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에 엔야(Enya)가 있다면 한국에 신윤미가 있다
신윤미, 80년대 말 내가 입시 준비를 할 때 좋아한 가수다.
콘서트 7080에서 권인하와 듀엣으로 <동숭로에서>를 부른 영상을 찾아들었다. 나이 들었어도 그녀의 시원한 목소리는 여전하다. 오늘 마음이 꿀꿀해 자가 위로를 하려고 장덕 노래를 듣다가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을 들으며 신윤미가 기억났다. 나는 열심히 공부해 좋은 성적 얻고 성공해서 어머니의 고단한 새벽시장 일을 그만두고 쉬게 해 드리려던 당시 좋아한 가수의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애틋해진다.
신윤미는 내가 재수 시절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에 자주 출연한 이화여대 작곡과를 다니는 가수였다. 일요일 밤에 편성된 공개방송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이문세와 장단이 잘 맞던 신윤미의 목소리를 듣고 반했었다. 시원시원하게 뻗는 고음과 멘트에 섞인 유머와 유쾌한 분위기에 흠뻑 빠져 그녀의 앨범을 사서 <사랑의 불꽃>이란 노래를 애정하며 들었다. 지금처럼 유튜브와 가요 채널을 접할 수 없던 시기라 라디오 음성과 앨범 쟈켓의 사진만으로 짝사랑하며 좋아했다. 당시 히트한 가요 앨범들에는 꼭 신윤미의 코러스가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군대에 다녀온 시절 TV에 마로니에라는 국내 첫 프로젝트 그룹이 인기리에 활동 중이었다. 그 마로니에의 1기 멤버로 권인하와 함께 활동한 신윤미는 <칵테일 사랑>을 녹음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 곡은 여자 중창으로 들리지만, 사실 신윤미가 16번의 트랙을 각기 다른 느낌으로 불러 함께 입힌 곡으로 16명의 신윤미가 부른 곡인 셈이다. <칵테일 사랑>의 여자 목소리는 모두 신윤미였고, 당시 아일랜드 출신 세계적인 팝스타 엔야(Enya)가 이런 형태의 녹음을 하여 인기를 얻고 있었다.
마로니에 3기 멤버들이 활동하던 중에 <칵테일 사랑>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노래는 가요톱텐 1위까지 올랐다. 그런데 문제는 앨범 어디에도 신윤미 이름이 없고 그녀의 목소리가 립싱크되어 방송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에서 나름 음악활동을 하던 신윤미는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의 이름을 앨범에 표기하고 노래 부른 사람이 자신임을 명시해 달라고 기획사에 요청했지만, 기획사는 수락하지 않았다. 마케팅에 차질이 있을 것을 우려했던 것 같다. 지금이라면 문제는 더 커졌을 것이다.
신윤미는 자기 노래가 립싱크되고 있는 것에 대해 기획사와 처음으로 소송을 진행한 가수가 되었다. 세간에서는 노래가 뜨자 뒤늦게 한몫 잡으려 한다는 악소문이 일기도 했지만, 이는 명백히 가수 스스로 정당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소송이었다. 그때 신윤미의 변호사가 박원순 시장이었다고 한다. 이 소송에서 신윤미는 승소하고 <칵테일 사랑 립싱크 사건>은 대중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만큼 신윤미의 노래는 이 곡의 시원시원함을 충분히 커버해 주었다. 나는 그녀의 뛰어난 가창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어이없었던 기억이 난다. 한편 이 노래를 부르며 인기를 얻은 마로니에의 두 여 가수 김민경, 김정은은 가수로서의 실력이 떨어지는 이들이 아니었다. 김정은은 후에 솔로로 활동하며 <널 사랑해>로 사랑받았고, 김민경은 그룹 줄리엣으로 활동했다. 곡이 갑자기 인기를 끌면서 상업적인 선택으로 립싱크를 했지만 그들은 자신의 목소리로 부르고 싶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기획사가 3기 멤버들과 재녹음을 해서 새로운 버전으로 활동했어도 좋았을 텐데 말이다.
신윤미는 미국에서 힘들게 사는 소수자 한인들을 위해 활동하며 1994년 한인 이민자들이 LA 폭동의 피해를 겪지 않도록 애썼다고 한다. 자원봉사로 영어를 하지 못하는 한인들을 위해 영문으로 편지를 써주는 일을 했고, 동포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그녀는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음악을 찾게 됐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무대라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특히 장애인들 앞에서 부를 때 큰 감동을 얻어 그녀는 미국에서 두 장의 앨범을 냈고, 매년 콘서트를 열었다. 미국으로 떠난 지 12년 만인 2005년에 한국에 돌아와 <칵테일 사랑>의 원곡 목소리의 가수로 콘서트를 였기도 했다.
장덕 누나와 신윤미 누나의 노래를 듣던 그 시절의 나는 행복했을까? 아마도...
2020.02.07
덧) 이 글을 쓴 지 꼭 일주일 뒤 슈가맨에 신윤미 출연! 신기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