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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교진 Feb 11. 2020

작가 미상(Never Look Away)

순혈주의의 억압에서 예술로 자신을 만나고 표현해 낸 인생 영화

2020년 2월 7일 시네큐브에서 7시 반에 시작해 러닝타임 3시간인 영화 시사회에 초대받았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원스>, <심야식당>,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수입 배급한 영화사 진진의 초청으로 참석한 객석에는 문학, 미술 등 예술계 인사가 많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배경인 독일 영화 <작가 미상>이다.



결론적으로 <작가 미상>은 내 인생영화로 등극했다!


개봉하면 꼭 다시 볼 것이며, 세 번은 재관람 의사가 있을 만큼 메시지도 영감도 가득한 영화다. 간간이 웃음 터지는 장면이 있고, 미친 지배자의 광풍을 맞아가며 가냘픈 저항과 진실의 편에서 드러낸 추악함의 증거는 액션 영화보다 강렬했다. 주인공이 도달해 낸 회화는 흐릿하게 만드는 기법으로 진실을 더욱 부각해 자신의 고뇌와 고통을 담았고, 시대가 억압한 자유를 반영한 비언어적 예술 자체였다.

밤 10시 30분에 영화가 끝나 스크린에 자막이 올라가는데 늦은 시간임에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자신만의 어떤 생각에 깊이 잠긴 객석의 조용한 분위기에서 막차를 타야 하는 나는 조심스레 일어났다.




<작가 미상>은 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실화


전후 독일 대표 작가이자 1960년대 이후 현대미술사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게르하르트는 사진과 회화, 추상과 구상을 넘나들며 죽은 회화의 시대를 되살린 화가이다. 사회주의 동독에서 개인주의 서독으로 넘어온 그의 화가 인생에서 지금 생각해 봐야 할 우생학의 광기, 전체주의의 억압, 예술가의 자유가 고급 성찬으로 펼쳐진다.


영화의 시작은 드레스덴의 미술관이다. 드레스덴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지부를 향한 연합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역사적 도시다. 드레스덴 폭격은 뒤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예술과 유적의 도시인 드레스덴이 배경인 것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울림이 전해졌다.


소년 쿠르트는 젊고 아름다운 이모 엘리자베스와 미술관을 관람한다. 영화 초반은 아름다운 엘리자베스를 연기한 자스키아 로젠달의 미모에 푹 빠져서 집중하게 된다. 위대한 회화 작품을 설명하는 미술관 가이드는 열렬한 나치 당원으로 히틀러의 문화정책에 투신해 있다. 전쟁 중에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으로의 작품들은 히틀러 파시즘의 모욕을 받고 있는 중이다. 그가 설명하는 작품은 모두 퇴폐 미술로 간주되며, 인간의 나약함과 추악함으로 평가받는다. 공포감마저 풍기는 가이드의 설명에 쿠르트는 자신은 절대로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속삭이는데, 조카의 손을 꼭 잡은 이모는 나지막이 저 그림들은 모두 훌륭하고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일러준다. 나치에 주눅 들지 않는 엘리자베스 이모의 짧고 강렬한 말은 조카 쿠르트를 위대한 예술가로 길러낸다.





인류를 해치는 지배자의 정치 신념이 예술을 난도질할 때



인류를 해치는 지배자의 정치 신념이 예술을 난도질할 때 조용히 저항한 엘리자베스는 시대를 잘못 만났다. 요즘 세상에 태어났다면 조현병자로 취급받지는 않았을 텐데, 하필 우생학으로 인간을 말살하던 히틀러 시대를 살아간 것이 그녀의 비극이다. 히틀러 퍼레이드에서 선두에 간택될 만큼 아름다운 엘리자베스는 예술적 감수성이 남다른 여자였다. 그녀가 버스 종점에서 기사들에게 부탁해 서너 대의 버스가 동시에 울리는 클랙슨 소리로 예술적 상상력을 맛보는 모습은 영화의 중요한 포인트다.


대중이 신경쇠약을 일으킬 소음을 그녀는 온몸으로 예술적 감성에 흡수시킨다. 조카가 보고 있는 거실의 피아노에서 나체로 앉아 바흐의 <사냥 칸타타>를 연주하는데, 영화에서 바흐의 선율을 만나는 순간, 그것도 아름다운 엘리자베스의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의 피아노로 듣는 순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바흐의 곡, <사냥 칸타타> 양들은 평화로이 풀을 뜯고


사냥 칸타타는 내가 평소에 마음이 힘들 때 찾아 듣는 힐링 클래식이다. 바흐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비종교 칸타타로 1716년 쓰였다. ‘나의 즐거움은 오직 사냥뿐’이라는 주제 아래 사냥의 수호신 다이아나, 그의 연인 엔디미온, 농경 동물들의 여신인 팬과 팔레스 같은 많은 가공인물이 등장하는 전원 곡이다. 이 중 9번째 소프라노의 아리아 <양들은 평화로이 풀을 뜯고(Sheep may safely graze)>가 백미로 꼽힌다. 선한 목자의 보호 아래서 양들은 평화로이 풀을 뜯는다는 내용의 이 아리아는 작센 공을 목자에 비유해 찬양한 것으로 20세기 들어서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L. Stokowski)가 관현악곡으로 편곡해 더욱 유명해졌다.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강연가인 김정운 교수는 독일에서 심리학을 공부하며 마음이 힘들 때마다 이 아리아를 즐겨 들었다고 했고, 태교 음악으로 손꼽히기도 할 만큼 평화로운 곡이다. 그런데 <사냥 칸타타>라는 제목은 선율과 어울리지 않는다. 바흐가 사냥을 한다기보다 귀족들에게 맞춤 곡을 지어 주어야 하는, 행복하지 않은 자신을 빗대어 목가적 평화를 극대화한 곡이지 않을까 유추해 본다.


엘리자베스는 왜 나체로 <사냥 칸타타>를 연주했을까? 바흐처럼 자신이 원하지 않는 귀족 음악을 지어 납품해야 하는 고통을 흘려보내며, 히틀러와 괴벨스에 빠진 광기 어린 세상에서 행복하고 싶은 자아를 표현한 것 아닐까. 인구의 대부분이 나치 당원에 도장을 찍고 히틀러에 협조하는 것이 자산이라고 생각하는 현실에서 그녀는 내면의 자유를 분출한다. 조카에게 "눈길 돌리지 마. 절대로 눈 돌리지 마"라고. 그 말은 흐릿한 히틀러 시대를 살아가는 천재 화가 쿠르트가 진실을 감추지 않게 하는 추동력이 된다.  




 


억압된 콤플렉스가 잘못된 현실 의식과 만나게 될 경우의 폭력성


쿠르트의 어머니는 보건소 의사에게 동생이 정신병자로 등록되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하지만, 당시 독일 정부는 전국의 의료진에게 장애인, 정신병자, 동성애자를 근절시켜 우수한 종족 보존 명령을 하달한 상태다. 아이러니하게도 히틀러 자신은 작은 성기와 하나뿐인 고환으로 말 못할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역사학자 조나단 메이요와 엠마 크레이기가 집필한 <히틀러의 마지막 날>이란 책에 히틀러의 신체 비밀을 썼다. 그는 자신의 성기에 유전적 결함이 있다고 믿어 왔으면서도 자신이 지배한 독일은 건강한 유전자에 집착하도록 하는 잔혹한 정책을 펼쳤다. 억압된 콤플렉스가 잘못된 현실 의식과 만나게 될 경우 그 폭력성은 얼마나 잔인한지 이 영화가 보여준다.


철저하게 히틀러에 순복한 나치 당원인 의사는 엘리자베스를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고 그녀의 진료기록에 불임수술 대상자로 낙인찍는다. 진정제가 투여돼 생기발랄함이 짓이겨진 엘리자베스는 산부인과로 갑자기 이송돼 독일 최고의 산부인과 의사 칼 시반트를 만난다. 그는 성공 집착형 가부장적 인물이며, 실력은 출중하나 위선자이고, 양심보다는 권력에 집착해 기생하는 반인륜적 캐릭터다. 의사 가운보다 나치 장교복을 입고 근사한 자세를 잡는 데 열중한다. 딸의 임신마저도 순혈주의를 적용해 거짓말과 독일 최고의 의사임을 앞세워 낙태시키고 불임을 만들어 버린다. 딸의 불임은 의도한 결과는 아니지만 결국 아빠인 자신이 가해자이니 얼마나 끔찍한 인물인지 알 수 있다. 히틀러의 독일 순혈 종족주의에 빠져 있는 그의 야만적 우월감과 계급주의, 민족 이기주의는 현시대에 약소국 노동자와 이민자, 소수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마주할 수 있다. 어벤져스의 역대급 악역 타노스가 우주 인구의 절반을 날려버리는 그 악독함의 현현이 이 영화의 칼 시반트다. 한국 사회에서 친일과 반공, 친미를 오가며 지배 계급을 형성한 자본가 또한 그에 해당된다.





나치 우생학은 엘리자베스에게 정신병자 낙인을 찍고 강제 불임수술을 시행한다. 그 중심에 칼 시반트가 결정권자로 등장한다. 영민한 엘리자베스는 칼의 책상에 있는 딸의 그림을 보고 자신을 당신의 딸로 생각하고 불임수술을 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지만, 심지어 전쟁에 필요한 아들을 계속 생산해 내겠다고 울부짖지만, 이미 히틀러에 물든 그는 단호히 거부한다. 그를 아빠로까지 부르며 끌려나가는 엘리자베스의 눈물 한 방울이 자신의 구두 위에 떨어져 있자 손수건으로 닦고 그 손수건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집도의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한다. 양심보다는 잘못된 결벽증과 강박증을 가진 칼은 전쟁이 끝나면서 파국에 직면하는데...



드레스덴 폭격


폭격 전후의 드레스덴


드레스덴은 독일에서 일곱 번째로 큰 도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유럽 전선에서 마지막 몇 달간 미국과 영국이 대규모로 폭격한 다크 투어리즘의 장소다. 1차 세계대전까지는 민간인이 사는 도시를 폭격하지 않았으나 2차 세계대전에서는 런던, 도쿄, 드레스덴 등 민간인 주거 도시를 가리지 않고 폭격하는 잔혹한 양상을 띤다. 드레스덴에는 1945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네 번의 공습으로 3,900톤의 고폭탄과 소이탄이 투하됐다. 그로 인한 화염 폭풍으로 도심의 40제곱킬로미터가 파괴됐고, 22,7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폭격을 독일의 전쟁 총력을 지원하는 110개의 공장과 50,000여 명의 노동자를 수용하는, 독일의 군사 및 산업시설 표적에 대한 정당한 폭격이라고 옹호했지만, 일부 연구자들은 다리를 폭격한 점과 같이 통신 기반시설 전부를 표적으로 삼은 것은 아니며, 도심 외부의 대규모 산업 구역을 삼은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폭격을 비판하는 측에서는 '엘베 강의 피렌체(Elbflorenz)'라고도 언급되던 아름다운 드레스덴은 군사적으로 중요성이 크지 않거나 전혀 없는 문화 명소였으며, 드레스덴 폭격은 무분별한 지역 폭격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전쟁을 계속 끌고 갈 수 없는 연합군의 선택을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초래했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작가 미상>에서 드레스덴 폭격의 참상이 그려진다. 집에 있던 가족이 화염에 휩싸이고, 아름답던 거리는 복구가 불가능해 보일 만큼 참혹하게 변한다. 소년 쿠르트는 그 참상을 목도한다. 과연 인간다운 세상은 무엇일까, 그의 눈빛은 질문하는 듯하다. 러시아군은 나치의 핵심인물을 압송해 심문한다. 히틀러의 광기 어린 순혈주의에 적극 가담한 칼 시반트는 심문당하면서도 자신을 교수라고 불러달라고 한다. 뻔뻔한 살인자로 사형당할 위기에서 그는 러시아 진압군 장교의 아내가 난산인 과정에 개입해 건강하게 출산시키고 목숨을 보장받을 뿐만 아니라 대저택의 귀족 지위를 누린다. 그의 전문성이 위기를 빠져나오게 했지만, 철저하게 나치의 전범자들을 밝혀내는 세상에서 그의 처세술을 계속 기능할 것인지 의문스럽다. 왜 우리는 독일처럼 과거를 청산하지 못했을까. 칼의 위기는 영화 후반부에 쿠르트가 그린 뜻밖의 작품으로 드러난다. 청산하려는 의지가 있는 세상에서는 예술이 악인을 잡아내지만, 그 의지가 희박한 세상에서 예술은 악인의 재테크 도구라는 생각마저 든다. 우리와 일본 말이다.



나를 그리고 싶은 동독의 화가




쿠르트의 아버지는 나치에 동의하지 않았는데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은 것이 교사로서의 복직을 막히게 했다. 결국 그는 계단 청소를 하다가 자살하고 만다. 아버지의 자살이 쿠르트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지만, 그는 미술대학에 다니며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그림에 순응하고 몰두한다. 자신이 사랑하게 된 미모의 의상학과 여학생을 피사체 얼굴 대신 그리는 정도가 그의 분출구였다. 둘은 뜨겁고 유머러스하게(?) 사랑을 나눈다. 쿠르트의 재능은 산부인과 의사인 칼의 재능처럼 그의 인생을 이끌고 간다. 아무나 그릴 수 없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벽화의 작가로 등극해 찬사를 받지만, 정작 자신은 공허한 허상을 그리는 것일 뿐이다. 자신에게 집중하고 싶던 그는 동독의 이름 난 화가로는 조금도 행복하지 않다. 예술은 개인의 고통과 욕구를 반영하며 자신의 세계를 표현해 내야 하는 것임을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어도 그는 자각하고 있었다. 심지어 지도교수에게 "나는, 나는, 나는.. 하는 그 지겨운 소리 그만 하라"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 소감으로 마틴 스콜세지를 인용해 경의를 표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임을 그는 억압의 사회에서 깨닫고 있었는지도.




자유의 나라 서독에서 만난 현대 예술




쿠르트가 아내와 함께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하는 과정은 테일러 핵포드 감독의 1985년 영화 <백야>에서 긴장감 넘치게 소련을 탈출한 발레리노 니콜라이와 다르게 단순했다. 잡힐까 봐 잔뜩 긴장했지만 그는 순조롭게 서독으로 이주해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에 입학한다. 여기서 그의 괴짜 스승 안토니우스 판 페르텐(실제 인물 :칼 오토 괴츠)을 만난다. 판은 쿠르트의 눈빛만 보고도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말하며 입학시킨다. 그곳에서 보수적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완전히 다른 서방의 현대미술 흐름에 점차 눈을 떠간다. 판 교수는 그를 눈여겨보며 다른 제자에게 보이지 않던 애정을 표현한다. 자신이 전쟁에서 겪은 트라우마를 들려주며 한 번도 벗지 않았다는 모자까지 벗어 화상 당한 두피를 노출시킨다. 너 자신이 누구인지 나타내는 그림을 그리라며...






너의 그림은 이것이 아냐, 절대로 진실과 나 자신에서 눈 돌리지 마


제자의 작품을 리뷰해 주지 않는 판 교수가 자신의 작업물을 보고 들려준 말에 쿠르트는 전부 불태워 버린다. 그리고 하얀 캔버스, 하얀 벽에 둘러싸여 마치 히틀러의 순혈주의 같은 모습의 작업실에서 몇 날 며칠을 자신과 대면한다. 현대 미술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신, 쿠르트 인생과 고통을 접목시킨 자신만의 그림은 무엇일까? 붓을 손에 잡지 못하던 그에게 사진이 드러낸 진실, 그리고 정신병원에 끌려가 가스실에서 산화하고 만 엘리자베스 이모가 떠오른다. 그녀가 연주한 <사냥 칸타타>의 선율이 흐르고,  "눈길 돌리지 마. 절대로 눈 돌리지 마"라고 한 그 음성과 자신이 희미하게 본 역사적 진실이 그만의 리얼리즘으로 재탄생한다.


진실을 끄집어내고 자신과 주변 인물의 실체가 만나자 그는 이미 죽은 회화를 부활시킨 주인공이 된다. 그의 그림에는 정치, 사랑, 예술이 혼합되어 있지만, 고통스러운 사유 끝에 창안해 낸 자기 그림에 대한 설명은 아주 간단하다. 진실은 대상과 마주하는 갤러리 몫으로 남겨두려는 듯 작가 미상으로.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무언가 모를 공허감으로 새벽길을 걷는 그는 오래 전 그날, 엘리자베스처럼 버스 종점의 기사들에게 부탁해 클랙슨 소음 세례를 받는다. 그녀가 느낀 예술의 소리 샤워를 받고 짓는 쿠르트의 미소에는 한 사람이 저지른 만행을 이겨낸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의 은택을 받은 자유가 담겨 있다.





스포일러를 조심해서 썼다.

교장 선생님이었지만 전쟁이 끝나고 계단을 닦다가 자살한 아버지처럼 쿠르트도 병원 계단을 닦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비참함에 눈길을 두지 않고 작품으로 승부하고 몰입한다. 아버지의 트라우마를 이겨낸 쿠르트와 순혈주의의 변형을 붙잡고 살아가는 전쟁의 잔재가 충돌해도 그를 견디게 한 힘은 자신을 대면하고 표현한 그림이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와 정보들에 둘러싸여 한시도 자신과 대면하고 성찰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우리들, 가짜 뉴스와 참람한 의식과 선정적인 가벼움에 시간을 흘려보내는 현시대에 진실을 마주하는 창작자의 노력은 어디서 찾을까. 우리는 얼마나 트라우마를 이해하고 승화시키며 살고 있는가. 비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어떤 몰입과 모험을 해야 할까, 참 많은 사유를 던지는 영화다. 예술영화지만 가장 현실적인 영화가 <작가 미상>이라고 생각하며 최고점을 주고 싶다. 부디 대박 나서 나치의 순혈주의를 닮아가는 세계에 클랙슨을 울려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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