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그리고 현실, 18년 만에 다시 본 영화
12월이면 생각나는 영화 <러브레터>
<러브레터> 재개봉작을 감상했다.
용산 아이파크 CGV에서 저녁 시간에 두 편을 하기에 예매하고, 스타벅스 쿠폰 선물 받은 걸 이용할 겸 극장과 같은 층에 있는 카페에서 영화 시작을 기다리며 <국화와 칼>, <일본열광> 두 권의 책을 읽었다. 혼자서 영화 보고 차 마시며 책 읽는 이 자유로움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은 행복이 아니라 우울이다. 어머니 간호하면서 내 감정의 패턴에 변한 부분이 있는데 깊이 아플 때는 덤덤하고 그 아픔이 지나가면 우울감이 찾아온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아주 즐거울 때는 절제하고 그 즐거움이 지나가면 현실을 살아갈 힘이 생겨야 하는데 착잡한 마음이 더하다.
요즘 1일 1종현 중이다. 종현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그의 음악에 푹 빠지게 되었다. 샤이니의 데뷔곡 <누난 너무 예뻐>와 후속곡들이 히트할 때 그저 예쁜 남자 아이돌 하나 또 등장했구나 하며 관심이 없었는데, 종현 개인의 짧은 생을 안타까워하며 찾아 들은 그의 음악들에선 가사와 멜로디 모두 유재하 음악처럼 탁월함이 담겨 있었다. <한숨>을 시작으로 <론리> <눈싸움>이 담긴 소품집을 찾아들으며 천재라고 탄복했고, 지금 내 정서와 통하는 어떤 일체감을 느꼈다. 작년에 세상을 떠난 조지 마이클의 <Faith> 앨범을 처음 접했을 때 느낀 놀라움과 비슷하기도 했다. 종현의 소품집에 담긴 재즈 풍의 노래들에서 음악으로 소통하려고 한 그만의 소울이 애처롭게 담겨 있다. 더 살았으면 멋있게 나이 드는 뮤지션이었을 텐데, 그가 가진 삶의 무거움과 고단함이 내 마음에 그대로 살아서 들어왔다.
도쿄를 다녀온 지 2주가 되었다. 일본을 연구하고 싶은 마음에 두 권의 책을 번갈아 가며 읽고 있다. <국화와 칼>은 문화인류학적인 연구서로 일본을 다녀온 적 없는 학자가 남긴 흥미로운 논문처럼 읽히고(한국의 위상이 너무 미약하던 시절이라 한국에 영향받은 일본에 대해선 번역자 각주로 있는 게 아쉬웠다), <일본열광>은 김정운 교수 특유의 심리학적 분석이 재밌게 전개되고 있다. 어제 카페에서 4시간 동안 종현의 재지한 소품집을 반복해서 들으며 김정운 교수가 40대 중반에 쓴 <일본열광>을 읽었다. 이 책의 독후감은 따로 써야 할 것 같다. 도쿄 여행 마치고 일본에 대해 공부하고 싶은 마음으로 읽은 책에서 내 질문은 “우리는 어떠한가”이다. 그 사고를 하지 않고 일본을 대한다면 영원히 역사적 원한 관계로 무시와 적대감만 가득할 것이다.
저자의 40대 노총각 친구는 여자를 대할 때 예쁜 여자와 못생긴 여자로만 구분한다고 한다. 저자는 그 친구는 절대로 결혼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여자의 다면적이고 심층적인 공부도 하지 않고 이분법으로만 대하면 여자를 알지도 못한 채 늙어갈 것이 뻔하다는 게다. 마찬가지로 일본에 대해서도 친일과 반일로만 구분해서 시간을 흘려보내면 결코 남는 게 없다. 그러면서 그동안 우리 것인 줄 알고 있는 문화 콘텐츠에서 일본을 베낀 것이 얼마나 많은가. 서양에 의해서 진행된 ‘오리엔탈리즘’, 일본이 진행한 ‘옥시덴탈리즘’ 그리고 다시 재창조한 ‘자발적 오리엔탈리즘’으로 본 현재 일본의 건축물과 정원, 시각의 다양화는 욕만 하면서 무시할 것들이 아니다. 있는 것과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내어 창조해 내는 것도 능력이다.
종현의 노래를 들으며 독서를 한 용산아이파크 스타벅스는 앉을자리를 찾기 어려울 만큼 시끄러웠다. 신기하게도 콘센트가 설치되지 않은 스벅이어서 노트북 꺼내지 않고 핸드폰 배터리 용량을 확인하며 좁은 자리에서 독서하며 몰입했는데 시간이 금세 흘렀다. 여행 후 갑자기 찾아온 우울감을 떨쳐내는 데 음악과 책에 몰입한 것은 큰 도움이 됐다. 이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용기까지 얻지는 못했어도 새로운 지식의 만족감과 음악의 느낌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자존감이 상승했다.
<러브레터>는 1999년 11월에 강변 CGV에서 교회 청년들과 처음 봤다. 당시 제자들교회를 개척한 김서택 목사님이 대구동부교회 담임으로 가시는 소식이 막 알려지기 시작할 때였다. 뒤숭숭한 마음으로 청년들과 만나 대화 나누다 극장에 들어가서도 난 마음이 복잡하여 영화의 내러티브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여자 주인공이 감기가 나았다가 걸렸다가 하는 걸까? 현재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와 같이 있다가 갑자기 할아버지와 엄마와 같이 있는 저 장면은 뭘까? 음악은 왜 이리 좋은 거지? 일본 영화는 보통 이러나? 그렇다. <러브레터>는 내가 처음 본 일본 영화이다. DJ 정부에서 일본 영화 개봉이 허락되고, 1995년 개봉하여 이미 한국에서 해적판으로 많은 팬을 가지고 있던 영화를 1999년에 한국 상영이 되고 115만 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모았다고 한다.
나는 당시 사전 정보가 없었고, 어머니 간호 3년차에 접어들며 많은 고통을 견디고 있을 때라 그저 극장에서 두어 시간 내가 겪는 고통을 잊기 위한 구원을 갈망하며 극장을 찾았다. 세상의 풍경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던 그때 <러브레터>는 첫사랑, 환상적인 OST, 뒤늦게 스토리를 이해하고 후지이 이츠키와 와타나베 히로코의 1인 2역을 한 나카야마 미호의 청초함이 기억에 남았다. 집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병간호할 때 러브레터 OST를 자주 들었다. 이 연주들은 내게 많은 이야기를 건네는 듯 마음에 머물러 위로해 주어 최고의 음악으로 인정한다. 소리바다가 유키 구라모토의 곡이라고 기입한 파일로 올려서 많은 사람들이 작곡자를 잘못 알고 있는데 실제 작곡자는 Remidios란 이름을 쓰는 호소카와 레이미라고 한다. 연주한 사람은 8세 소녀라는 이야기도 있다. 음악은 다시 반복하여 들을 때 새로운 느낌이 있듯이 <러브레터>는 첫사랑의 시간을 발견하는 플롯 안에서 이 OST 때문에 여러 번 보고 싶은 영화가 되었다.
2017년이 다 가는 이 겨울 나는 8년 전에 본 <러브레터>를 산뜻하게 리뉴얼한 용산아이파크에서 다시 보았다. 디지털로 복원한 섬세한 소리들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하얀 눈의 설경과 2년 전에 조난사 한 연인을 잊지 못하는 여주인공의 섬세한 연기는 우울감에 젖어 있던 마음을 깊이 위로했다. 18년 전에 처음 봤을 때 감기로 의식을 잃은 손녀딸을 안고 40분 내로 달리는 할아버지의 그 우직함이 무섭기까지 했고, 졸업한 학생의 출석번호를 외우는 선생님의 기억력도 비현실적으로 부딪쳤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살아온 이야기들 중에 아름답고 그리운 부분만 영화의 장면과 음악에 덧입혀져 감동이 된다. 하얀 설경에 빨간 스웨터를 입고 잘 지내냐고 외치는 와타나베 히로코의 장면에서는 뭉클하여 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이 명작을 오뎅 어쩌구로 희화한 것에 화가 날 정도로.
히로코는 자신이 궁금해하여 받아 낸 연인의 중학 시절 이야기를 “이 추억들은 모두 당신 거예요.” 하고 이츠키에게 돌려준다. 이츠키는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그려진 자신의 얼굴을 보고 확인한 첫사랑을 히로코에게 알리지 않고 간직한다. “가슴이 아파 이 편지는 차마 보내지 못하겠어요.”
18년 전에 본 <러브레터>는 다분히 일본적인 영화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다시 본 <러브레터>는 가장 공감되는 영화로 다가왔다. 10월에 어머니를 하늘로 보내드린 뒤 그리움이 더해졌고, “나는 잘 있어요”라고 외치는 심정 안에 든 깊은 고통도 더해졌기 때문이다.
처음 <러브레터>를 봤을 때 어린 이츠키가 꽁꽁 언 경사지를 미끄럼 타며 내려오는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 어제 다시 보니 폐렴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장례식 후였고 얼음 아래에 죽은 잠자리를 보는 장면이 이어져 있었다. <러브레터>는 더 많이 살아보고 경험해봐야 보이는 상징들이 있다. 텐구산 중턱에서 히로코가 “잘 지내세요?”를 외칠 때 폐렴으로 죽어가다가 살아나는 이츠키가 “저는 잘 있답니다”라고 무의식 상태에서 중얼거리는 장면도 첫사랑을 보내는 사람과 다시 발견하는 사람의 연결로 다가왔다.
언젠가 오타루의 텐구산과 삿포로와 오타루 중간 정도인 ‘제니바코’역에서 걸어가면 나온다는 여자 후지이 이츠키가 살던 예쁜 집에도 가보고 싶다. 얼마 전 아들과 단둘이 갔던 제주도에서 <건축학개론>의 서연의 집에 들렀을 때 내 젊은 날의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써 내려가고 싶은 저릿한 마음을 만난 것처럼.
2017.12