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상으로, 이전과는 다른 기쁨과 감사로
어제 오후 서류 네 가지를 준비해서 주민센터에 들렀다. 코로나 확진자 생활지원금을 신청하기 위해서다. 격리입원확인서, 등본, 통장사본을 출력하고 신분증을 들고 가면 된다. 아내와 아이들은 금요일에 코로나 검사를 받고 음성이 확인되면 재택 격리가 해제된다. 그래서 요즘 바깥에서 장을 보고 쓰레기 정리하는 일은 내가 도맡고 있다.
집에서 주민센터까지 1.6킬로다. 이 무더위에 30분은 걷는다는 건 극기훈련이라 자전거로 바람을 맞으며 달렸다. 선글라스가 필요한 강력한 자외선을 뚫고 주민센터 복지과 직원을 만났는데, 아내와 두 아들 격리 확인서까지 가져오면 지원금을 더 받을 수 있다고 하여 다음 주에 추가 서류를 가지고 재방문하기로 했다. 배우자가 공무원이거나 유아 교육 기관에 근무하는 정규직일 경우 지원금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미 인건비 지원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마운 지인들로부터 커피 쿠폰을 많이 받아서 스벅으로 이동해 더위를 식히기로 했다. 코로나 확진자가 이리 많이 발생해도 스벅의 자리는 거의 만석이다. 미국에 사는 후배 계도가 보내준 쿠폰으로 자바칩프라푸치노를 주문해 콘센트 자리에 앉아 큐티를 하고 아이패드로 드라마를 보았다. 한여름 폭염 오후에 시원한 커피숍에서 드라마를 본다는 것, 정말 꿈같은 시간이다.
둘째가 소시지 빵을 사달라고 전화를 주었다. 수시로 아빠에게 전화하는 예쁜 둘째도 언젠가는 사춘기가 와서 아빠를 외면할 것이다. 지금 첫째는 내게 인사도 안 하고 방문 걸어 잠그고 핸드폰만 들여다본다. 히키코모리(hikikomori)가 될 조짐이 보인다. 첫째에게 이런 사춘기가 올지 상상도 못했다. 현실이 되니 아빠로서 우울감이 더해진다. 아이를 기도로 잘 키우면 신실하고 착하게 자란다는 말은 케이스바이케이스다. 사춘기 아이의 강도는 복불복이다. 나는 믿음과 기도에다가 단둘이 여행도 많이 다녔지만, 지금 첫째는 완전히 외계 미전도종족이 되어 있다.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소망하며 야단치고 잔소리하는 것을 내려놓았다.
파리바게트에서 쓸 쿠폰도 두 개나 있어 그것으로 둘째가 원한 소시지빵을 풍성하게 샀다. 현관에 들어서면 달려 나와 인사하는 건 둘째다. 자기 선물을 기다렸으니 그랬겠지만 그래도 참 예쁘고 사랑스럽다. 우리가 보상을 간절히 원하며 하나님께 쪼르르 달려가면 이런 마음으로 보실 것이다.
체중을 74까지 감량 목표를 세운 나는 저녁 대용으로 먹을 바나나도 한 다발 사왔다. 마트에서 2,500원이면 풍성하게 먹을 양의 바나나를 살 수 있다. 내가 어렸을 때 바나는 정말 고가의 과일이었다. 그 당시 돈 2,500원으로 한두 개 겨우 살 수 있었으니까. 어머니가 내 손 잡고 아현동의 어떤 할머니 댁을 방문할 때로 기억한다. 나는 그때 대여섯 살쯤이었다. 아주 강렬한 기억으로 선명히 남아 있다. 어머니는 돈을 빌리러 아현동 할머니 댁에 갔는데 그 집 손주 주려고 바나나를 한 개를 사셨다. 나는 무척 먹고 싶었지만, 그 귀한 바나나를 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엄마가 그 할머니한테 볼 일을 다 보시고 나면 내 것도 사주시겠지, 기대했다. 아마 엄마는 그날 돈을 빌리지 못하신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는 어디 계셨을까? 내 기억에 가정을 돌보시는 가장으로서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아마도 엄마는 아현동 할머니의 손주에게 바나나를 건네고, 생활비를 빌리시면 그 집을 나오면서 나한테 바나나를 사주시려 했는데, 돈을 융통하지 못하니 그냥 내 손만 잡고 버스 타고 집으로 돌아온 것 같다. 나는 엄마에게 서운함을 토로하지 않았다. 오히려 버스 좌석에서 엄마 무릎 위에 앉아 오면서, 엄마 다리 아프실까 봐 틈만 나면 내 엉덩이를 들었다. 그날 엄마의 표정은 몹시 무겁기만 했다.
지금 2,500원이면 엄청 많이 달려 있는 바나나 한 다발을 쉽게 살 수 있다. 우리집 아이들은 식탁에 있는 바나나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저녁식사 대용으로 바나나 한 개를 먹고 아파트 건너 공용 축구장 트랙을 뛰었다. 한밤중에 꽤 많은 주민들이 나와 걷고 있었다.
바나나 얘기와 더불어 단팥도넛에 대한 기억이 있다. 그 기억으로 나는 단팥을 최고의 음식으로 좋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를 키울 형편이 안 된 어머니는 현저동 쪽방에 방을 얻어 독립문 영천시장에서 메리야스 장사를 하며, 나를 친정에 맡기셨다. 외갓집은 경상남도 남지라는 조용한 시골이었다. 나는 외할머니 손에 컸다. 혼자서 하늘과 땅만 보며 놀면서 해 질 녘이면 동네 한 바퀴 걸었는데 어느 날 그 시골에 단팥도넛 가게가 생겼다. 너무 먹고 싶었지만, 사달라는 말을 못했다. 당시 나는 밥을 한 그릇 더 먹고 싶어도 외할머니께 더 달라고 하지 못했다. 꼬마였어도 얹혀 산다는 느낌과 눈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단팥도넛 가게 앞을 자주 서성거렸다. 맛있게 먹는 낯선 형에게 한 입만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말이 안 떨어졌다. 그때 속으로 침만 흘리며 가슴에 꾹 눌러 참았다. 그런 기억의 퍼즐 조각은 자라면서 취향이 된다. 나는 빵집에 가면 무조건 단팥빵이고, 단팥도넛도 꼭 산다. 인사동에 위치한 첫 직장에 다닐 때 매일 아침 출근길에 회사 앞 빵집에 들러 단팥빵과 찹쌀팥도넛을 사서 아침으로 먹었다. 다른 빵으로 변한 적이 없다.
지금 아들 둘을 키우면서 나의 결핍과 이 아이들의 풍요가 비교되는 날이 많다. 첫째는 사춘기에 접어들며 사치병에 걸렸다. 잘 사는 집 친구들이 입는 비싼 브랜드의 옷과 자전거, 신발에 푹 빠져 있다. 내가 사준 나이키 신발과 스니커즈, 온라인숍에서 사준 로드바이크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친구 부모는 사주는데 왜 아빠는 안 되냐는 불만이 아들의 심기에 가득 박혀 있다. 부모의 소득 수준에 맞춰 욕망을 절제했던 내 성장기와는 너무나 다르다. 라떼에 대한 기억으로 사춘기 아들을 향한 인내와 부드러운 설득은 참 묘원한 숙제다. 갱년기 아빠 마음에 우울함이 쌓이기 십상이다.
생활치료센터에서 격리돼 지내면서 전화 한 통 없는 첫째를 생각하며 든 마음은 내려놓음이다. 이 아이는 내 손님이라고 생각하고, 지금의 모습은 언젠가 변하게 될 일시적 모습으로, 잠시 머물다가 사라지는 아이라고 여기고 기다리는 것이다. 이 아이가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면 감사하게 여기자고.
심지어 내가 격리 마치고 돌아온 뒤 눈길도 제대로 주지 않는 첫째에게 말했다. "아빠가 코로나 잘 나은 기념으로 원하는 거 하나 선물해 줄게, 말해 봐." 답이 없다. 아마도 지금 나를 화장시키면 사리 엄청 나올 것이다!!^^ 2021.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