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교진 Apr 23. 2020

바닷마을 다이어리 (2015)

상실감에서 가족으로, 울림이 있는 공감으로, 다정한 거리감의 세계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감성 영화가 보고 싶었다


압도적인 인기라는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를 보고는 피곤이 몰려왔다. 메시지도 없고 그저 공포 스릴러물에 비인격적인 대사들,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려고 작정하고 설정한 듯한 인물들에 불쾌함이 가득 전해졌다. 김희애의 연기력밖에 점수 줄 곳이 없고 스토리 전개도 막장인 데다 음향효과는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원작인 BBC 드라마 <닥터 포스터>가 그러하니 별 수 없다. 김희애 주변이 거의 빌런들이다. 시고니 위버처럼 무기 들고 전사가 되어 에어리언들을 몰아내야 하는 '적반하장의 세계'에 지쳐 다른 것이 보고 싶어졌다. 정반대의 다른 것을.


아름다운 풍경, 빌런이 나오지 않고 서로를 생각해 주는 공간에서 고통이 다스려지는 사람 냄새나는 이야기, 서정적인 음악과 멋진 풍광이 거들어주어 내 기억의 한 장면이 끄집어내지는 이야기, 등장인물의 삶에 공감하고 울림을 주는 사랑 이야기를 보고 싶었다. 무작정 검색해 봤다. 그래서 찾은 영화가 <바닷마을 다이어리>다.

코로나19로 극장에서는 <레미제라블>이나 <라라랜드>처럼 지나간 영화의 재개봉이 이어지는 가운데 집에서 VOD로 명작을 감상하고 싶다면 강력하게 추천한다.



원작은 동명의 만화를 각색했다


요시다 아키미의 만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요시다 아카미라는 만화가의 만화 원작이다. 2013년 일본 만화 대상을 수상한 요시다 아카미는 순정만화뿐만 아니라 성인 액션, 로맨스, SF 등 다양한 장르의 만화를 그리는 작가이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월간 플라워즈에 비정기적으로 연재해 2019년에 9권으로 완결됐다. 전 세계적으로 코믹이 영화로 제작되어 인기를 끄는 시대다.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만화가 내 주변에는 얼마나 있는지 궁금하다. 강렬한 것은 자극적인 것이 아니라 기억을 가져오는 것 아닐까.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



한국인이 사랑하는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거장의 반열에 올라 있다. 2019년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기 바로 전년도인 2018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어느 가족>으로 먼저 수상했다. 키타노 타케시와 이와이 슌지보다 한국 영화팬의 사랑을 많이 받는 영화감독이다. 나는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본 후 뒤늦게 믿고 보는 감독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에 입덕했다. 이와이 슌지와 동갑인 고레에다 히로코즈는 와세다대학에서 문예학을 전공한 후 문자보다 영상의 길을 택했다.


독립 TV 프로덕션에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며 인간극장 같은 TV용 다큐멘터리를 만들다가, 불운과 불행을 겪은 가족의 내면을 관찰하며 서로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현대극을 주로 제작했다. 그래서 일상을 담는 그만의 영화적 기법은 사실적이고 여운이 짙다. 카메라가 응시하는 대로 감정선을 이끌어내고, 내면을 잡아내는 감성과 풍경을 보여주는 감각이 매우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처럼 영화 음악 또한 예술로 다가오게 하여 그의 영화를 본 후 반드시 OST를 찾아 듣게 된다. 그리고 고레에다의 영화는 질문을 남긴다. "당신에게 가족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인생에서 어떤 장면을 말하고 싶습니까?"라고. 가장 좋은 영화는 이처럼 질문을 던지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그가 원작 만화를 보고 영화화를 결심했다고 한다. 이 영화로 그는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큰 자극도 악당도 없는 영화, 그러나 러닝타임 내내 몰입해서 보며 때로는 나도 모르게 주룩 눈물 흐르게 하는 작품이다. 고레에다만의 극영화적인 기법으로 아팠던 내면의 기억을 들춰보게 한다.



이런 배우들이 한 영화에 자매로 출연하다니!



일본 영화의 여신으로 불리는 아야세 하루카, 나가사와 마사미, 카호, 히로세 스즈 네 명이 자매로 나온다.

이런 톱배우들이 자매로 분했다는 캐스팅만으로도 화제가  영화다.  배우가 각각의 캐릭터로 분하며 누구나 갈망하는 가족애, 누리고 존재에 대한 이야기로 화면을  채운다. 화려한 영화적 수사가 없어도 그저  배우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담백하면서 화려하고 화사하게 느껴진다. 촬영지인 도쿄  바닷가 작은 마을인 가마쿠라도  하나의 커다란 배우처럼 영화를 장식한다.  명의 아름다운 배우와 바닷가 마을만으로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  바닷가에서 그들처럼 살고 싶기 때문이다.




배우들을 먼저 소개해야 한다.

똑 부러진 성격이면서 고등학교 때 떠난 부모를 대신해 동생들을 돌보는 장녀 사치는 성장기의 일상을 상실했다. 그녀는 간호사로 일한다. 사치 역할의 아야세 하루카는 2001년 발간된 소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TV 드라마 버전으로 2004년 7월부터 9월까지 방영된 연속극의 주인공 히로세 아키 역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이후 <백야행>(2006년)을 비롯해 최근의 <오늘 밤, 로맨스 극장에서>(2018년) 등에 주연을 맡으며 인기를 얻고 있다.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배우로 '결혼하고 싶은 여자 연예인' 1위에 올라 있다. 영화에서 맏언니의 책임감과 따뜻함으로 동생들을 품고 보살핀다. 미소가 차분하고 아름답다. 어딘가 중국 배우 공리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둘째 요시노는 애주가이며 자유연애를 즐긴다. 은행에서 일한다. 요시노 역할의 나가사와 마사미는 아야세 하루카보다 2살 어리다. 특이하게도 2004년 5월 영화로 먼저 개봉한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주인공 아키로 출연해 일본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첫째와 둘째가 한 작품의 드라마와 영화 여주인공으로 나란히 출연한 것이다. 둘째인 나가사와가 먼저 출연한 영화의 인기로 TV 드라마가 만들어졌고, 여기서 첫째 아야세가 같은 역할을 맡았다. 나는 작년에 오키나와를 다녀온 후 오키나와 배경의 영화 <눈물이 주룩주룩>에서 나가사와 마사미를 만나고 뚜렷한 인상을 받았다. 순수하면서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따뜻한 햇살 같은 미소를 지닌 배우다.





쾌활하고 단순한 성격의 셋째이며, 막내의 자리를 이복동생에게 물려주는 치카 역의 카호. 현재 일본의 신세대 스타로 배우와 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네 자매 중에 가장 평범해 보이지만 이해심 많고 쾌활한 완충제 역할을 한다. 욕심이 없고 상처도 없어 보이지만, 기억에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아버지를 궁금해하면서 동생을 결코 질투하지 않는 천사 캐릭터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로 2016 일본아카데미 신인배우상을 받은 히로세 스즈, 영화의 이야기에 핵심인 이복동생 막내 스즈를 맡았다. 중학생이면서 어른스럽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만, 누구에게나 사랑받는다. 자신의 친엄마 때문에 파탄이 난 이복언니들 집에서 같이 살기로 선택하고 조심스럽게 성장해 간다. 혼자만의 사연을 가득 안고 있는 눈빛에서 점차 예쁜 막내의 천진난만함을 얻는 스즈에 잘 어울리는 배우다.



아버지의 죽음에서 시작하는 이야기


15년 전 아버지는 바람이 나서 가족을 버리고 떠났다. 엄마도 아직 돌봄이 필요한 세 자매를 남겨두고 떠나버렸다. 고등학생인 첫째 사치가 그때부터 동생들을 돌봐왔다. 그녀가 부모 대신 책임을 다한 것이다. 아버지를 잊고 살았는데 세 번째 부인과 결혼해 살던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둘째와 셋째는 장례식장에 가보기로 하지만, 상실감을 누르고 살아온 첫째는 아버지 장례식에 별 관심이 없다. 바쁘다는 핑계로 안 가려고 했지만, 소아과 의사인 유부남 친구가 차로 데려다 주어 뒤늦게 조문한다.

  

기차역에 마중 나온 이복동생 스즈를 처음 만났다. 중학교 교복을 입은 큰 눈망울의 예쁜 스즈를 본 요시노와 치카는 사랑스럽게 인사한다.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만났고, 아버지의 외도로 태어난 스즈를 껄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사치는 자기 대신 아버지의 병환을 돌본 스즈에게서 어떤 감정에 이입됐는지 유족으로 남은 아버지의 세 번째 부인과 배다른 남동생을 떠나 언니들과 함께 살자고 한다. 사치는 친동생들과 의논도 하지 않은 채 헤어지는 기차에서 불쑥 제안한다.


"우리와 같이 살래? 넷이서. 바로 답하지 않아도 좋아. 생각해 보고 부담 없이 결정하고 와."


언니의 갑작스러운 말에 두 동생은 잠시 당황하다가 바로 거든다.

"그래, 우리 집에 와. 네 방도 만들어 줄 수 있어."





시집갈 생각도 하지 않고 두 동생을 돌봐온 사치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빠와 엄마와는 다른 책임감을 느낀 이유가 뭘까? 어린 스즈의 어른스러움, 이제부터 새엄마와 배다른 남동생과 살아야 할 현실, 아버지의 마지막 시간에 딸로서 대신 곁에서 보살펴 드린 데 대한 고마움이 작용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가족을 버린 엄마와 자신은 다르다는 것을 붙잡고 싶기 때문이다.


스즈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바로 가겠다고 하고 바닷가 마을 가마쿠라에 온다.

아빠가 처음 결혼해서 살던 그 집이다. 아버지는 같지만, 자신의 엄마 때문에 가정이 깨진 언니들 곁에서 마음이 조심스럽기만 하다. 그런데 세 명의 언니는 너무나 따뜻하고 친절하다. 마치 엄마 세 명을 새로 얻은 것처럼 스즈에게 고마운 존재들이지만 미안하다. 어두웠던 지난 시간에 비해 환한 빛이 가득한 언니들의 개성에 마음을 조금씩 열어가면서도, 엄마의 불륜에 대한 죄책감에 아웃사이더의 경계선에 머무른다.







언니들이 살아온 가마쿠라는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이다. 마당이 넓은 집은 오래돼 낡았지만 가족의 역사가 담겨 있다. 해체된 가정이 버텨온 것은 맏언니 사치의 헌신 때문이다. 털털한 둘째 언니 요시노의 거침없는 자유로움과 다정한 말동무가 되어주며 독특한 취향을 가진 셋째 언니 치카를 보면 볼수록 왠지 자신의 존재가 미안해진다. 가해자도 아닌데 엄마의 죄를 대신 지려는 모습을 다들 조금씩 느끼고 있다.


스즈는 전학을 간 낯선 학교 생활에서 얼굴이 활짝 펴진다. 조금도 그녀를 왕따시키지 않고 매력적인 친구로 받아주는 친구들을 얻었다. 게다가 축구부에 들어가 스트라이커로 활약한다. 뛰어난 축구 실력 때문에 친구들에게 인기도 높다. 가마쿠라 지역의 에노시마 섬에는 20년이 넘은 '바다고양이'라는 식당이 있다. 이 식당의 주인 부부도 스즈를 따뜻하게 맞아준다. 그 가족사를 다 알고 있지만, 오히려 스즈가 행복하게 정착하길 빌어준다. 스즈는 친구들과 마을 식당에서 이 식당만의 별미인 전갱이 튀김으로 배를 채우고 아저씨가 잡은 작은 멸치로 만든 잔멸치덮밥을 먹어보고는 깜짝 놀란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해준 메뉴였기 때문이다. 어렴풋이 아버지가 이 식당의 단골이었음을 눈치챈다. 식당 아저씨에게 대놓고 물어보지 못했다. 자신이 태어난 과거는 현재의 고마운 가족에게 폐를 끼친 역사이고 아버지의 과거 또한 궁금해도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특히 아버지의 손길을 조금도 경험하지 못한 셋째 언니 치카 앞에서는 더욱더.





유부남을 만나는 언니


간호사로 일하는 사치는 부인이 있는 소아과 의사를 사귀고 있다. 그는 부인과 자식을 쉽게 버리지 않고 사치를 만나고 있다. 혼자 지내는 그의 집을 드나들며 음식을 차리고 설거지까지 도맡는 사치는 동생들에게 자신의 연애를 말할 수 없다. 유부남이면서 연애를 한 아빠 때문에 무너진 가정을 책임져 온 자신이 아이러니하게도 유부남을 만나고 있으니 말이다. 소아과 의사가 가족을 버리고 사치에게 올지 알 수 없다. 병원에서 그를 통해 얻는 안정감이 좋을지라도 그녀에게 결혼은 복잡한 문제다.


고립감을 견디며 동생들을 돌봐 온 자신에게 가정의 행복과 안정감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돌봐 온 동생들을 두고 시집을 간다는 것도, 유부남과의 결혼이라는 현실도 사치에게는 어두운 현실이다. 둘째와 셋째보다 잘 웃지 않지만 새로 들어온 막내 스즈가 잘 지내는지는 민감하게 살핀다. 사치의 집 안에서의 사랑과 집 밖에서의 사랑 그리고 스즈가 가족으로 결합해 가는 이야기가 이 영화의 중요한 맥락이다.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스즈에게 다가온 축구부 남학생 후타가 있다. 스즈와 같은 반인 후타는 딸을 원한 부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생부터 실망감을 안기고 사랑받지 못했다는 과거가 동병상련으로 작용했는지 후타는 스즈에게 친밀감을 느끼며 자기 얘기를 들려주며 다가간다. 이 영화는 이처럼 구성이 촘촘하다. 억지가 없고 자연스러운 개연성이 돋보이며 스며드는 심정으로 울린다. 후타는 자신의 자전거에 스즈를 태우고는 꼭 보여주고 싶다는 터널로 달려간다. 바로 벚꽃 터널이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따뜻한 가족과 이웃들에 아름다운 마을 풍경이 절묘한 조합을 이룬다. 다큐멘터리 감독답게 카메라가 비추는 풍경은 여운이 짙고, 꼭꼭 눌러온 고통을 희석하고 힐링시킨다. 이야기는 담백하게 공감을 이끌어내지만 환상적이면서 특유의 서정적인 화면은 액션 영화보다 더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스즈는 언니들과 살아가며 마음이 풍성해지는 현실과 더불어 자신이 이런 행복을 느껴도 되는지 감동하는 표정으로 점차 사랑스러운 가족과 이웃이 되어간다.






갈등과 사랑은 모두 가족 안에서 시작된다


외지의 불륜녀가 낳은 딸로 자신을 보는 시선은 그 어디에도 없다. 스즈를 만나는 모두가 이 작고 예쁜 가마쿠라에서 언니들과 행복하게 정착하기만을 빌어준다. 인간이 가진 따뜻함의 절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집 밖이 아닌 안에서 시작된다. 할머니의 제사가 다가온 것이다. 스즈에게는 이모할머니와 언니들의 친엄마를 만나야 하는 현실이 부담스럽다. 사치는 스즈에게 아무 부담 갖지 말고 너도 우리와 한가족이니 같이 제사를 지내자고 한다. 일본에서 제사는 가족 모두가 반드시 모이는 강력한 유대를 지닌다. 멀리 떨어져 살아도 참석하는 것이 도리이다. 마뜩지 않던 엄마가 찾아왔다. 작년에도 한바탕했다던 사치는 이번에도 엄마와 한바탕한다. 이 낡은 집을 팔고 편안한 아파트를 장만해 시집가라는 참견 때문이다. 사치는 자신이 동생들을 돌보며 버티고 자라온 기억이 가득한 이 집을 절대로 팔 수 없으며 엄마가 참견할 일이 아니라고 못 박는다. 일본의 김혜자인 배우 키키 키린이 이모할머니로 나온다. 그녀는 양쪽을 중재하며 격렬한 싸움이 되지 않도록 막아선다. 그리고 사치에게 너희 가족을 깨트린 사람의 딸을 어떻게 동생으로 맞느냐는 현실적인 조언도 전한다. 사치는 사실 엄마에게 스즈를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어른은 아이를 돌보고 책임져야 마땅한 거라는 메시지를 엄마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요시노는 그런 언니에게 스즈의 행복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지 되묻는다. 서로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내면의 결핍과 상실을 영화에서는 표정과 대사 그리고 음악으로 전달한다.


내가 어렸을 때 할머니 댁에 맡겨져 살았던 세월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5~6년을 친척들 집을 떠돌며 지냈다. 마산 인근의 남지라는 작은 마을에서 하늘만 바라보며 친구도 없이 혼자 지낸 기간이 기억에서 나를 괴롭혔다. 어린 시절의 그 막막함, 그리움, 슬픔, 외로움을 사치와 스즈에게서 느낄 수 있다. 내게 유년기의 외로움은 가장으로 살아가는 지금까지 상실감과 함께 차오르고, 가만히 쉬고 싶게 만든다. 그 의욕 없이 깊은 좌절감으로 밀어 넣는 감정에서 나오려고 부단히 싸워야만 일상의 해야 할 일에 들어갈 수 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에 내가 푹 빠져서 보게 된 요인은 비정상적인 유년기의 사랑받지 못한 외로움과 식물 상태의 중환자 어머니를 20년간 책임지며 청춘의 시간을 병 간호의 고립감과 절박함으로 채운 기억 때문이다.




스즈는 사치에게 말한다.

미안해요. 엄마 때문에 언니들을 힘들게 해서... 엄마가 유부남을 사랑하는 건 안 되는 건데...

사치는 동생을 가만히 바라본다.





사치는 세 딸을 버린 엄마와의 갈등을 풀기로 한다. 자신이 살아온 집이 숨 막혔다고 하는 엄마에게 집 마당에서 자란 매실나무의 열매로 담근 매실주를 선물한다. 자신이 담근 것과 돌아가신 할머니가 담근 매실주를 엄마에게 건넨다. 종종 집에 오시라고 하며 상처 입은 딸이 먼저 손을 내미는 화해의 장면에서 나는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용서하기 힘든 가족을 먼저 용서하는 사람의 마음 깊이는 아무도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사치는 떠날 수 있을까


소아과 의사는 미국 유학을 떠나겠다고 한다. 아내와 정리할 테니 사치에게 같이 떠나자고 한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사치는 혼란스럽다. 동생들도 알게 됐다. 둘째 요시노는 특유의 밝은 얼굴로 자신이 치카와 스즈를 돌볼 수 있으니 이제 언니의 인생을 향해 떠나라고 한다.




사치는 스즈를 데리고 기누바리산 정상에 올라가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꼭 안아 준다. 힘든 것 있으면 뭐든 언니에게 말하라고. 그리고 너는 우리의 진짜 사랑스러운 동생이라고.

사치는 죽음을 가까이서 접하는 터키널케어(현대 의학으로는 치료할 수 없어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간호)를 자원한다. 아버지의 죽음에서 스즈를 데려오고, 할머니의 제사에서 엄마를 용서한다. 죽음의 자리에서 사랑과 용서를 만나는 사치에게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를 돌보는 일을 제대로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다. 이제 힘든 일을 내려놓고 결혼할 수 있는 기회를 앞둔 사치는 죽음을 깊이 경험하는 자리로 적극 나선다.



요시노의 눈물과 조심스러움이 사라진 스즈의 변화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둘째 요시노는 실연을 겪은 후 은행 일에 몰두한다. 상관인 과장과 함께 외근을 돌며 개인 대출을 컨설팅한다. 돈 때문에 힘든 사람들이 자신의 역할로 조금이나마 근심을 더는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기쁘다. 그러다 20년 넘게 함께해 온 마을 식당의 아주머니가 중병에 걸린 것과 유산 상속을 요구하는 동생에게 가게를 팔아서 돈을 내주어야 하는 고충을 접한다. 어떻게든 도우려 하다가 결국 아주머니의 사망 소식을 접한다. 네 자매 중 장례식장에서 가장 많이 운 사람이 요시노다. 아주머니의 전갱이 튀김을 사랑했고, 언니들과 추억이 가득 담긴 식당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고통도 겹쳤지만, 마지막 삶에 행복하지 않았을 아주머니에 대한 잔상이 요시노를 아프게 한다. 추억은 행복한 잔상만을 남기지만 현실은 고통이 더 많이 보이는 게 인생이 아닌가. 요시노는 식당 아주머니에게서 행복만 선물받은 것 같아 더 아프다.




스즈는 언니들과 함께 슬픔의 현장에 동참하며 점차 조심스러움을 벗어던진다. 철부지 막내처럼 굴어도 괜찮다는 것을 발견한다. 마당의 매실나무에는 막내였던 셋째 치카가 올라가 매실을 따왔는데 이제 스즈의 차지다. 언니들과 매실주를 담그며 일상의 행복을 누린다. 스즈의 환한 웃음이 보여주는 가족의 결합은 행복 그 자체다.






아버지는 다정한 분이었을 거야


네 자매는 시치리가하마 해변을 산책하며 가족의 의미를 되새긴다.

온전히 막냇동생이 된 스즈의 해맑은 미소를 흐뭇하게 보던 사치는 요시노에게 말한다.

"아버지는 다정한 분이었을 거야."

요시노는 뜻밖의 언니 말에 이유를 묻는다.

"저렇게 다정하고 예쁜 막내를 우리에게 안겨주고 가셨으니 말야."

사치는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조금도 들추지 않는다. 지금 자신은 결혼보다 동생들 곁을 지키기로 하면서 막내 스즈를 바라보며 아버지를 다정한 분으로 인식한다. 버림받았지만, 선물받은 것으로.


나는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보고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만드는 가족 영화를 모두 보고 싶어졌다. 고레에다빠가 되었다. 가족은 아픔이면서 행복을 추억하게 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현실을 치료한다. 늘 아프기만 한 것은 자책감과 상실감을 내려놓지 못하고 살기 때문이다. 행복한 마음은 행복한 마을에서 이뤄지고 그 마을을 이루는 작은 가족이 치유의 시작점이다. 고레에다 감독은 이 영화로 내게 질문을 던져 놓았다.

"내게 있어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할 기억은 무엇이고, 알지 못했던 다정한 존재는 누구였는지"에 대해.


외로움을 잊는 공간, 작은 바닷마을에서 네 자매처럼 살고 싶다.

영화 촬영지인 카마쿠라, 언젠가 꼭 가서 경험해 보고 싶은 곳이다. 그곳에 가면 화해하지 못한 내 과거와 손을 잡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OST

https://www.youtube.com/watch?v=17CTjdg7cQU&list=PLVIhOyvUOE90KeC2BL-EHAEd9N5E-HpX6








매거진의 이전글 작가 미상(Never Look Away)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