 가져보는 일상을 이제 사랑하는 남자가 생기면서 경험하는 조제. 그녀의 말에는 행복한 심정이 절제된 대사로 담겨 있다.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살아온 자신을 집 밖의 세상으로 끄집어내 준 츠네오. 그가 곁에 있으니 꿈에 볼까 무서운 호랑이도 보게 되었다. 용기를 선물해 준 남자, 츠네오가 조제에게 최고의 연인인 이유다. 그녀는 스스럼없이 말하고 자신의 장애 때문에 자격지심을 갖지도 않는다. 당당하고 편안하다. 사랑을 시작한 두 사람의 마음은 깊고 아름답다.
츠네오 집안에 제사가 다가왔다. 일본은 각 지역에 흩어져 살다가도 고향의 축제와 제사는 반드시 참석한다. 만나는 여자를 가족에게 인사시킨다는 건 결혼을 의미한다. 그 결혼 앞에서 츠네오는 현실적인 고민에 잠긴다.
일단 츠네오는 조제를 렌터카에 태우고 출발한다. 처음으로 자동차를 탄 조제는 며칠 전부터 도시락, 과일, 녹차를 준비했다. 여행 필수품이라며 말이다. 조제에게는 츠네오와 함께 어디론가 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행복한 선물이다. 일본에서 사랑하는 연인과 기차여행을 할 때면 아키벤이라는 도시락이 필수이다. 비록 기차여행은 아니지만 조제에게는 첫 장거리 여행의 신선한 시간이다. 그녀는 츠네오와의 여행을 위해 자신이 준비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자신의 세계를 떠나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현실에 흥분한다. 츠네오도 조제가 기뻐하는 모습에 웃음 짓는다. 그는 고향에 가기 전에 수족관에 들러 조제에게 물고기를 구경시켜 주기로 한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하필이면 그날 수족관이 휴관일이다. 어떻게 생애 첫 수족관이 내게 이럴 수 있냐고 분노하는 조제. 그녀는 츠네오의 등에 업힌 채 화를 참지 못한다.
왜 하필 내가 왔을 때 문을 닫냐고!
이 사건은 츠네오에게 한계를 안겨준다. 자신이 이해하는 지점과 조제가 요구하는 지점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두 사람이 탄 차가 터널을 지날 때 조제는 명랑한 얼굴로 터널의 조명에 비친 자신의 손 색깔을 신기해하며 말을 건네지만, 츠네오는 갑자기 무뚝뚝해져 있다. 운전하고 있으니 방해 말라고 말한다. 마치 내 인생에 너는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암시가 담겨 있는 듯하다. 두 사람의 이별이 다가오는 걸까, 조마조마해진다.
츠네오는 평생 장애인 아내를 책임지며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얼굴이다. 조제가 화장실에 있을 때 집에 먼저 내려와 기다리던 동생과 전화 통화를 나누다가 동생의 말이 카운트 펀치로 날아온다.
형, 이제 지친 거야?
장애인 화장실 안에서 일을 보던 조제에게 웃으며 다가간 츠네오. 갑자기 조제를 꼭 끌어안아 준다. 말을 하지 않지만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공기가 대신 말해주는 듯하다.
'조제, 내가 너무 미안해. 널 잠시 힘들어했던 거 정말 미안해'라고...
뭔가 어색함을 느낀 조제는 츠네오에게 바다에 가자고 한다. 거기서부터 조제는 츠네오의 집에 가는 대신 이별여행을 하자는 뜻을 숨기고 있다. 츠네오는 바다를 향해 운전대를 돌린다.
처음 와 본 조제의 바다, 츠네오는 이건 강이라며 농담을 건넨다. 두 사람의 얼굴에 행복이 가득하다. 하얀 조개껍질을 줍고 반짝이는 해변을 걷는다. 조제를 업고 바닷물에 발이 젖는 츠네오도 즐거워 보인다. 더 이상은 진전시킬 수 없는 한계가 바닷가라는 공간에 숨어 있지만, 조제에게 처음인 해변은 아름답기만 했다.
- 조제, 휠체어를 사야겠어.
- 싫어. 난 이렇게 업히는 게 좋아.
- 나 좀 봐주라.
- 오늘밤 너에게 세상에서 가장 야한 섹스를 선물할 거야.
조제가 말한 세상에서 가장 야한 섹스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사랑을 뜻한다. 그날 두 사람은 수족관을 못 간 대신 수족관 컨셉의 호텔 방에서 밤을 지낸다. 벽과 천장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신비로운 방이다.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보며 조제가 말한다. (이 장면 때문에 이 숙소의 조제와 츠네오 방을 찾아가 보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물고기 벽지가 그대로 있다고.)
- 멋있다! 츠네오. 있잖아, 눈 감아 봐. 뭐가 보여?
- 그냥 깜깜하기만 해.
- 거기가 옛날에 내가 살던 곳이야.
- 어딘데?
- 깊고 깊은 바닷속. 난 거기서 헤엄쳐 나왔어.
- 왜?
- 너랑 세상에서 가장 야한 섹스를 하려고.
- 그랬구나. 조제는 해저에서 살았구나.
- 그곳은 빛도 소리도 없고, 바람도 안 불고, 비도 안 와. 정적만이 있을 뿐이지.
- 외로웠겠다(츠네오는 잠든다).
- (조제의 혼잣말) 별로 외롭지도 않아.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냥, 천천히 천천히 시간이 흐를 뿐이지.
난 두 번 다시 거기로 돌아가진 못할 거야.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질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지는 않아.
난 조제의 이 고독한 대사를 쓰면서 영화를 보는 동안 흐르지 않던 눈물을 참고 있다.
조제의 세계는 바닷속 깊은 혼자였다. 츠네오의 사랑 덕분에 헤엄쳐 나왔지만 이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를 말하는 그녀의 고독한 음성에 지금까지 많이 행복했다는 고마움과 데굴데굴 굴러다니더라도 견뎌내겠다는 의지를 느낄 수 있다.
마치 아침에 집을 나서는 평범한 일상과 같다. 츠네오는 구두를 신고 조제의 집을 나서는데 이것이 두 사람의 이별 장면이다. 이렇게 절제된 이별 장면은 다른 멜로 영화에서 볼 수 없는 이 영화만의 백미이다. 떠나는 남자나 떠나보내는 여자나 조금도 슬픈 기색을 표현하지 않는다. 마치 "갈게", "응, 잘 다녀와" 하는 모습이다. 그래서 더 슬프다. 조제는 츠네오에게 이별 선물이라며 두 사람을 연결시켜 준 잡지를 건넨다. 조제의 집을 나오며 츠네오는 독백한다.
담백한 이별이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사실 하나뿐이었다.
내가 도망쳤다.
조제의 집 밖에는 예전의 연인인 카나에가 기다리고 있다. 츠네오는 카나에의 곁으로 걸어가지만 그 모습이 나쁜 남자로 느껴지지 않는다. 평범한 사랑을 하기로 결심한 그에게 문제 삼을 부분은 없다.
그런데 조제의 집과 멀어지는 지점에서 츠네오는 걸음을 멈추고 갑자기 오열한다.
츠네오는 다시 돌아갈 수도 만날 수도 없는 조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이 절제된 울음에서 극도의 슬픔을 간단하고 깊게 보여준다. 헤어지고 친구가 되어 만나는 여자도 있지만, 그는 조제가 자신을 만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다음 엔딩신이 휠체어를 타지 않겠다던 조제가 전동휠체어를 타고 씩씩하게 장을 보고 지나가는 장면이다. 츠네오에게 의지하지 않고 홀로 서기 하며 집 밖으로 용기 있게 나온 조제의 휠체어 탄 모습에 씩씩함이 담겨 있다. 나는 멜로 영화들 중에 최고의 엔딩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라고 생각한다.
장애인 여자와 비장애인 남자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매우 현실적이어서 더 아름다워 보인 사랑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끌려가지 않고 자신을 점차 성장시켜 가는 이야기, 조제와 츠네오에게는 진짜 사랑을 해 본 경험이 평생의 추억과 선물로 남을 것이다. 희생하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 자신에게 당당한 사랑 말이다.
나에게 진짜 사랑은 언제였을까?
그리고 왜 이토록 자극적이지 않고 깊은 사랑 영화를 한국에서는 볼 수 없을까?
중년 이상의 한국 남자들이 공식석상에서 하는 구태의연한 말이 있다.
"곁에서 아내가 희생해 주어 고마웠습니다."
그럼 여자는 남편과 가족을 위해 평생 희생하고 섬기며 사는 것이 미덕일까? 한쪽이 희생하는 것, 그것이 당연시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조제처럼 자신을 깊이 만나고 성숙하고 새로운 세계로 발을 디디는 용기를 주는 사랑이 진짜 아닐까? 츠네오처럼 현실적이면서 자신도 상대방도 함께 생각하는 사랑이 진정성 있는 사랑이 아닐까?
나는 지금 진짜 사랑을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