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버티기의 고통은 관계성의 회복으로 치유하다
열심히 살다가 갑자기 질문이 찾아온다. 찾고 싶고, 갖고 싶고, 되고 싶은 나는 어디에 존재할까?
오랜 병간호로 찾아온 우울, 자녀를 기르며 당연하게 생략한 나를 위한 시간, 인생의 오후에 다가온 헛헛한 삶의 그림자. 벌어야 하고 키워야 하고 책임을 다해야 하는 가장의 일은 무겁기만 하고 숨이 막혔다. 막막한 중년 가장의 현실에 찾아온 무기력감에 내 삶의 의욕이 뚝 끊어지려 할 때 오랜 병간호의 짐이 덜어졌다. 20년을 와상환자로 투병하신 어머니 소천 후 나는 오롯이 새롭게 시작하는 일상을 맞았지만, 해방감은 잠시뿐이었다. 현재 진행형의 검은 개가 내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어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채워지지 않는 의욕과 반복되는 무기력한 시간에 스스로가 역겨웠다.
어머니는 병원에서 의학적인 치료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호플리스 퇴원 명령을 받았다. 식물인간으로 누워계신 어머니를 집에서 8년간 간호할 때 나는 밥을 못 먹고, 잠을 못 자고, 쉬지 못했어도 매일 혼자서 2평 남짓한 어머니 병상 옆 공간에서 운동을 했다. 몸은 날로 좋아졌고 정신도 맑았고 신앙은 순수했다. 그러다 어머니 간호를 돕겠다고 다가온 여성과 결혼했고 2017년 가을, 마흔여덟에 어머니 간호를 마쳤다. 긴 터널 같은 고난 학교를 졸업한 기분이었지만, 내 감정에 대한 성찰을 한 것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대학 4학년 졸업시험을 치던 때 뇌출혈로 식물인간이 되신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상황을 받아들여 청춘의 시간에는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가족의 몸에 내 인생을 매어놓고 산다는 건 그렇게 고통스러운 기억만 있지 않았다. 나는 의대생이 아닌 공대생으로 식물 상태의 중환자를 잘 간호해 낸 것에 기쁨이 있었고 생기가 있었다. 집 밖에 나갈 시간이 없었고, 잠시 외출할 여유가 생기면 간호에 필요한 물품을 사 오거나 어머니 약을 타러 병원에 다녀오는 것이 전부였다. 내 청춘은 24시간 엄마의 호흡, 손과 발, 욕창은 절대 틈타지 않게 한 정밀한 케어, 의식은 돌아오지 않아도 건강한 바이탈 숫자에 집중하며 보냈다. 그 이야기로 책을 냈고 집에서 간호해 오던 어머니를 병원에 옮겨 계속 이어서 간호하면서 직장을 얻어 수입을 마련했다. 글을 쓰고, 책을 편집하는 일로 생계를 이어갔다. 일하면서 내 우선 관심은 어머니 상태에 있었고, 매달 수입은 모두 병원비로 지출했다.
결혼해 두 아들을 두기까지 내가 견디고 책임져야 할 일상의 커진 볼륨은 슈퍼파워를 요구했고 견뎌냈다. 아니, 견딜 수밖에 없었다. 늘 통장은 마이너스였고, 어머니 상태는 미세하게 안 좋아져 갔고, 두 아들은 무럭무럭 자랐다. 나는 가장이면서 병간호하는 아들로 살며 나 자신을 ‘늘 참고 견디는 곳’에만 두었다. 괴롭다는 생각이 들어도 가만히 넋 놓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병원비도 걱정해야 했고, 가방에 간호용품을 담아서 병실에 달려가 병원에서 하지 않는 간호를 보충해 드리는 데 정신력과 체력을 써야 했다.
1997년 김영삼 정부 말기에 와상환자가 된 어머니는 그렇게 대통령이 다섯 번이나 바뀐 2017년 가을에 하늘의 부름을 받으셨다. 이제 좁은 병상이 아닌 천국에 계신다는 믿음은 마음의 짐을 덜어 준 선물이면서 이제 내 인생을 계획할 수 있는 새 세상을 안겨 주었다. 나처럼 긴 병간호를 해야 하는 사람들을 돕는 사회적기업을 창업했고, 예비사회적기업 인증도 받았다. 하지만 장기간 수입 없이 옳고 가치 있는 일을 계속할 수 없었다. 내가 시작한 일이 봉사의 영역이라 결론짓고 다시 생업 전선에 돌아왔다. 우울감이 깊어져 삶의 에너지가 뚝 끊겼다. 청소년기부터 어머니 인생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것이 소원이던 내게 어머니가 이제 천국에 계신다는 믿음이 있어도, 나는 잘 갖춘 항구가 아닌 망망대해에 홀로 놓여 있는 기분이었다. 정신을 쥐어짜서 책을 만들고 글을 쓰며 벌이를 다시 시작한 중에 코로나 19가 덮쳐왔다. 이 시기에 내가 만든 책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매일 우울과 싸우고 있다. 예민한 기억은 고통과 수치의 과거를 끄집어내 평온한 감정을 추궁하고 괴롭힌다. 기억 저편에 있던 수치와 분노로 나를 심판하고 헐뜯으며 지금 뭐 하고 있나 정죄한다. 나는 여전히 순진해서 용서도 어렵나 보다.
한 번도 정신과 진료를 받지 않았다. 서점을 휩쓸고 있는 우울증에 관한 책을 읽다가 내 상태가 우울증 중간단계의 어디쯤일 거라고 진단했다. 1년 넘게 가슴이 답답하고 삶의 에너지가 바닥나 있다. 20년 동안 의식 없는 어머니 간호하며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감당하느라 삶의 에너지를 모두 다 쓴 것만 같다. 열정과 기대, 호기심마저 없다. 그 어느 것에도 기쁨이 없고 집에 들어오는 순간 나를 규칙에 얽매이려는 사감 선생님 앞에 서는 긴장감이 든다. 아침에 눈을 뜨기가 괴롭고 일어나면 하루를 어떻게 견딜까 근심한다.
그러다 내 우울의 해결은 관계성 회복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지켜줄 아버지 모습, 나를 감싸줄 어머니 모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하나님의 실재하심을 믿고 있는가? 그분의 존재는 믿으면서 일하심과 통치하심은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가까이 있는 존재로는 인정하지만 내 중심의 요구와 좌절만 겪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돈이 없어도 하나님과의 관계, 부부 관계 두 가지를 회복하지 않으면 영원히 우울의 감옥에 갇힐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요즘 매일 아내와 하루에 있었던 세 가지 일을 대화하고 있다. 절대로 상대방의 말을 중간에 끊거나 의견을 제시하지 않고 경청한다. 서로를 들어주면서 우리의 관계가 견디는 관계에서 이해하고 감싸주는 관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더불어 내게 필요한 든든한 아버지 모습을 하나님께 발견하는 중이다. 깊어져 가던 우울감은 두 가지 관계성의 회복에서 점차 옅어져 가고 있다. 권력과 부유함을 가졌어도 하나님과 부부의 관계가 막혀 있으면 불행과 우울이 쌓인다. 당연한 이치다. 그 당연한 이치에서 버팀목을 발견했다. 이미 방전된 채로 고립감을 느끼고 있다면 곤두박질치는 감정 바퀴에 관계성의 버팀목으로 정지시켜야 한다. 거기서 마음에 쿠션이 생기고 나를 쉬게 해줄 마음의 집이 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