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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교진 Aug 15. 2019

콰이강의 다리 _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The Bridge On The River Kwai, 1957


 




2019년 8월 15일 광복절인 오늘, EBS에서 방영한 특선 영화 <콰이강의 다리>를 보았다. 아쉽게도 처음부터 감상하지는 못하고 중반 이후 다리 파괴 특공대가 투입되는 장면부터 보았다. 내 무릎 위에서 9살 둘째 아들도 집중하며 감상하다가 질문한다.


"왜 다리를 폭파하려는 거예요?"

"같은 군복 입은 사람들끼리 왜 싸우는 거예요?"


그러게 말이다. 아들아.

다리를 완공하고 공병대가 행군하며 부는 휘파람 소리가 결코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이 영화에 들어 있는 인간다운 삶, 신념, 전쟁의 미친 짓의 상징을 보면 휘파람의 멜로디가 묵직하기만 하다.

명작을 너무 늦게, 그것도 TV로 후반부만 본 것에 자책감마저 든다.




<콰이강의 다리>는 1957년 작품이다.

우리나라에는 1981년 개봉되어 당시 서울 관객 18만 명이 관람한 흥행 성공 영화였다고 한다.





1957년 아카데미 7관왕을 기록했다.

원작자는 <혹성탈출>을 쓴 프랑스의 피에르 불(1912~1994)이다. 1952년 출간 작품이 1954년 영어로 번역됐고, 1957년 영화화됐다. 아카데미 각색상을 각본가가 아닌 원작자 피에르 불이 수상했다고 하는데, 이유는 각본가들이 매카시즘(극단적이고 초보수적인 반공주의 선풍. 또는 정적이나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처벌하려는 경향이나 태도. 1950년대 초에 공산주의가 팽창하는 움직임에 위협을 느끼던 미국의 사회적 분위기를 이용하여 매카시가 행한 선동 정치에서 유래)으로 인해 이름을 공개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어쩔 수 없이 프랑스인 원작자에게 수상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영화는 데이비드 린 감독이 만들었다. <올리버 트위스트(1948)>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 <닥터 지바고(1965)> 등을 감독한 거장이다.

1950년대 제작된 작품답게 CG가 등장하지 않는다. 특이하게도 전쟁영화이면서 전투신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스토리는 1943년 태평양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일본 군대가 전쟁 포로를 동원해 미얀마와 태국 사이의 415킬로미터의 철도를 건설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태국의 밀림 속에서 영국군 공병대가 일본군 포로수용소에 잡혀온다. 일본군은 이들의 노동력으로 콰이강에 다리를 건설할 계획을 세운다. 일본군 수용소장 사이토 대령(Colonel Saito: 세슈 하야카와 분)과 영국군 공병 대장 니콜슨 중령(Colonel Nicholson: 알렉 기네스 분)이 대립하다가 다리 건설의 주도권을 니콜슨 중령이 잡고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부하들을 독려해 완공해 간다.





내가 감상하기 시작한 부분은 연합군이 특공대를 조직해 콰이강 다리 폭파 임무를 띠고 태국 밀림에 투입되는 장면부터다. 낙하산 투하로 1명이 사망하고, 태국 여자들을 짐꾼으로 동원해 거머리가 득실거리고 길이 없는 정글의 수풀을 헤치고 목적지로 향한다.


특공대 대장은 태국어에도 능통한 유능한 지휘자다. 그는 전쟁 영웅으로의 신념만 투철하다. 계곡에서 만난 일본군을 사살하고 본인도 다리에 부상을 입지만, 자신을 조금도 돌보지 않는다. 그의 휘하에 있던 소령은 인간다운 삶이 먼저지 영웅이 되어 산화하려는 신념은 쓰레기라며 '부상자인 자신을 버리고 가서 임무를 완수'하라는 대장의 지휘권 양도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 짐꾼으로 따르는 태국 여자들이 구조 들것까지 만들어  따뜻한 어머니 같은 모습으로 이들을 옆에서 돕는다.


결국 콰이강의 다리 부근까지 도착한다. 대장은 작전 명령을 내리고 부하들은 목숨을 걸고 폭탄을 설치한다.

이 전쟁의 아이러니는 같은 아군인 영국군 공병대다. '이 지역 후손들에게 필요한 다리'라는 신념만 있지, 일본군의 제국주의를 확장해 갈 군수물자가 이송되는 전쟁의 도구라는 헤아림은 없다. 그저 자신들이 열악한 조건에서도 예술작품처럼 아름답고 튼튼하게 다리를 만들어 냈다는 성취감이 가득하다. 무엇을 위해서인지, 왜 이토록 튼튼하고 아름다운 다리를 만들어 냈는지에 대한 성찰은 없다.   


콰이강의 다리가 완공된 날 밤, 그들은 자신들의 수고를 축하하는 위문공연을 연다. 그 사이 특공대원은 뗏목에 폭탄을 싣고 강을 통해 다리에 접근한다. 완공된 다리 위에는 일본 장교 사티오 수용소장과 니콜슨 중령이 친구가 되어 나누는 대화가 들려온다. 니콜슨은 27년의 전쟁터 생활 중 집에 있던 날은 10개월도 안 된다며 자신의 속내도 털어놓는다. 부하들에게 존경받는 군인이지만 이 다리의 역할에 대한 생각은 깊지 않다. 다리의 위용은 자신의 또 다른 군인정신과 자존심의 결정체다. 그저 완공된 다리에 대한 자부심만 가득하다. 아, 이 쓸데없는 껍데기인 자부심이 문제다.


작전이 펼쳐지는 날, 첫 기차가 지나갈 때 폭파하기로 했다. 그런데 다리 위에서 강을 응시하는 니콜슨 중령의 눈에 이상한 전선이 눈에 띈다. 본인이 부하들과 만든 작품인 다리로 연결된 저 선은 무엇일까? 가까이 다가가며 살펴보다가 결국 다리 폭파 계획을 눈치채는데, 언덕 위에 잠복해 이를 보는 특공대 대장의 입에서 탄식이 흐른다.


어떻게 아군에게 저럴 수 있을까?


전쟁은 피아식별(彼我識別)을 어렵게 한다. 신념에 희생하는 것을 미덕으로 착각한다. 니콜슨 중령은 기폭제를 누르기로 한 젊은 특공대원을 발견하고 그가 자신을 소개했음에도 아군끼리 싸우는 양상을 발화시킨다. 총에 맞아 죽기 직전 니콜슨 중령이 읊조린 대사가 인상적이다.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한 거지?





개연성이 좀 약한 장면이지만, 그는 기폭제 위로 쓰러져 죽으면서 자신이 만든 콰이강의 다리를 폭파시킨다. 엔지가 나지 않도록 폭파신을 한 번에 촬영했다고 하는데 성공적인 장면이다.

특공대도 지휘관을 빼고 모두 전사한다. 대장은 지켜보던 태국 여자들에게 어쩔 수 없었다고 소리 지른다. 생전의 병사들과 친해진 태국 여자들의 눈에는 왜 자신의 땅에 영국군들이 와서 서로 죽고 죽이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살아남은 자의 마지막 대사가 영화의 전체를 설명한다.


 이 모든 짓은 미친 짓이다


일본군의 포로였지만, 다리를 너무나 멋지게 만든 영국군 공병과 그 다리를 폭파한 영국군 특공대, 그리고 무참한 전사자들.

왜 이런 미친 짓이 벌어졌을까. 프랑스 소설가가 쓴 원작에는 영국군을 비하한 내용도 있다고 한다.


이 영화가 안겨주는 묘한 교훈이 있다.

누구를 위해 무슨 목적으로 다리를 만들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 없이 자신의 자부심과 신념에 따라 최고의 다리를 만들어 내는 이런 현상. 후손들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은 신자유주의 세계관으로 빗댈 수 있고, 모두를 위한다고 하지만 결국 자기만족일 수 있다. 경제만 살리면 된다는 착각도 콰이강의 다리가 아닐까.


그리고 가깝게는, 묻혀 버린 장자연 사건도 콰이강의 다리 비유로 설명이 된다. 법의 권위와 체계의 견고함만 강조하고, 결자해지해야 할 사건의 억울함과 권력자의 악질성은 겨냥하지 못하는 것 말이다. 그 악랄한 권력자의 비웃음과 아무도 돈 많은 자신은 못 건드린다는 자부심에만 힘을 실어준 모양새 말이다.


콰이강의 다리가 상징하는 미친 짓의 파괴력은 극우 정치인 아베가 주창하는 식민지 근대화론 그 자체이기도 하다. 메이지 유신을 경험하지 못한 아시아를 자신들이 잘 살게 해주지 않았냐며 수탈의 역사를 덮어버리고, 자신이 아시아의 형님이라며 사람 취급하지 않고 학살한 짓들, 보기에는 경제대국의 멋지고 튼튼해 보이는 모습을 가졌어도 곧 아베의 무리는 다리와 함께 무너지며 심판받을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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