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애, 권력 마취, 정서장애를 갖지 않은 리더가 있을까
인간은 누구나 권력을 추구한다. 권력을 쥐기 위해 저돌적으로 달려가는 이가 있는 한편, 스며들듯이 그 편리함에 익숙해지는 이도 있다. 자신에게 권력적 속성이 없다 해도 판단의 자유와 자기 판단에 따르는 무리를 보며 희열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남을 부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가지는 세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 지나친 자기애, 권력 마취, 정서장애다. 이 세 가지를 당사자는 모르거나 잘 인정하지 않는다. 회장님, 사장님 중에는 사내 직원의 의견은 바보 같은 소리로 무시하면서, 같은 내용을 외부 전문가에게 들으면 너무 좋은 아이디어라고 치켜세우며 사내에 지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신이 임금을 지급하는 사람들은 바보라고 여기고, 회사 밖 성공한 사람의 말은 좋은 의견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은 옳고 똑똑하며 직원은 바보들의 집단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사장들을 여럿 봤다. 기획력이 좋은 직원은 보스에게 반복적으로 무시당하면서 의욕을 잃고, 성취감 높은 곳을 찾아 이직하게 마련이다. 그런 환경에서 계속 일하는 사람들은 그저 뒤에서 험담이나 하고, 월급 받고 땡이라는 의식으로 회사 생활하는 분위기다. 그래도 월급만 제때 나오면 다행이고, 사장으로서는 급여 지급이 가장 중요한 책임이니 말이다.
오래전에 외국어로 된 국내 서적(그러니까 해외 서적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국내 작가의 책을 영어로 번역해 소개했다)을 한 대형서점의 외서 코너에 입점시키려고 담당자를 찾아간 적 있다. 사장님은 당연히 입점돼야 한다고 확신하고 나를 보냈다. 담당자는 이런 류의 책을 내는 회사가 다 있냐며 전례가 없다고 거부했다. 외국에서 나온 외국어 책이어야만 입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는 사장님께 일단 전화로 입점 불가를 보고했는데, 사장님은 담당자를 바꾸라고 하셨다. 그때 사장님은 과장급인 그 담당자를 부하직원 다루듯 크게 나무라며, 일가가 그 모기업에 얼마나 많은 돈을 지불하는 주요 고객인지 어필하며 이런 훌륭한 책을 입점시키지 않냐고 따지셨다. 전화를 끊고 그 담당자는 나를 10초 정도 한심하게, 그리고 가엽게 보며 그 사무실에서 뺑뺑이를 돌렸다. 저 사람을 찾아가라 해서 찾아가면 자기 담당이 아니라며 다른 사람에게 보냈고, 다시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식으로 나를 돌리다가 원래의 과장에게 다시 왔다. 화가 났지만, 일단 해결해야 하니 눈을 질끈 감고 참았다. 어쨌든 입점 서류를 작성했다. 수모를 참고 사무실에 와서 사장님께 해결됐다고 보고드렸다. 사장님은 직원이 해내지 못한 일을 전화 한 통으로 해낸 성취감의 얼굴로 수고했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회사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점점 월급 외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
다른 회사에서 일할 때다. 거창고등학교 교육 십계명을 보다가 최근에 나온 책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사장님께 기획서를 올렸다. 사장님은 좋은 기획이라고 인정해 주셨다. 마침 거창고 교장선생님의 강연이 회사와 연관된 교회의 인문학 강좌로 예정돼 있었다. 나는 그 강연회에 참석한 뒤 교장선생님과 접촉하려 했는데 사장님이 직접 전화하시겠다고 하여 전화번호를 찾아드렸다. 그런데 당시 교장선생님은 다른 출판사와 원고를 계약한 상태였다. 나는 간발의 차로 타 출판사와 계약하셨다는 교장선생님 말씀을 들은 사장님이 '그러셨군요. 좋은 책이 나오기를 바라겠습니다' 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나도 컸던 사장님은 "우리 회사가 내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저희 직원들이 부족해서 빨리 연락드리지 못했습니다"라며 죄송하다는 말씀을 거듭하셨다. 나는 사장님의 그런 태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가 1등이고, 모든 저자는 우리 회사에서 책을 내고 싶어 한다고 확신하는 어긋난 자부심이 느껴졌다. 1등 자부심을 겉으로 자주 표현하는, 자기애가 강한 사장님들에게는 정서장애가 발견된다. 직원 처지에서는 보고와 순종 외에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
권력을 가지면, 자기애와 권력 마취가 콤보세트처럼 따라온다. 부릴 수 있는 사람들, 대접해 주는 사람들로 둘러싸이니 자기 힘이 자기 힘으로만 보인다. 그 힘은 누가 부여한 것인가. 그 힘으로 쉽게 해결되는 일들 안에는 얼마나 많은 직원의 노고가 감겨 있는가. 한 발 더 나가 일반적인 정서로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분들 곁에는 예스맨만 있어야 함께 생활할 수 있다. 여기까지 오면 은근히 선을 넘는 모습도 노출된다. 시대 정신과는 높은 담을 쌓은 구시대 성벽의 조직 같은 회사들이 문화콘텐츠를 만드는 출판사에 상당수 존재한다. 창의성은 모두 사장의 창의성이어야 한다.
내가 경험한 색다른 회사도 있다. 젊은 대표의 성공한 스타트업이었다. 직원이 80명이나 되는 큰 회사였는데, 모두가 닉네임을 부르고 직급이 없었다. 창의적인 사내 문화가 혁신적이었지만,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자율적으로 회사 일을 제대로 해내지는 못했다. 출퇴근 자유를 악용하는 이, 보고 체제를 무시하는 이, 중요한 결제를 함부로 여기는 이 등 기본 관리가 되지 않기에 문제가 많이 발생했고, 더군다나 회사 운영의 핵심인 재무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자율 안에서 질서가 없는 무분별한 체제가 회사 발전의 블랙홀로 작용했다.
권력적 속성이 강하고 자기애 충만한 조직과 권력적 속성을 내려놓은 듯하지만 관리가 안 되는 조직, 모두 문제가 있다. 아직은 우리나라에서 구글이나 애플이 태어나기 어려운 환경이다. 시키는 대로 잘하는 아이로 성장해 좋은 성적을 맞고 명문대를 나와도 막상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없는 현실이다. 사회초년생들에게 창업을 권하면, 누가 얼마나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능력과 경험이 없는 젊은이들을 절벽으로 내몰면서 아무 안전망도 제공하지 않는 격이다.
자기애, 권력 마취, 정서장애가 없는 헤드리더십은 드물지만, 그걸 조심하는 리더는 존재한다. 그런데 크게 성공한 분들의 대부분은 이 세 가지를 다 가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권력을 마음대로 남발하는 사람 밑에서 좋은 월급을 받느냐, 권력을 사용하지 않는 부드러운 사람 밑에서 불안한 월급을 받느냐 이 고민의 지점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많은가. 대기업인가, 소기업인가도 비슷한 문제다.
안정을 돈에서 찾다 보면 자기의식은 뒤로 숨겨야 할 때가 많다. 그래서 안정감을 돈에서 찾지 말고 내가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를 우선 고민하는 게 필요하다. 현실은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 가장이 되어 살다 보면 숨 막히는 지점에서 산소를 찾지 않고 더 오래 참으려고만 하다가 우울증, 공황장애를 겪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