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가벼워졌고 삶의 시각이 바뀌었다
퇴소 날이다. 10시부터 퇴소라고 준비해 놓고 방에서 대기하라는 방송이 나왔는데 11시가 다 되어도 연락이 없었다. 방문을 두드리는 퇴소 신호를 대기하면서 덤프 아저씨와 마지막 대화라고 생각하고 복음을 전하기로 했다. 내가 종교를 묻자 덤프 아저씨는 바로 전도 들어오는구나 생각하며 시선을 핸드폰에만 고정하셨다. 그래도 정중히 여쭙는 질문에 대답은 해주셨다. 할머니 때부터 기독교 집안이고 바로 위의 형이 목사인데 자신은 무교라고 하신다. "명절 때 가족들 모이면 형님이 특히 교회 나가라고 하시겠어요?" 하자 미소를 지으며 그렇다고 하신다. 나는 대학 졸업하며 어머니 간호하면서 살아온 얘기를 들려드렸다. "그랬어요?" 하며 좀 놀라시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 방은 왜 계속 퇴소 안 시켜주는지에 대한 불만만 토로하셨다. 곧 방역복 입은 직원이 문을 두드리고 개인 짐을 들고 복도로 나가면서 덤프 아저씨와의 인연은 매듭을 지었다. 서로 건강하게 잘 살자고 인사하면서 그분은 정문에서 콜택시를 부르고, 나는 텅텅 빈 마지막 버스로 아산역으로 이동했다.
천안아산 KTX역 입구에서 하차했다. 1호선 아산역 승차장이 조금 떨어져 있지만 걸어서 충분히 이동할 수 있다. 지하철을 기다리며 편의점에서 산 모카바리스타 컵커피를 쭉 들이켰다. 내가 즐겨 마시는 매일유업 커피다. 그때는 잘 몰랐다. 시원하고 달콤한 그 컵커피의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그저 11일 만에 자유의 몸이 되어 시원하고 익숙한 커피를 마신다는 감격만 있었다. 오산대역에 도착할 때까지 <겨우, 서른>을 이어서 보면서 창밖에 휙휙 지나가는 전원 풍경에 감탄했다. 오산대역에서 기다리는 시간 없이 바로 버스로 환승하고 동탄호수공원에 하차했다. 집까지 두어 정거장 남았지만 호수공원에서 좀 쉬고 싶었고, 격리기간에 입었던 옷들을 버렸기 때문에 나를 위한 옷 쇼핑도 좀 하고 싶었다.
점심 값을 아끼려고 맘스터치에 들어가 새로 나온 치킨버거를 주문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피클 맛만 살짝 느껴지고 햄버거의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아, 생활치료센터에서 도시락만 먹을 때는 몰랐는데 미각에 문제가 있구나. 그래도 뭐 천천히 돌아올 것이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호수공원 레이크꼬모 쇼핑몰에 입점한 지 얼마 안 된 젝시믹스 매장에서 세일을 확인하고 시원한 티셔츠와 편한 바지를 샀다. 열흘간의 격리생활에 대한 내게 주는 보상으로 적절했다. 강릉크래프트라는 수제맥주집의 창가에 앉아서 페일에일을 마셨다. 이 자유의 시원함이라니! 시트러스 향이 상큼한 과일 맥주를 한 잔 더 마시고 느긋하게 창밖을 보았다. 이제 돈 벌어야 하는 가장의 자리로 돌아가도 마음을 좀 단순하고 부드럽게 만져가며 힘내도록.
하루에 두 번씩 전화를 해준 둘째가 배스킨라빈스 쿠폰 남았는지 물어왔는데 격리기간에 받은 선물 중에 패밀리 사이즈 하나가 남아 있었다. 뉴욕치즈와 쿠키앤크림 맛을 좋아하는 우리 아들 실컷 먹으라고 배달시켜 주고, 나는 천천히 집으로 걸었다. 소나기가 내려 비를 피해야 했지만, 호수공원에서 집으로 이어지는 익숙한 내 산책로와 재회하며 들은 음악은 나를 환상의 길로 안내했다.
집에서는 격리 지원 물품으로 가족들이 지내고 있었는데 내가 쓰던 안방은 방역팀이 와서 소독한 후 그대로였다. 온 방안이 다 끈적끈적해서 바로 환기시키고 안방뿐만 아니라 집안 구석구석 대청소에 들어갔다. 상단 먼지 닦고 바닥 청소기 돌린 뒤 물걸레질, 침대 시트 교체와 건조대에 있던 옷들 다시 세탁하고 의심스러운 물건들에 소독액을 뿌리고 일일이 닦아냈다. 화장실 청소와 쌓여 있던 쓰레기 버리고 마무리하니 2시간이 넘게 걸렸다. 녹초가 된 몸을 샤워 후 시원한 물로 저녁을 대신했다. 7시 이후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 습관을 유지했다. 책상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에 새벽 2시까지 잠이 안 온다. 궁금한 <겨우, 서른>을 이어 보다가 잠들었다.
영국에서 내가 매일 올리는 드라마 리뷰를 기다린다는 경민이 위해서라도 이 넷플릭스 드라마의 감상 글을 계속 쓰기로 했다. 현재 총 43화 중에 21화까지 봤다. 오늘은 <와플터치> 9, 10월호 원고 마감일이기도 하여 여기까지.
덥다! 그리고 확실히 시간이 빨리 간다.
격리돼 있을 때는 먹는 것도 단순했고, 생각을 정리하고 집중하기도 수월했다. 어제 합정역에서 출판계 지인 두 분과 만나 초밥집에서 식사하고 시원한 수박주스를 먹었는데 새로 태어나 세상에 나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코로나 확진되고 12일 정도 이질적인 격리 기간을 마치니 시각이 바뀌어 있다.
어젯밤 자정 무렵에 백신 예약을 성공했다. 처음 접속했을 때 대기자 수가 12만 명이었다가 내 차례 오기까지 한참 걸렸다. 그래도 일단 예약에 성공했으니 감사한 마음이다. 8월 16일 모더나 혹은 화이자로 1차 접종한다.
도시락과 미지근한 생수로 생활할 때처럼 단순하게 먹고 생각을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그 좁은 공간에서 계속 운동하고 글 쓰고 큐티하고 영어 공부하며 오전을 보내고 오후에 드라마 보며 생각을 정리했을 때 마음이 평안했고 차분했다. 바로 옆에 낯선 분이 계셨어도 나는 다른 사람과 비교 없이, 또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하루를 견디고 받아들였다. 자유가 없었지만 삶을 단순하고 불만 없게 만들 수 있었다. 2021.07.21
7월 23일 금요일 오후, 아내와 두 아들은 나와 밀접접촉자로 2주간 집에서 자가격리 후 코로나 검사를 받았다. 24일 아침, 모두 음성으로 결과가 나왔다. 내가 코로나 확진받으며 불편했던 가족들 모두 격리가 풀려 자유완전체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